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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홍(peterhong7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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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차이점
11/15/2010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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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나의 아들아


평신도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기는 99가지 신앙상식

(피터홍 생애의 주요 간증을 포함한 자서전적 저서)



28.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차이점

얼마 전(2009), 내가 가르치고 있는 캘리포니아 ABC(Artesia, Bellflower, Cerritos) 통합교육구 음악클래스에 수년간 참여하고 계시는 어느 목사님께 나는 “목사님!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을 수업시간에 슬며시 던졌다. 너무 쉬운 질문을 받은 목사님께서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시며 의기양양하게 벌떡 일어나서 하시는 말씀 왈,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는 촉성루가 있고, 밀양에는 영남루가 있고, 하늘에는 할렐루가 있다!... ^^


히브리어인 할렐루야! 직역하면, 진멸시켜라라는 뜻이며, 사이에 자연스레 생긴 발음이기에 뜻이 없고, 2인칭 복수로써 너희들이란 뜻이며, 여호와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너희들은() 진멸(殄滅)시켜라!()라는 말이다.


전쟁의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사탄의 세력을 진멸(전멸)시키라고 하신 지상명령이다. 여기에서의 진멸이란 사람들을 진멸하라는 의미보다는 가나안 사람들의 다신교 종교문화와 사상(우상숭배, 폭력, 동성애 ) 진멸하라는 의미가 강하다. 할렐루야! 의역하면, 전쟁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이다.


앞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찬양은 노래와 기도와 경배를 포함한 예배의 모든 형식을 포함하는데, 음악(노래) 있어서의 찬양을 알아보자!



                                        * 찬양  -  1. 찬송가

                                                       2. 복음성가  -  1. 찬송가 안에 있는 복음성가

                                                                              2. 찬송가 밖에 있는 복음성가

 


위와 같이 '찬양'이란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모두 포함한 말이며, 복음성가 찬송가책 안에 있는 복음성가와 찬송가책 밖에 있는 복음성가로 나눠진다.


, 현행 찬송가책은 95% 복음성가와 5% 찬송가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면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방법 >

첫째, 가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찬송가는 그 가사의 대상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이여야 하고, 복음성가는 그 가사의 대상이 사람인 것을 말한다. , 현행 찬송가책에는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복음성가의 대상이 사람인 까닭은 복음성가의 가장 큰 목적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의 사명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이고, 복음성가는 인간 대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이다. 또한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복음성가는 사람들이 듣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사내용이나 음악형식, 연주태도 등이 다르기 마련이다.


둘째, 음악형식에 의해 비교해 보면 ‘아멘’의 유무이다. 찬송가에는 곡의 마지막에 아멘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복음성가에는 아멘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셋째, 찬송가는 회중이 쉽게 부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이 없으나, 복음성가는 쉽게 익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넷째, 음악형식의 차이점은 찬송가는 하나의 가사에 하나의 음이 붙는데 반해, 복음성가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짜임새(Texture)를 갖고 있다.


다섯째, 화성(코드)의 사용에 있어서 찬송가는 장엄하고 신중한 수직적 화성진행을 하며, 복음성가는 가볍고 색채적인 효과의 수평적 화성진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반주용 찬송가책’의 악보 위에 기록된 코드들은 11 대위법으로 편곡된 찬송가 악보의 수직적 화성(Harmonic Chord)들을 그대로 분석하여 붙혀놓은 부분들이 많은 곡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수평적 화성(Melodic Chord) 4분의 4박일 경우, 한마디에 코드가 하나 혹은 첫 박과 셋째 박에 두 개가 붙어야 하며, 2박과 4박의 약박자에는 아주 느린 곡이거나, 아주 리드미컬한 부분이거나, 혹은 특별한 경우(그다음 화음을 살짝 꾸며주는 변화화음과 감7화음)를 제외하고는 코드를 붙이지 않는다.


끝으로, 멜로디에 있어서 찬송가의 선율은 직선적이고 장엄한데 비해, 복음성가의 선율은 전도를 목적으로 하므로 쉽고 가볍고 감상적이며 때로는 정열적이다.


