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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h1>장준하 선생님의 자제들</h1>
11/16/201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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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권(장남) 인터뷰 - "용서는 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굉장한 악연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한국인은 일본 정규 육사로 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박정희는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나라를 받들겠다)이라고 혈서를 썼다. 학교 교장이 '이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고 추천을 해서 들어갔다. 그러나 장 선생님은 박정희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장호권씨는 아버지를 장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장 선생님이 박정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남로당 사건 때였다. 오제도 검사가 장 선생님에게 이런 의논을 했다. '박정희는 국가를 배신했고, 민족을 배신했고, 자기 동료까지 배신했다. 이런 자는 안 된다.' 육군 특무대에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는데 자신의 동료들을 팔아 먹고 박정희가 살아남았다. (장 선생님이) 그 때 박정희라는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별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자가 있구나' 정도였다.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그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아, 그 사람이 일으켰구나.' 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한국일보>에서 대담을 했는데 '(민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쿠데타 직후에는 장 선생님도 긍정적인 평가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랬다. 당시 사회가 그런 꼴이었다. 그래서 질서를 바로 잡을 필요는 있는데 질서 잡고 나서는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약속을 안지키고 정권을 잡으니까 그 때부터 박정희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했다. 당시 박정희가 사람을 보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 5가에 있었다. 계급장을 달고 왔는데 대령 정도 된 것 같았다. 뭘 하나 건넸는데 장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쫙쫙 찢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모자가 휙 돌아갔으니까. 박정희와는 그렇게 끝났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제스처를 취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돌아가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났나?"

"'올 게 왔구나', '차라리 감옥소에서 돌아가시지.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집에 돌멩이가 날아오고 그랬다. 유리창이 깨지고. 왜 그랬는지 안다. 한 달 전쯤인 7월 말에 YS, DJ, 함석헌, 유진오 선생과 함께 5자 회담을 해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장 선생이 총대를 메라'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광복절을 맞이해 본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무산이 됐다. 그런 말이 새 나간 것이다. 그 직후 청와대 있었던, 장 선생님을 따르던 작은 아버지 친구 분이 '몸조심 하시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장 선생님이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로 갔다. 임시정부에서 만찬을 하는데 장 선생님이 대표 연설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어렵게 임시정부로 왔는데, 각료들이 당을 하나씩 갖고 있더라. 도망 온 학생들을 서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돼 있고,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서 합쳐서 싸울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25살 도망병 (장 선생)이 어른들 앞에서 '이런 꼴 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가 왔다면 차라리 돌아가 일본군에 가서 비행기 조종을 배워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김구 선생님이 장 선생을 비서로 뒀는데 신학대학을 나온 장 선생을 꼭 목사라고 불렀다."

"이념적으로 좌파는 아니었나."

"절대 아니었다. 장 선생님이 통일 문제라는 주제를 놓고 그 시각으로 민족을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좌파'로 몰아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장 선생님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 민족통일에 왜 좌우가 필요하느냐. 이것은 지상 명령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아 정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고 했다. 박정희가 한 번은 장 선생님을 공산주의로 몰려고 간첩을 하나 연결시키려다 망신을 당했다."

"그 동안 어디서 살았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자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생활하는데 십 원 한 장 없고, 쌀 한톨 없었다. 제가 왜 박정희에 대해 더욱 한을 가지고 있느냐. 정적이 없어졌으면 끝내야 되는데, 왜 그 나머지 가족들까지... 내가 정치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집안을 (기관원들로) 뺑 둘러쳐서 출입을 못하게 했다. 김옥길 여사가 보다 못해 지게꾼에 쌀가마 지게 하고 와서 밤중에 담장으로 던졌다. 그것으로 한 달 먹고 살았다. 김옥길 총장은 그것 때문에 김종필에게 불려갔다는 것 아니냐. 김종필이 '당신 유신에 반대한다며' 그래서 김옥길 여사가 '쌀 한가마니 던져주는 게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했다고 하더라."

"한국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서 나가 있었나?"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뒤에 제 밑에 남동생이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 쫓겨났다. 여동생 둘이 이화여대를 다녔고, 그 중 한 아이가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입을 줄이려고 졸업하자마자 얘들을 다 시집보냈다. 밑에 남동생은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막내는 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됐다. 막내는 지금도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동남아로 도망 나갔다. 뿔뿔이 헤어진 지 36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모두 모인 적이 없다."

