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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못 할 박정희의 과거
11/28/201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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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군인으로, 패전 일본 군 장교에서 광복군으로, 조선경비대 장교에서 군내 남로당 프락치로, 남로당 프락치 조직명단을 밀고한 후 좌익척결 강경파로"

파 란만장한 어느 한국인의 인생 역정이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생존력과 출세의지가 남다르게 강인했다. 말수는 적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혼자만의 계획을 실천하는데 주력했다. 언제나 힘이 있는 쪽에 가담했지만 그 기대가 사라지면 눈치 볼 것 없이 변신하고 전향했다. 그의 개인적인 욕망 추구 때문에 수많은 주변사람들의 삶이 망가졌고 끝내 본인 자신도 비운에 사라져야 했다. 박정희의 권력욕과 기회주의적 변신 이야기다.





사범학교 꼴찌가 군관학교서는 우등생으로


대구사범 재학시절의 박정희
ⓒ 박정희 인터넷 기념관
박 정희의 친일 행각을 두고 그동안 말이 많았다. 재판까지 거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으로 일단락됐다. 제국주의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아래서 그 육군 중위를 지냈다는 것이 무에 그리도 큰 친일이냐는 식의 항변이 나왔다. 유족은 물론이고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등했다.

그 러나 박정희의 친일은 한국 사람 전체가 식민지배를 당하던 불행한 시대에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뼛속까지 스며든 '친일DNA'라고 분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1965년 한일협정도 굴욕적인 외교협상 자세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았다. 박정희가 특별지시해 추진하고 체결한 한일협정은 이승만 장면 정부가 견지해 온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와 그 배상청구권 규모를 형해화시켰다. 이때 한일 간 교섭을 배후조종한 일본의 실력자들이 바로 박정희의 옛 일본군 상관들이었다.


박 정희가 휘두른 군사권위주의는 그가 바로 일본 군국주의 시대 교육 훈련받아 체질화한 결과였다. 그는 황국신민화의 교사로 훈련받는 사범학교 5년과 만주군관학교 2년, 일본 육사 2년 등 모두 9년에 걸쳐 남다른 군국주의 교육을 이수했다. 그는 사범학교에서는 성적이 꼴찌였지만 군사학교에서 최우등생이었다. 거기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숭상하는 정신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오죽했으면 100년도 더 지난 일본 메이지 유신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해 유신체제를 선포했을까. 이 때문에 미국의 아시아학자들은 한국의 산업화가 일본의 식민통치에 의해 씨앗 뿌려졌다고 말한다. 통탄스러운 것은 일본 사무라이 츨신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에 대해 교육받고 그것을 숭배하게 된 박정희가 그 증거라는 사실이다.


일제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8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놓인 '친일인명사전'에서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항목을 읽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위해 견마 충성" 출세 위한 친일의 절정


친 일에 대해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와 양해할 수 있는 것의 구분은 상식에 바탕해서 이렇게 내려졌다. 1946년 10월 초 대구를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서 민중봉기가 터졌을 때다. 봉기의 직접적인 동기는 친일 경찰과 관료의 전횡, 그리고 식량 등 생필품 유통의 자유방임주의적 양극화였다. 그런 민중의 발화요인에다 좌익 남로당 계열이 불을 붙인 것이다.


당 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좌우합작위원회가 경찰총수 조병옥을 불러 따졌다. 좌우합작위의 공동대표는 중간우파의 김규식, 중간좌파의 여운형이었다. 이들은 친일파를 숙정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병옥은 흑판에 영어 단어를 써가며 이렇게 말했다.


" 친일도 다 비슷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pro-Jap이 있고, pro-job은 그것과 다릅니다. pro-job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한 것이니 친일이라고 처벌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pro-Jap(Japan)인데, 이 경우는 단순히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서 협력하고 출세한 친일파입니다."


조병옥의 이 말이 설득력 있는 친일파 구분의 근거일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은 과연 어떤 것일까.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2기 예과졸업식에서 '마지막 황제' 푸이(시종무관장이 대리수여)로부터 은사품을 받는 사진. 친일인명사전에도 실렸다.
ⓒ 박정희 인터넷 기념관


일본의 괴뢰국이던 만주에서 발행된 유력지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 기사.


"혈서=>군관지원 (血書=>軍官志願)



29 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그 는 편지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밝혔다."


당시는 일제의 창씨개명이 강압되기 전이어서 박정희란 이름이 그대로 사용됐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시행됐다.


만 주국 군관은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군관학교에 들어가는 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19세 이하였다. 박정희는 소학교에 1년 늦게 들어간데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공립소학교에서 3년 근무한 뒤 처음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할 때 나이가 23세였다. 원칙적으로 입학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낙방한 뒤 혈서를 써서 군관학교에 보내고 세 번째 지원한 1940년 4월 입학할 수 있었다.