 

< 예배 시, 찬송가책 밖에 있는 복음성가의 사용 유무에 관하여 >

뉴욕 유학시절, 나는 1년 동안 한 번도 설교 중에 시편을 언급하지도 않는 목회자와, 회중찬양 시간에 맨날 부르던 찬송가만 부르는 목회자를 본 적이 있다. 외람된 말이지만, 예배 시에 정해진 회중찬송가가 몇 장인지만 봐도 그 목회자신앙수준이 저절로 드러난다. 또한 설교 중에 시편을 얼마만큼 인용하는가만 봐도 목사님의 은혜의 깊이와 영적수준이 저절로 드러나듯이, 목회자라면 적어도 최신 복음성가는 접어두고라도 찬송가책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들만이라도 모두 한 번씩은 불러봐야 하며, 성도들에게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면 적어도 시편 정도는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한다.


2009 1, 남미에서 오신 나의 셋째 형님(홍상익 교수) LA의 큰 한인 순복음교회의 목사님께 인사차 방문한 겸에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그룹사운드에 맞추어 계속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볼륨이 너무 시끄러워서 형님은 아예 자리를 맨 뒷좌석으로 옮기셨고, 나는 꾹 참고 맨 앞자리에서 끝까지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 없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룹사운드가 찬양과 반주를 계속하였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아예 순서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찬송가는 단 한곡도 부르질 않았다. 내 평생 처음 겪어보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나의 귀에서는 “삐~”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과 두통이 일어났다. 예배당은 기분 푸는 곳이 아니다. 예배는 예배다워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관계된 음악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예배 시 찬송가책 밖에 있는 복음성가의 사용 유무다. 원래 장로교회 등의 정통보수교단에서는 찬송가책에 수록된 곡들 외의 복음성가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예배인 주일 대예배와 저녁예배 그리고 수요 삼일절예배 시에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예배나 구역예배 혹은 부흥집회나 전도집회 등의 특별한 모임, 또는 유년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에서 부르는 것은 무방하다. 그리고 위 공식적인 예배인 주일 대예배 등의 예배 전후로 부르는 것 또한 무방하다.


그러나 복음성가를 하드록과 같이 너무 시끄럽게 연주한다면, 성도들의 청각과 뇌신경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지만, 그 후에 진행되는 예배 때의 섬세하고 질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악기 연주와, 성가대의 평화롭고 은혜로운 찬양을 들을 때에는 이미 귀가 멍해져 있기 때문에 그 찬양이 잘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찬양의 은혜조차도 받질 못하게 된다.


요즘 이런 시끄러운 종류의 복음성가들을 틀어놓고 마치 나이트클럽이나 온 듯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신없이 펄쩍펄쩍 날뛰면서 노래하는 청소년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은혜 받는 것과 열 받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춤(Holy Dancing)’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춤’에 대한 분명한 은사의 개념을 올바로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주위에 있는 대형교회의 중고등부 학생예배에 참석해보면, 학생들이 찬송가책은 소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부르지도 않고, 유행하는 복음성가만 부르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며, 전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회의 학생들이 자라나 성인이 되고, 교회의 기둥들이 되어, 예배 시 찬송가의 은혜를 전혀 받을 수도,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면 과연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대중음악과 같이 청각에서 오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찬양에 유입시키는 것은 위험하며, 청아한 음성과 정확한 곡조로 찬송을 부르며 그 아름다운 소리를 통하여 표현되는 내용과 그 섬세한 음악을 통하여 감동을 서로 나누는 예배관습과 풍토를 회복하고 조성하는 데에 오늘날의 교회들이 그 책임을 지고 앞장서야만 한다.


찬송가책은 비록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찬송가책은 신학자, 목회자, 언어학자, 문학가, 교회음악 작곡가... 등 각 교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면서, 노래가사의 역사적 성경적 근거, 작사 작곡가의 교단과 신앙배경 등, 4단계에 걸친 철저한 심사를 통해 선정된 곡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찬송가책 밖의 복음성가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검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예배 중에는 사용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찬송가책에 수록된 한국인이 만든 곡들 중에서 현행 새찬송가 323(통일찬송가 355, 부름 받아 나선 이 몸)과 같이 못갖춘마디의 곡을 갖춘마디로 마디줄을 엉터리로 그려놓아 음악적으로 잘못된 곡들도 있지만, 특히 새찬송가 582(통일찬송가 261, 어둔 밤 마음에 잠겨)과 같이 완전히 잘못 선정된 곡도 있다. 각 교단에서 추천해 올라온 곡들을 검토, 선정하여 ‘통일찬송가’책을 만들다 보니, 그 과정에서 군소교단에서 추천되어 올라온 소수의 곡들도 선정이 되어야 함으로 인해 이 곡이 어쩔 수 없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현행 새찬송가에도 또 실렸다. 이 곡은 한 자유신학자 김재준이 만든 사탄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분리되면 되었지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찬송가책에 수록된 복음성가와 그 밖의 복음성가의 차이점 >

