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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금 메달
09/27/201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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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금메달

 

  딸 둘은 금메달, 아들 둘은 목 메달 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의 위치를 한 마디로 대변하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의 위치는 애 낳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위치였다. 그래서 딸이 여럿 태어나면 크게 실망해 제발 딸 좀 그만 낳으라고 '딸 그만'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아들을 낳으라고 '순남이, 복남이, 영남이' 등 '남짜'를 붙여 이름을 짓기도 했다. 또 딸이 태어나는 것을 모두 여자의 탓으로 돌렸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날텐데 그것을 이유로 남자들은 첩을 두기도 하고 바람을 피기도 했다. 이래저래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은 그저 고달풀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다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세상은 180도로 변했다. 여성들의 파워에 남자들이 꼼짝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남자들이 잘못하면 문밖으로 쫓겨나는 세상이 되었다. 내 아들도 결혼하더니 지 아내의 뜻을 먼저 따른다. 그래야 집안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주도권이 모두 며느리한테 있다. 오죽하면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이 내 아들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내게는 오빠와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남존여비 사상이 매우 투철하셨다. 대대손손 핏줄을 잇고 가문을 세우는 것은 오직 아들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래선지 내가 태어났어도 호적에 올리지를 않았다. 만일 내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난 호적에 잉크도 적시지 못 하지 않았을까?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라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하긴 하나님도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니 우리 아버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아버지는 딸은 애써 키워봐야 남의 집 좋은 일만 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취학연령이 돼도 내버려두었다. 허나 동생은 7곱살이 되자마자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어린 나이에도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의 처사에 불평을 해 댔지만 모든 것은 아버지가 결정을 했다.

  아침마다 동생이 학교를 갈 때, 나는 큰 길까지 따라 나가 동생이 가물가물한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늘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나는 정말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없이 했다. 그러지 않고야 어떻게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천막학교였다. 말이 학교지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네 귀퉁이에 막대를 세 워 흰 천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린 것이었다. 열 대여섯명쯤 되는 남녀 학생들이 줍다 남은 이삭처럼 가마니 위에 흩어져 있었다. 학생들이라고 하지만 모두 처녀 총각들이었다. 선생님이 어머니와 잠깐 얘기를 나눈 뒤 나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며 사는 것은 못 배워서라고 했다. 못 배운 설음이 뼛속까지 맺힌 어머니는 딸에게는 절대로 그 발자취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은 공부를 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침마다 천막학교에 가는 나를 배웅하며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귀에 딱지가 붙도록 타일렀다. 어머니의 당부가 아니라도 나는 한 눈 팔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욱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같이 공부하는 언니가 자신의 책보를 맡기고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며 괜히 때리기도 하며 수시로 나를 괴롭혔다. 선생님한테 이르면 가면 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학교를 못 갈까봐 어머니한테도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천막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일 년 조금 지났을 때 학교가 문을 닫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젊은 선생님이 열정 하나로 교육의 길을 가기엔 힘이 부쳤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후일을 약속했지만 배움의 터를 잃은 나는 다시 갈 곳 없는 미아신세가 되고 말았다. 답답한 몇 달을 우울하게 보냈다. 백방으로 알아본 어머니도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머니의 가슴이 까맣게 타고 내 가슴에서도 단내가 났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 동네로 이사한 뒤 어머니를 따라 동생이 전학한 초등학교 구경을 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초등학교 안에 공민학교가 있었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어머니가 이 공민학교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날로 그 공민학교에 등록을 했다. 

  천막학교와 달리 언니 오빠들은 나를 꼬마라 부르며 친절히 대해주었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뒤쪽의 허름한 목조건물이었다. 천막학교에 비하면 번듯하고 멋져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 꿈은 동생이 다니는 2층 붉은 벽돌 건물, 그 초등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공민학교를 다닌 지 일 년쯤 된 어느 날 선생님이 초등학교 편입시험을 보라고 추천장을 써주었다. 4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러 운 좋게 합격을 했다. 그 짧은 실력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을 하다니. 꿈만 같았다. 그것은 내 노력이기보다는 순전히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머니는 천막학교와 공민학교 2년을 다니고 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하는 딸을 보며 너는 커서 판사가 되거라. 이렇게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니 판사가 되고도 남겠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나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꼭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딸은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나는 늘 원망하고 갈등했었다. 요즘처럼 딸이 금메달인 세상에 아버지가 살았더라면 나는 꽤나 자랑할 만한 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지금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자책하고 계실지도 모른다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막학교를 찾아가던 날이 눈에 선하다. 공민학교를 거쳐 초등학교 학생이 되고, 중 고등학교 대학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꿈이었다. 당신이 원했던 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미국 땅에 건너와 당당히 살아가는 딸을 보며 내 딸이 정말로 금메달감이네하고 흐뭇해하실 것 같다. 나는 진정 어머니가 만들어 준금메달이었다

 


어머니의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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