 

대우받던 교사직 버리고 군국주의 일본의 군인으로


▲ 박정희 만주군관학교시절의 박정희



여 기서 박정희는 첫 번째 변신으로 소학교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일제는 학교 교사를 상당히 우대했다.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려면 학교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말단 공무원인 면서기를 하면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잘 살았다. 그런데 면서기 월급이 20원일 때 사범학교 학생에게 매달 지급되는 관급 장학금이 25원이었다. 교사가 되면 월급은 물론 일반 공무원보다 훨씬 많았다. 더구나 선생은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에 대해 "긴 칼을 차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린애도 아니고 교사 생활을 3년이나 경험한 사회인이 단순히 긴 칼을 차고 싶어서 군관학교에 갔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그가 차고 싶었던 '긴 칼'이란 바로 권력의 상징, 그것이었다.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권력의지와 출세주의에 사로잡힌 박정희의 첫 결단이었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군 장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에 대해서 겨우 육군 중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중위란 시골 군수나 경찰서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상이었다. 박정희가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써 가면서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 정희가 입학한 신경의 만주군관학교 2기생은 모두 250명으로 조선인은 12명이었다. 이 중엔 5.16쿠데타 때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도 있었다. 박정희는 어렵게 입학한 만큼 만주 군관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했다. 나이도 동기생보다 4~5세나 위이고 사회생활도 그 만큼 많은 박정희는 군관학교 2년 과정을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성적우수자로서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때 이한림도 우등 졸업자로 함께 육사에 입학했다.


일 본 육사에서도 박정희는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무장하고 열심히 군사훈련에 임했다. 일본 사무라이를 동경한 그는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었고 충성스런 생도였다.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3등,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대신상을 수상했다.


만 주군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사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그가 단순히 학습능력이 뛰어난 수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구사범에 진학한 것 자체가 수재라고 하지만 거기서의 성적은 꼴찌였다. 대구사범 때 그의 성적을 보면 4학년 73명 가운데 73등, 5학년 70명 가운데 69등이었다. 이렇게 사범학교 때 열등생이 군관학교에서 우등생이 된 것은 오로지 황군정신과 사무라이에 대한 흠모가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카키 마사오...그리고 광복군으로의 변신


박 정희는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군 중위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군국주의 일본 군 장교로의 변신은 노력에 비해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막차를 탄 꼴밖에 안됐던 셈이었다.


박정희의 두 번째 변신은 창씨개명이다. 물론 일제가 강제로 시행한 창씨개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박정희는 처음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개명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흔히 하던 대로 원래의 성과 조선식 이름을 그 안에 담았다. 다카키(高木)은 고령 박씨에서 연유했고 마사오(正雄)는 정희(正熙)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그러나 2차로 완연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개명했다는 논란도 있다.


박정희의 세 번째 변신은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군의 적군에 해당하는 우리 광복군으로 재빨리 찾아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의 후손들은 그가 복무한 만주군은 일본군이 아니며 독립군이나 광복군을 토벌한 부대가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의 군대는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다.


이 때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와 있던 장준하는 박정희의 일본군 출신 전력을 지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도 이렇게 입장차이가 분명했다. 장준하가 일본이 패망하지 전이지만 부역하기 싫어서 탈출했다면 박정희는 세상이 달라진 뒤 변신으로 광복군에 찾아간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일본 육사 졸업 후 그는 본토 제14연대에 배속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만주 모란강 부근의 영안에 주둔한 만주군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박 정희가 만주군 소대장으로 주둔한 영안은 간도의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머무르던 우리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열하는 일본군에 대한 항일투쟁이 치열했던 지역이다. 여기서 항일세력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 중국국민당의 장개석이 지휘하는 국부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그리고 소규모의 게릴라부대들이 있었다.


만주군 장교로서 박정희가 직접 우리 독립군부대나 광복군을 토벌했는지 여부는 아직 근거 있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당시 주둔지의 항일세력에 대한 적군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이나 만주군이 광복군의 적군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 해방이라는 뜻밖의 소식이 만주의 서쪽 변방인 열하에 복무하던 박정희에게 전해진 것은 8월 17일이었다. 박정희는 같은 부대에 있던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인 신현준 상위와 이주일 중위(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부의장)등과 상의하고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이들이 9월 21일 경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그 주변지역 일본군에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당 시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일본군에 복무하는 10여만 명의 조선인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이나 연합국 측의 미국은 이 계획에 무관심했고 임시정부가 10여만 병력을 무장시키고 조직화할 능력은 없었다. 어쨌든 박정희가 도착한 북경에는 최용덕을 광복군 지대장으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됐고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광복군에 들어갔다.