딱 잘라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찬송가는 피가 있고, 복음성가는 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데, 한 예로 미국에서 교도소 장기수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 방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찬송가 한 곡을 계속 부르게 하고, 다른 방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복음성가 한 곡을 계속 부르게 했더니, 처음에는 찬송가를 부르던 죄수들은 냉랭하고, 복음성가를 부르던 죄수들은 눈물바다를 이루더니, 시간이 갈수록 찬송가를 부르는 죄수들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복음성가를 부르는 죄수들은 냉랭해져 인상을 써가며 억지로 부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유무이다.


피없는 제사, 피없는 예배, 피없는 찬양, 피없는 기도, 피없는 회개, 피없는 사랑, 선교, 구제, 헌금...은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다. ( 4 - 피없는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심)


찬송가 밖에 있는 복음성가, 특히 우리가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는 빈야드운동, 신사도운동 등 불건전한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이 만든 곡들도 있고, 찬불가를 만든 사람들의 곡들도 있는데, 심지어 ‘시편 23편’ 등의 성가곡들을 작곡한 나운영 교수(장로)는 각 종교계를 드나들며 가톨릭 성가를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받고 찬불가까지 만들기도 했다.


 

< 최근 새로 편찬된 새찬송가에 관하여 >

2006 9월 한국찬송가공회에서 새로운 ‘새찬송가’를 출간했다고 해서 즉시 서점에서 구입하여 꼼꼼히 훑어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나와 똑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새로 추가로 삽입된 곡들을 하나하나 검토를 하였을 것이다. 우선 내 눈에 띄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보고 싶다.


첫째, 모든 곡들이 분명한 빠르기표의 숫자가 없고, 그냥 대충 느리게, 조금 느리게, 조금 빠르게, 빠르게 등의 표시만 되어있다. 빠르기가 숫자 5만 차이가 나도 연주와 반주의 리듬패턴이 달라질 수 있다. 음악의 3요소인 멜로디, 화음, 리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리듬이다. 리듬에서는 박자와 템포(빠르기)가 자장 중요한데, 빠르기표가 없는 음악은 죽은 음악이다. 더욱이 찬송가의 원작에 이미 기록되어 있던 빠르기표를 없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짓이다.


둘째, 찬송가편찬위원회에 관련된 사람들이 가사와 작곡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예술적 가치에 상관없이 서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실으려고 했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역시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찬송가편찬위원들에게 정치적인 로비에 의해 자신의 가사와 곡을 새찬송가책에 실은 경우들이 눈에 띈다. (그들 중, 몇몇 저작자들이 나와 지인들이라 지금 구체적으로 새찬송가 몇 장이라고 여기서 밝히기는 아주 곤란하다)


셋째, 현존해있는 한국 저작자들의 새로운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그 곡들의 가사의 은혜와 작곡의 음악적 예술성이 너무 빈약하다.