"한국을 왜 떠났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테러를 당했다. 제가 유엔하고 미국에다 매일 성명서를 보내고 하니까. 4월 19일이었다. 기자들과 술을 먹고 들어가다 보안사 요원들을 만나 테러를 당했다. 경희대 의료원에서 6개월을 보냈다. 하비브 전 미국대사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니까 경희의료원이 기관원들에게 뺑 둘러 쳐졌다. 그것을 보고 내가 '장 선생님도 죽였는데 나 같은 것이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날 밤에 도망을 쳤다. 20년 동안 외국에 있었다. 처음 도망갔을 때는 힘들게 나갔다. 엉터리로 서류를 만들어서 도망갔는데, 도움 받은 몇 분이 있다. 도와준 분들이 나중에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라. 말레이시아에 가서 3년 있다가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서 '됐다'하고 들어왔는데 전두환이 들어서서 재야 운동한 학생, 지도자 잡으라고 해서 또 도망갔다. 5년 전에야 들어왔다."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 친구였다. 친구들의 자제들이니까 문성근씨는 잘 아는 사이인가?"

"어릴 때부터 안다. 교류는 별로 없었다. 장 선생님이 두 가지 모임을 했는데, 하나는 한길회였고, 또 하나는 복음동지회였다. 복음동지회는 기독교 관계 사람들이고, 한길회는 장 선생이 훗날 수권을 위해 만든 모임인데, 유창순 씨, 오제도 검사, 이런 사람들이 40~50명 포진해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고 난 뒤에 거기에서 다 뽑아갔다. 문익환 목사님은 복음동지회 멤버였다. 복음동지회는 현실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한 기독교 모임이었고, 친분관계 위주였다."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어떤 사업을 하나?"

"장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민족관, 20대 때 가졌던 국가관을 기리고 있다. 대학생들을 한 번에 100명 씩 매년 1회 뽑아서 10박 11일간 일본군에서 탈출했던 경로를 탐사한다. 당시 일본군 진영이 청도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탈출을 해 중경 임시정부까지 가는데 거리가 6000리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고. 6000리 길을 걸었다. 탈출 할 때 5명이 탈출했는데, 가면서 계속 모아서 도착한 게 56명이다."

"돌베개가 무슨 뜻인가?"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광야로 떠나 돌베개를 배고 잔다. 장 선생님이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일본군에 끌려갈 때 모친에게 '내가 끌려가면 일본군에서 탈출할 것이다. 탈출하기 전에 내가 편지를 보낼 텐데, 그 안에 성경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암호를 주고 갔다. 그리고 탈출하기 전에 편지를 모친에게 쓰면서 '내가 광야에서 돌베개를 찾는다'는 구절을 넣었다. 그걸 보고 저희 모친이 '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쓴 돌배게라는 구절을 책에다 썼다."

"장호권 선생도 언론인인가?"

"그렇다. 언론은 내 삶의 일부분이다. 몸에 뱄다. 조그마하지만 <사상계>를 해 나가고 있다. 인터넷으로 나온다. 인터넷은 잡지라기보다는 뉴스 위주로 간다. 오프라인 종이지가 나온다. 판매는 안하고 정기구독을 한다. 지금 정기구독자가 1200명 정도 된다. 광고도 안하고 (서점에서) 팔지도 않으니까, 입소문으로 인터넷 보고 신청을 하면 보내주는 것이다."

- 프레시안 고성국 박사(일부발췌) -


장호준(3남) 목사(UCC 커네티커트 코리안교회 담임)

1959년 2월7일 서울시 신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박정희의 탄압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 났다. 해서 신촌 집에 대한 기억은 별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는 "쫓겨나서 여관에서 지내던 기억만이 조금 남아있고, 그 때부터 시작해서 전세집 이사 전력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때는 상봉동 전세집에 살 때입니다. 신촌 집에서 쫓겨난 이후 약 십여년 조금 더 되는 사이에 대략 15번 정도 이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라고 회상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장호준 목사는 어떻게 학교를 다녔을까?

장 목사는 이에 대해 "초등학교는 이대부국을 나왔습니다. 중학교는 청운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는 수도공고를 다니다가 중퇴 했습니다. 그리고는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중앙신학교에서 신학을 했습니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신대학 신학과에서 2년간 학부 공부를 다시 했습니다. 그런 후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 후 19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싱가폴에서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을 대상으로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199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교회일을 하다가 그것이 탐탁하지 않아 1999년 미국교단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미국에 와서 지난 10여년 동안 개척교회를 운영해 왔다고 설명한다.

- 아버지 장준하 선생님과 관련하여 가장 추억되는 일은?

아버님께서는 제게 등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을 오르실 때 아버님은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산은 아버님께 있어 젊은 시절 일본군을 탈출하셔서 조국을 찾아 중원 육천리길을 걸으셨던 그 역사의 연장선 이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말씀 없이 산을 오르시던 아버님의 뒷 모습이 아버님에 대한 제 추억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으시던 군사법정에서 “나는 법 이전의 인간이다.”라고 재판장에게 일갈 하시던 그 음성이 제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고 지금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 어머니의 근황은 ?

어머님께서는 서울에서 살고 계십니다. 천주교 교회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만 요즘은 연세가 있으셔서 외부 활동을 거의 하시지 않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 가계를 위하여 보험 외판원 일을 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 아버지 형제 자매들은 ?

