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la
굵고 단단한 놈(parkla)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3.11.2010

전체     49135
오늘방문     1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12 명
  최근 방문 블로거 더보기
  달력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 -- 1 --
08/16/2019 10:13
조회  448   |  추천   4   |  스크랩   0
IP 174.xx.xx.7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오늘부터, 문답형 질문 형태로 '한일협정'과 관련해 아주 쉬운 사실부터 점차 복잡한 논의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차근차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한일협정’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외교적으로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문건입니다. 이 내용과 그 해석, 논란의 지점 그리고 보다 큰 맥락의 역사를 아울러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일협정'은 언제 양국 사이에 조인 된 것인가요? 

1965년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약속했다가 결국 이를 뒤집고 박정희 자신이 정권의 수반이 된 다음,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면서 무척 다급하게 이뤄진 조약입니다. 

(1-1) "다급하게" 라니요? 

한일회담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협상이라는 반발이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까지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듬해 1965년 6월 22일 조인한 뒤, 국회에서는 8월 14일 공화당 1당과 무소속 2명을 구색으로 껴 맞춰 야당이 총사퇴 결의를 하고 불참한 가운데 내용 검토의 시간도 충분히 갖지 않은 채 일방적 비준을 강행한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2) '한일협정'을 위한 회담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1951년도부터 공식 논의가 시작됩니다. 1차 회담은 1952년입니다. 1965년 7차 회담으로 협정이 조인되었으니 무려 14년 동안 진행한 회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1948년부터 일본과 배상문제를 정리할 준비를 합니다. 식민지 피해, 전쟁피해와 관련한 배상요구가 핵심이었습니다. 1948년은 한국이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부를 수립한 해였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7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1948년은 일본 정부가 세워지기 전이라 한일회담은 불가능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본의 전후(戰後)처리를 위한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있고서야 비로소 일본은 주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1951년 한일회담은 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정부 차원이 생겨난 시점에서 시동(始動)을 걸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1년 한일회담은 한국보다 일본이 좀 늦게 정부로서 기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1) “강화조약”은 전쟁을 치룬 나라끼리 평화적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회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에 전쟁에 해당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참여했나요? 

아닙니다.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애초 한국의 참가에 긍정적이었으나 영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국에게 언젠가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바입니다. 특히 패전국의 입장에 있던 일본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吉田茂)) 수상은 “만일 한국이 조약 서명국이 된다면 100만의 재일 조선인들을 연합국민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경제적 부담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공산주의자이다. 이들에게 조약의 재산상 이익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결국 일본의 편에서 입장을 바꿔 1951년 5월 경, 한국을 제외하는 쪽으로 방향을 굳혔습니다. 일본을 냉전의 아시아 방어선으로 확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방침이 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희생을 댓가로 말이지요. 

(2-2)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 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 뭐가 문제가 된 것인가요?  

임시정부는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합니다. 일본을 상대로 한 교전국(交戰國)의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연합군의 일원이 될 기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한 것도 일본과의 전쟁 당사자라는 국제법적 위상을 인정받는 근거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은 일본에 대해 교전국, 또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 문제를 논의하고 배상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길이 막힌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한일회담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계속)  

생각,생각,생각,생각,생각.
이 블로그의 인기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