그 가 광복군에 들어 간 것은 그 독립정신이나 이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단지 해방된 한반도에서 광복군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거기다 아무 연고도 없는 중국 땅에서 귀국을 모색하는 가장 좋은 방책이기도 했다.


가을 일본육사 본과 시절 가나가와현 소재 상무대(일본육사의 이름)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한 박정희(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범학교를 하위권으로 졸업했던 박정희는 44년 4월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생인 다니지와 지오 제공.
ⓒ 박정희 인터넷 기념관

남로당 가입, 5.16쿠데타, 유신쿠데타로 사실상 '반란3관왕'


박 정희의 네 번째 변신은 광복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 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국군 장교가 된 후 극좌 공산주의 세력인 남로당의 군사부 프락치가 된 일이다. 박정희의 형 등 가족들은 그가 안정적인 교사직을 버리고 출세한답시고 만주로 건너갔다가 거지꼴로 돌아 온 그에게 차가왔다. 그 중 둘째 형 박상희는 친일의 죄를 씻으라며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한 박상희는 46년 10월 구미지역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하다가 경찰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후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남로당의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이 국군 장교가 된 박정희를 유심히 관찰했다. 박정희가 형의 사망소식을 듣고 고향에 가 보니 이재복이 유족들을 보살펴 주고 있었다. 이재복은 고마워하는 박정희에게 마르크스 엥겔스가 펴낸 『공산당 선언』의 번역본을 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다.


1946년 10월 당시는 아직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중앙인민공화국 등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좌익 세력의 집권이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국군 장교였지만 집권 가능성이 큰 남로당에 입당한다. 바로 군내 남로당 프락치 조직원이었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변신 이상에 해당하는 일종의 '반란 행위'였다. 당시 남한은 독립정부 수립의 일환으로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발족했으며 우파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그 지도이념이었다. 조선경비대의 주요임무가 좌익계열에 의한 폭동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런 조선경비대의 장교가 정면 대립적인 공산주의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반란이 아닐 수 없다. 실제 당시 조선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조직은 1948년 한해만 4.3 제주폭동, 10.19 여수순천 반란, 11.2 대구반란 등 일련의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난 후 군내 남로당 프락치 검거와 숙군 선풍이 불어 체포된다.


박정 희의 '반란'은 5.16 쿠데타로 한번이 아니다. 유신체제 선포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들을 파괴한 쿠데타를 도발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에 대한 '모반', 5.16 군사반란, 유신 선포로 민주주의에 대한 반란이라는 또 다른 '반란 3관왕'이었다. 이로써 박정희도 전두환의 5.16 쿠데타 가담, 12.12 군사반란의 수괴, 5.18 내란의 수괴라는 반란 3관왕과 난형난제의 기록을 세웠다.



시류에 따라 변신, 필요하다면 형의 친구도 '척결'    


군 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된 박정희는 다섯 번째 변신을 거쳐 혼자서 석방된다. 남로당 비밀조직원의 명단을 몽땅 진술서에 써 낸 것이다. 그 후 조선경비대는 1천여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대대적인 숙군 조치를 단행했다.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6.25 전쟁이 터지자 현역 소령으로 복귀했으며 이후부터는 강경한 좌익 척결주의자가 됐다. 그의 좌익 척결은 자신의 전력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더욱 강경으로 치달았다.


5.16 쿠데타 직후인 8월 말경 북한은 무역성 부상까지 지낸 거물 황태성을 간첩으로 내려보냈다.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경북도당 조직부장 출신으로 46년 10월 대구 민중봉기를 주동하다가 월북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박정희의 형이며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에게 중매까지 성사시킨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박정희의 형수이며 김종필의 장모인 조 모씨 쪽과도 물론 잘 아는 관계였다.


박정희는 10년 연상으로 일제 때부터 사상운동을 해 온 인텔리 황태성에게 수시로 인생상담을 했다. 황태성도 어렸을 적부터 다부지고 영리한 박정희를 친구 동생 이상으로 아끼고 정감있게 대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국가수반에 오르자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와 황태성이 무언가 '대협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을 가능성은 그만큼 충분했다.


그래서 황태성은 간첩이기 보다는 남북 고위당국자 간에 직접 소통하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는 '밀사'일 수도 있었다. 간첩은 극형을 면하기 어렵지만 밀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것이 다시 따져보아야 할 대목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황태성도 결국 반공법 상의 간첩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박정희의 가족사에서 매우 가까웠던 그도 당시 쿠데타 정권의 좌익척결 이데올로기에 먹이가 되고 만 것이다.


(계속)




김재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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