4남 1녀이십니다. 아버님이 장남이시고 아래로 누이와 두 삼촌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막내 삼촌 만이 현재 뉴욕에 살고계시지만 외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 장 목사님 형제 자매들은?

3남 2녀입니다. 형 둘과 작은 누이는 한국에 살고 있고 개인 사업을 합니다. 큰 누이는 씨애틀에 살고있습니다.

- 자제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딸 아이 하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와서 고등학교 2년과 대학을 미국에서 마쳤습니다. 콜롬비아 대학 다니다가 재미없다고 그만두더니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학 석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경제능력이 없다는 것을 어려서 깨우친 덕에 아버지에게 기대봐야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음을 알고,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지금까지 혼자 벌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장 목사님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

그저 기초 서적만 읽습니다. 해서 특별히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없습니다. 물론 아버님의 “돌베개”는 인상 깊은 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이정표이며 특별히 돌베개 후기 맨 마지막 줄에 적으신 “이제 나는 살아서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 한다”라는 아버님의 말씀은 제 삶의 근간입니다.

- 미국 생활 10년에 가장 마음아팠던 일 그리고 가장 기뻤던 일이 있다면?

미국 생활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글쎄, 별반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성격 덕에 어떤 것에 집착하지도 또는 무언가 목숨 걸고 이룩해야 하는 목표도 세우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 사는 일에 뛰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 깊이 가슴이 아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것을 남겨 두지 않는 듯 합니다. 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나 가장 기뻤던 일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 장준하 선생 35주기 추모회에 참석하러 로스엔젤레스 방문때 인상 (지난 8월 17일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대표:최진환 박사) 주관으로 열린 장준하 선생 35주기 추모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엔젤레스에 방문한바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현준기 선생, 손세영 선생, 김현환 박사, 이길주 선생, 조동설 선생, 노길남 박사 등 40여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돌이켜 보면 곁에서 보아왔던 아버님 모습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주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하면 그는 민주주의를 갈망하셨던 분입니다.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민족을 팔아먹는 자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민족주의자가 살아야 할 모습은 통일이라고 말씀하셨고, 통일이상 지상명제는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통일은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되어야 하고, 통일은 또 우리 현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민족관도 사랑이었습니다. 통일에 대치되는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의 십자가를 내주었습니다. 임진강에 당신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것이 이어져서 6.15선언으로, 그리고 10.4선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저는 어디를 가든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그 뜻을 붙들고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결의도 표명했다..

장호준 목사 연락문의:

Rev. Hojun Chang
First Korean UCC / Storrs Korean Church UCC
252 River Road
Willington CT 06279
860-487-3534 / 860-690-0472
www.storrskoreanchurch.org / revchang@fkucc.org

노길남/손세영 민족통신특파원






다시 그리운 ‘장준하 정신’

평생을 일제와 맞서 싸운 장준하의 삶의 원동력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흙탕물과도 같았던 조국의 현실에 굴복해 사는 ‘못난 조상’이 아닌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운 지사이고 투사였습니다. 흙탕물 같은 근현대사의 유산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장준하 평전을 연재한 김삼웅은 “장준하 선생이 대결하고 청산하고자 했던 것들이 다시 현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군의 군사대국화,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로의 회귀, 갈수록 대결 양상을 띠는 남북관계, 어용 지식인과 날라리 언론인들의 광기 어린 칼춤을 보면서 새삼 장준하 정신이 그립습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돌베개 - 장준하 자서전

장준하 선생은 내가 존경하는 그 어떤 분보다 바른 삶을 사셨고, 진정한 우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박정희 정권 때 사상계를 통해 유신정권의 부당성을 설파하신 용기를 보라.

이 자서전을 읽으며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에 순종하기 원하는 자의 참된 고뇌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야곱이 광야에서 베었던 돌배게를 베는 심정으로 이 모든 고난을 자초한 선생의 각오와 삶이 알알이 담겨 있는 이 책은 내게 다시 읽어도 소중한 마음의 의지가 될 것이다..
















아! 장준하 그 심지에 다시 불길을 - 법정(法頂) 編著

"나의 사상, 주의, 지위, 재산,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 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위대한 자기희생 없이는 통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되새길 때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럽다. 민족통일이란 혀 끝에 달린 말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온갖 편견과 불평등과 증오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나를 이루기 위한 자기희생 없이는 달성될 수 없는 고귀한 과제다.

이와 같은 신념으로 장준하 선생은 집 한 칸 없이도 당당하고 의젓하게 살았었다. 날이 갈수록 그 높은 뜻이 그립다. 돌베개를 베고 가신 님을 그리며 책머리에 외람되이 붙인다. (법정스님의 이 책은 지금 절판이 되어서 고서점이나 아주 운이 좋으면 구할수 있을 것입니다.)

- 책머리에 / 법정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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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삶 1부 '민족주의자의 길' Click,,,


'장준하'의 삶 2부 '장준하 죽음의 진실'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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