넷째, 성도들이 오래 전에 부르다가 질려버린 유치한 복음성가들이 새찬송가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교단들이 통합하여 철저히 검증되지도 않은 노래들을 삽입한 버전(Version)의 이러한 새찬송가와 같은 책은 반드시 재편되어야 한다. 또한 현존해있는 저작자들의 노래들을 싣는 데에 더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고, 또한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신앙을 장담할 수 없기에, 가능하면 저작자의 사후에 후세 전문가들이 그 사람의 신앙노선과 가사와 음악에 대한 객관적인 철저한 검증을 통해 새롭고 은혜로운 찬송가들이 실릴 수 있도록 현존하는 저작자의 노래들을 배제시켜 더욱 더 찬송가로써의 가치가 있는 우리나라 찬송가책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번 잘못 실은 노래를 찬송가책에서 다시 삭제시키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1893,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元杜尤)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찬송가책이 출판된 이후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고려파 총회 등에서 각기 다른 찬송가책들을 출판해 사용해오다가 1959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총회(예장총회)에서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60 12월에 ‘새찬송가’를 내자는 결의를 하고, 정식으로 구체적인 출판사업을 추진하였다. 찬송가 원작의 작사, 작곡 그리고 그 일시 및 출판의 역사 등을 세밀히 알아내고, 원작에서의 직접 번역을 시도하며 완벽을 기하고저 최선을 다한다는 기본원칙을 세워 다양하고 철저한 검토를 통해 1962년 비로소 ‘새찬송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1962년 예장총회에서 편찬한 옛날 ‘새찬송가’의 좋은 가사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끔씩 나의 어린 시절(1960~1970년대)에 부르던 옛날 ‘새찬송가’가 무척 그립다. 그 후에 새로 나온 찬송가들의 가사들은 옛날 ‘새찬송가’ 가사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곡만 예를 들어보면,


* 내 진정 사모하는(옛날 새찬송가 110 3)

참 맘을 다하여서 주님을 따르면 길이길이 나를 사랑하리니

물불을 왜 가리며 창검이 겁나랴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시라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 누리고 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네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다시 유가 없도다


* 갈~보리산 위에(옛날 새찬송가 154 4)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주의 십자가에 모든 부끄럼을 내가 기쁘게 당하리라


* 자비로운 주 하나님(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옛날 새찬송가 479 1)

자비로운 주 하나님 날 구원했으니

내 잃어버린 생명을 이제야 찾았네



그리고 잠시 위에서 언급한 바, 현행 새찬송가 582(통일찬송가 261)에 실린 ‘어둔 밤 마음에 잠겨’와 같은 엉터리 찬송가는 옛날 새찬송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노래는 해방 후,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로서 1952년 정통보수장로교단(대구 총회)으로부터 제명된 김재준이 쓴, 아무런 성경적 근거의 내용도 없는 새마을노래 풍의 민족주의 노래일 뿐이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탄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14:12). 한번 찬송가책에 잘못 실린 이런 노래조차도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다시 삭제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그 열매 만민이 산다...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국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계명성: 사탄을 지칭)



< 결론 >

얼마 전(2009), 내가 살고 있는 세리토스의 ‘세리토스 동양선교교회(구 성결교회, 현 초교파교회)’에서 김승준이란 가수의 찬양집회가 열렸다. 나는 잘 모르는 젊은 가수라 위 집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기독교 TV방송을 통하여 보게 되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하는데, 귀고리를 하고 상체를 거의 다 드러낸 짧은 티셔츠 사이의 어깨와 팔뚝에 큰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19:28).


시끄러운 노래들과 이상한 가사들과 미친 춤들도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적어도 교회 예배실의 강단에서 한 이러한 이상한 찬양집회를 기독교방송에서 방영을 한다는 것이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는 남자가 귀고리를 하고 다니면 동성애자로 간주하는데, 구약 때에는 율법에 따라 즉시 처형시켰다( 20:13). 수십 년 간 교회성가대 지휘를 해온 나는 성가대 찬양 시 여성성가대원들에게도 귀고리 등의 장신구를 절대 착용 못하게 하고 있다( 33:4-6).


33:5-6 (장신구 착용금지)

여호와께서...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19:28 (몸에 문신금지)

...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20:13 (동성연애 금지)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990년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복음성가는 거의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노래들이었지만, 그 이후의 복음성가는 젊은이들 위주로 급속히 진화되어 이제는 온갖 대중음악 장르를 다 사용하기 때문에 가사를 빼고 들으면 대중가요인지 복음성가인지 전혀 구별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빈야드 운동과 신사도 운동 등의 변질된 이단들이 만든 곡들이 아무런 검증도 없이 마구 번역되어 한국교회로 들어왔다.


