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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와 인내
10/11/201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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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세와 인내



    한국 프렌차이즈 회사들의 가맹점에 대한 갑 질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이란 의 관계에서 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을 붙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행위를 통칭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도 어느 항공회사 가족들의 갑 질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미국에도 이런 갑 질과 텃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한국의 갑 질텃세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일까. 문제는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미국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들한테서 이런 갑 질과 텃세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갑 질과 텃세는 어디나 존재한다. 어린 애들의 왕따에서 부터 어른들의 자리다툼이나 자존심 경쟁 또는 이기심의 표출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나 단체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학교라면 아이들은 공부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고 회사라면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것이다.

   회사나 내가 속한 단체에서 선임()이 신임()에게 괜한 트집을 잡고 부당한 대우를 하면 신임()은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회사를 그만두고 단체를 안 나가면 되겠지만 신임이 몸담고 있는 회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곳일 것이며 단체 또한 신임이 그곳에서 하고자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회사나 단체에서 받는 갑 질이나 텃세가 신임의 인내와 능력을 인정받는 관문쯤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텃세는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에 대해 가지는 특권 의식, 혹은 밑엣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이라고 사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나보다 낮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갑 질과 상통한다. 그렇지 않아도 고된 삶에 왜 텃세가 생기고 갑 질이 생길까. 그것은 인간들의 죄성罪成에 갇힌 자기 보호의 발동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텃세와 갑 질은 당하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 모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갑 질텃세는 죄악이다.

   얼마 전 한 문학모임의 워크 삽에 참석했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열 명 남짓한 회원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가져와 공부를 하는 자리였다. 회원들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 참석이었으나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편치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무거워 나는 안녕 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유난히 차가운 눈길을 내쏘는 내 건너편 사람을 빼고는 모두들 고개를 까딱했다.

   합평이 시작되었다. 어떤 회원은 해박한 지식을 뽐내고 다른 이는 간추린 내용을 짤막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내 차례가 돼 또박또박 느낀 바를 말하던 중이었다. ‘아휴 조용히 좀 해. 시끄럽기는느닷없는 불만의 소리에 모두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나를 못 마땅히 훑어보던 그 회원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시끄런 주인공이 바로 나란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어느 사이 그녀는 ’, 나는 이 돼 있었다. 왜 그녀가 저리 당당한 자세로 내게 텃세를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기존 멤버여서, 협회임원이라 아니면 나보다 더 잘 나서일까.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기죽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나는 고드름처럼 얼어버렸다. 일순 회원들의 얼굴에도 난처한 빛이 돌았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토론을 이끄는 반장도 묵묵부답이었다.

   오래 전 한국 교회를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재직회의 때 나눠준 보고서를 보고 질문을 했다가 된통 미움을 산 적이 있었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교인이 교회 재정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뒤 꽤 오래 동안 교회의 장로와 권사님들 그리고 집사들 눈 밖에 나 신앙생활에 갈등을 겪기도 했다. 텃세의 문턱을 넘어 그들의 인정을 받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한 삼십 명쯤 모였는데 선임회원 하나가 늘 시비를 걸었다. 그녀가 늘 무안을 주고 엉뚱한 짓을 해도 거기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편이 한 사람도 없는 무인도에서 얼마나 시달렸던지. 그 회원은 오래전에 클라스를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그 때의 마음고생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도 나는 다른 회원들 앞에서 이유 없이 당한 것이다. 그날의 텃세는 유난히 가슴이 아팠다.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갑 질이나 텃세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는 타임아웃 같은 것, 인생을 관조할 나이가 아닌가. 텃세는 내 자신감을 상실하게 했고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나이도 연륜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별로 없지만 이순耳順을 넘은 내게 아직도 텃세를 받을 그 무엇이 남아 있는가, 또 그 회원은 지금도 누군가를 눌러야할 그 무엇이 남아있는 것일까.

   이런 텃세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살면서 텃세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삶 자체가 차별이고 인생이란 텃세를 헤쳐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리 보면 우리의 삶이란 차별과 텃세에 끝없이 부딪치고 싸우며 다져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한테 당한 텃세로 몸살을 앓았다. 워크 삽 회원들의 카톡방을 검색해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과 얼굴을 대조하다 어렵지 않게 그녀가 누군지를 알아냈다. 그리고 카톡을 통해 그녀의 부당한 텃세에 대해 조목조목 따졌다.

   반장이 쓴 소리를 했다. 내가 당할 때는 입을 다물더니 내 항변에 대해서는 왜 그리 당당한지 그 이유를 따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세상사는 법을 터득해서였을까. 아니면 참는 자가 이기는 자란 인내심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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