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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⑧ 박정희, 군대 동원해 시민 짓밟고 엉터리 한일협정 추진
08/22/2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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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9) 지금까지는 일단 중요한 쟁점과 역사에 대해 좀 알게 되었으니, 14년 동안의 한일회담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싶네요.

우선 시기로 보면 3차례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1차에서 4차까지 1단계, 그리고 중간의 장면 정권 때의 5차로 2단계, 그 이후 3단계는 박정희 집권시기의 6차에서 7차까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단명해서 크게 보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기로 두 묶음이 됩니다.

(9-1) 연도별로도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우선 이승만 정권 시기를 연도로 정리하면 

1차 (1952년 2월 15일~1952년 4월 21일) 
2차 (1953년 4월 15일-1953년 7월 23일)
3차 (1953년 10월 6일~1953년 10월 21일) 
4차 (1958년 4월 15일~1960년 4월 15일)까지입니다.

날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 한국전쟁 시기가 겹치는 시기부터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 직전까지였습니다. 

3차에서 4차까지 시간이 4년 반이나 걸린 까닭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다”라는 구보타의 망언 때문에 3차 회담이 중단된 결과였습니다. 

4차 회담이 2년째 접어들어 한참 진행되던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어 회담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다.


(9-2) 1단계 한일회담의 주요 논점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일본은 재일 한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와 어업문제에만 국한해서 회담을 진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 두 나라의 기본관계, 2. 청구권 3. 어업문제, 4. 재일한인들의 법적 지위, 5. 문화재 반환 문제 등 이후 한일 회담이 다루게 된 문제의 기본 골격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회담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큰 쟁점이 되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문제가 제기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9-3) 그 이후는 한일협정 타결과정으로 들어가는 시기가 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형식상 타결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일협정 타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회담 과정과 협정 내용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협정체결 과정 또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어떤 정권이 될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반대세력을 무력진압으로 억압해서 정치를 하는 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5차 회담(1960년 10월 25일~1961년 5월 15일)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장면정권이 무너져 중단됩니다. 

6차는 1961년 10월 20일에서 1964년 4월까지 이르는 기간이었고 이 시기에 대대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3년 가까운 시기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민정이양(民政移讓) 약속 불이행, 이어지는 박정희의 공식적인 집권, 한일회담 내용에 대한 국내적 비판 등으로 정세가 불안정해져 회담 진행 자체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1962년 10월 “김종필-오히라*”의 밀담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일본 외상) 한일협정 타결의 가닥이 잡힙니다. 이는 이후 그 내용이 알려져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 김종필-오히라 메모

▲김종필과 오히라


(9-4) 그 이전에도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 시기에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의 대일 협상 자세에 문제가 드러났고 그에 대해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4.19 혁명의 주체였던 학생세대의 문제의식이 날카로워졌던 것입니다.  

반대운동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진압하게 됩니다. 

1965년 한일협정 내용을 정리한 7차는 1964년 12월 3일에서 1965년 6월 22일까지입니다. 여기서 1965년 6월 22일은 한국과 일본이 조약을 조인한 날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이 조약을 8월 14일 비준 통과시킵니다. 공화당 1당이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날치기 통과를 한 겁니다.  

비준 통과 이후에도 반대운동이 거세어지자 1965년 8월 26일에는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역시 군대를 동원해 반대운동을 탄압했으며 대학은 휴교령 조처를 취했지요. 

(9-5) 한일회담의 다른 한 축인 일본의 정권은 어떤 흐름이었나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역청구권” 논리가 회담을 난항에 이르게 한 시기, 이를 철회하고 식민지 관계 청산은 뒤로 한 채 경제협력에 중점을 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정책 전환 시기,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시기의 소극적 대응,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의 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다시 경제협력 개념을 중심으로 한 협정타결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9-6) 일본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가 없었나요?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과의 군사관계를 강화하는 신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안보투쟁(安保鬪爭)”이었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이 하나로 엮어지는 군사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였지요. 

게다가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해서 일본 내에서 저임금 구조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9-7)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는 제기되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일본 내 안보투쟁의 한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책임추궁,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의 문제는 소멸해버리고 미국의 냉전체제에 한국과 일본이 하부구조로 결합하면서 경제적 관계를 수직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9-8) 미국의 역할은 어땠나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미국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라는 점,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세계정책에 하위체계로 연동되어 있다는 점, 이걸 돌파하지 않고서는 정상적 관계를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민족적 위상을 제대로 만들어낼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체제의 해소는 진정한 한일관계의 정상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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