오늘날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교인들까지도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혼탁한 현대문화가 안겨다 준 마귀의 선물이다. 문화 중에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 중의 하나가 음악이며, 또한 젊은이들이 가장 가까이 접하고 있는 것이 사회에서는 대중음악이고, 교회에서는 바로 복음성가이다. 사회는 건전한 대중음악의 회복이 필요하며, 교회는 찬송가의 회복이 절실한 시기이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인 대학원 시절, 나는 내가 지휘하던 대구동부교회의 주일 대예배 때에 복음성가를 부르게 하기 위하여, 가끔씩 “복음성가는 피가 없다!라고 말씀해 오신 (고)김덕신목사님께 복음성가의 은혜를 체험케 하려고 부단히 설득을 하며 애를 쓴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드디어 우리 목사님께서 주일아침 대예배 때, 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딱 한 곡(내게 강 같은 평화)의 복음성가를 부르신 적이 있었는데, 예배가 끝난 뒤 내가 이끌고 있던 돌샘찬양선교단 대학생단원들과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성공했다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솔직히 ‘찬송가의 회복과 복음성가의 추방!을 외치고 싶다(하도 야씨끼리하고 시끄러워서...). 이제는 예전과 같이 예배 시작 전에 성도들에게 예배를 고요히 준비하며 묵상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다시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예전과 같이 찬송가의 깊은 화성의 감동을 느끼면서 부르고 싶다. 드럼과 전자악기들의 소음 때문에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편곡한 찬송가의 그 깊은 화성을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기도원이라면 이해를 할 수도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클래식음악을 전공한 나뿐만 아니라,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예배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거부감이다. 요즘 대중음악 애호가들과 언론 매체에서도 시끄러운 전자음악에 질려서 Unplug음악(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악기연주)으로 돌아가는 추세인데 반해, 교회음악은 도리어 거꾸로 가고 있다.


대중가요처럼 일시적이고, 감정적이고, 끝없이 바뀌고 변화되는 수많은 복음성가들의 가사와 곡을 만든 많은 이들의 허구성을 오랜 기간을 통해 차차 깨닫고 느껴오면서,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나오는 피없는 찬양이 과연 예배에 어떤 진정한 은혜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이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부르려면 얼마든지 불러라! 그러나 적어도 예배시간에 만큼은 절제를 하고 다같이 찬송가를 부르자! 그리고 예배 밖에서라도 찬양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반(50%) 이상은 찬송가(찬송가책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


2천 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 퍼부었던 불과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도,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시원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도, 성결하고 온유한 영을 부어주는 거룩하고 고요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도, 교회에 덕을 세우는 각종 은사들도 우리들에게는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성도마다 그 처한 환경과, 믿음의 분량과, 믿음의 단계와, 지적 문화적 수준과, 교단이 제각기 다르기에 은혜를 받는 방법 또한 각각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분명한 하나의 원칙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교회들에게 어떠한 때에, 어떠한 장소에서, 어떠한 찬양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할지를 똑바로 가르쳐주고 있다.


평생에 단 한 번의 추문도 남기지 않으시고, 수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존경을 받아오신 대구동부교회 김덕신 목사님은 비록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위의 말씀인 “복음성가에는 피가 없다!”라는 그 한마디가...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강하게 나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다.


내 자랑이 아니라, 뉴욕서 내가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한 아론 코플랜드 음대(뉴욕시립대학교)는 작곡과 음악이론이 미국 최고의 대학이며, 또한 내가 지휘를 공부한 쥴리아드 음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연주(Performance)가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내가 이수한 캘리포니아 주립대(UCLB)의 음악교육과 정교사 자격증 과정은 미국 최고의 ABC통합교육구 정교사들을 배출하는 기관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동안 수많은 순수음악, 특히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서 계속 느껴오던 하나의 의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용이 없는 음악들의 소리의 아름다움에만 도취한다면, 과연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의구심이었다. 바로 이 점이다! 베토벤과 모짜르트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아마 모든 크리스챤 음악가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실력을 가진 믿음의 음악가들이 의미 없는 세상음악에서 떠나, 바하와 헨델처럼 교회음악으로 돌아와 위대한 찬양을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10 33번 ‘청각에서 오는 시험’ 중에서 -

“내가 만일 찬송의 내용보다도 그 음악소리에 마음이 끌렸다면 그것은 벌 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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