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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정부는 불법이다" 주장한 일본, 한일협정 밀어붙이다 ⑤
08/19/2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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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6) 우리에게 그토록 불리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에게 식민지 배상에 대해 면죄부를 준 셈이니 일본으로서는 좋아했겠어요. 이걸 계기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거라면 일본은 한일회담에 대한 준비도 그런 입장에서 했을 텐데, 두 가지 질문이 있어요. 

우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어떤 태도로 회담에 임하게 되었을까하는 것과 어떻게 한일회담이 시작되었을까, 하는 거에요. 순서로 보면 두 번째 질문이 먼저가 되겠네요.

한일회담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된 뒤 미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시작됩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고, 그해 10월부터 한일 예비회담이 열리고 1차 회담은 1952년 2월 15일부터 4월 21일까지 했어요. 그때 한국은 한국전쟁 중이었어요. 

어디서 했는가, 이것도 중요한데 일본 동경에서 열렸답니다. 일본에서 미군정을 책임졌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ters/SCAP: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실제로는 미군 사령부가 있는 회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회담 공식 언어도 영어였습니다. 

미국은 한일회담을 통해 한일관계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만든 질서 안에 담기도록 하려한 것입니다.  

(6-1) 우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서명 당사자가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요?

바로 그 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 당사자가 아닌 한국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포함시키는 작업, 이게 미국이 의도한 한일회담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기본적인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배상문제를 비롯해 식민지 문제의 청산을 제기했지만 미국은 일본이 요구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문제”에만 국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문제는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반발이 워낙 커지자 결국 의제가 확대됩니다. 본격회담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빠지지만 예비회담에서는 참관인 명목으로 참가해 (윌리엄 시볼트 William Sebald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일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끌고 갔습니다.

(6-2)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웠는데 왜 그런 거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 냉전체제의 구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기본 목적이었고 여기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시켜 냉전수행기지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해서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그 기반을 적극 활용해서 경제부흥을 통해 미국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의 강력한 반공망(反共罔)을 만들고자 한 것이지요. 

친일세력을 청산하기 위한 한국의 반민특위법률 제정이 미군정에 의해 계속 가로 막혔던 역사도 모두 이런 미국의 세계정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수직적으로 일본의 하위구조에 위치하도록 한 것이구요. 

우리는 경제적 재원이 절실한 상황이 여기에 얽혀 한일회담이 이 틀 안에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6-3) 의제를 “재일조선인 법적 지위문제”로만 국한시키려 한 것은 왜 그렇지요?

패전국 일본은 일본에 있는 재일 조선인/한인들을 부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패전 직후 200만 명 가량이던 이들은 다수가 귀국 후 60만명 정도 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법적으로 일본인이었으나 이제는 법적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집단이 된 셈입니다. 

미국으로서도 냉전체제 강화를 위해 일본의 입장을 편들고 나선 것이지요.

(6-4)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회담에 임하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자세, 어떤 거였나요? 

중요한 대목만 짚어볼게요. 

1. 조선의 병합은 조약으로 적법하게 이루어졌다.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취득이다.
2. 조선통치 시절 한국인의 경제, 문화생활은 향상되었다.
3. 일본이 한국을 위한 통치를 했기 때문에 도리어 한국으로부터 받아 낼 것이 더 많다.

(6-5) 이건 혹시 지금 일본의 아베 정권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생각 아닌가요?

겉으로 내놓고는 그러지 못하지요. 그간 여러 총리들이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사과라는 것도 “법적 책임”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우익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가 정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역사교과서에는 바로 그런 생각이 담겨 있으니까요. 한국의 이른바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사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이후 제3차 회담(1953년 10월)을 중단시킨 일본측 회담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저 악명 높은 망언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구보타 망언'의 주인공, 구보타 간이치로


(6-6) 구보타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요? 

- 한국에 대한 일본의 주권 포기를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불법적 존재다. 
-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게 유익했다. 철도시설, 항만건설, 자본투자 증가 등이 예이다.
-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지배했을 것이다. 그건 더 나쁜 상황이다.
- 카이로 선언이 한국민족은 일본치하에서 “노예상태”라고 한 것은 연합군이 전시(戰時) 히스테리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을 통치한 미군정이 일본의 재산을 한국에게 넘겨 준 것도 국제법 위반이다.

이 가운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게 유익했다고 한 발언은 그야말로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제3차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요시다 총리가 일본이 더 받을 게 있다는 이른바 “역청구권(逆請求權) 논리”를 관철시키려 했던 시기의 문제였습니다. 

(6-7) 일본에서는 어땠나요? 

일본 외무성도 구보타의 발언을 옹호했고, 여당과 야당도 이를 지지했고 언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체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제4차 회담은 4년 뒤인 195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본의 한국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부정은 바로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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