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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만난 이웃 사람
12/06/201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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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땅에서 만난 이웃 사람

 

    엘 에이 베렌도 길을 지나가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 스톱을 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낯익은 아파트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베렌도 아파트였다. 베렌도 아파트는 나의 캘리포니아 삶이 처음 시작된 곳이었다.

   준 언니가 호놀룰루에서 엘에이로 먼저 이사를 한 뒤, 뒤따라온 나를 위해 미리 얻어 놓은 아파트였다. 입주자들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 마켓, 식당, 은행, 백화점 등이 지척이라 한국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민수 엄마는 이 아파트에서 만난 내 또래의 이웃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늘 생글생글 웃음을 달고 살았다. 붙임성이 좋아 누구하고나 쉽게 친구가 되었다. 이 아파트에서 민수 엄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반면 어느 한국 회사에 다닌다는 민수 아빠는 그녀보다 머리하나가 덜렁거릴 만큼 키가 컸다. 출퇴근 때면 항상 우리 집 앞을 지나 다녔는데 간혹 마주쳐도 그저 눈인사를 끔뻑할 뿐이었다.

   준 언니 외에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민수 엄마와 금방 친해졌다. 민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쪼르르 우리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민수 엄마도 매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교회를 가서 저녁 늦게야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 때마다 민수 아빠의 언짢은 목소리가 방문을 차고 나왔다.

   어느 날 저녁 때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민수 엄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저녁 준비에 바쁠 그녀의 방문이 뜻밖이었지만 반가워서 얼른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내 손을 따라 들어온 민수 엄마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민수 엄마.” 내 독촉에 그녀는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 진이 엄마, 케첩이 떨어져 그러는데 조금만 빌려주세요. 음식을 하다 말고 사러 갈 수도 없고.” “아유,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나는 얼른 냉장고를 열어 어제 새로 뜯은 케첩을 통째로 주었다. 황송하리만큼 머리를 조아리며 새 것을 사다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잰걸음으로 돌아갔다. 그 뒤 민수 엄마는 툭하면 소소한 양념들을 빌리러 왔다. 이삼일 간격으로 마늘, , 깨소금, 참기름, , 마가린 등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빌려갔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슬그머니 그녀가 얌체 같고 귀찮았다. 다음엔 딱 거절해야지 했다가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매정하게 굴기가 뭣해 빌려주는 일은 되풀이 되곤 했다.

   그렇게 속을 끓이던 어느 날 그녀가 허둥지둥 달려와 돈 30달러만 꿔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많은 돈도 아닌 것을 하도 절실하고 급해 보여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금방 준다던 돈을 빌려간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녀는 매일 우리 집 앞을 지나다녔지만 돈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혹시 잊어버렸나?, 그녀가 지나갈 때 물어봐야지 하고 별렀지만 도대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점점 괘씸하고 미운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발길을 끊자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민수도 오지 않았다. 얼마 안 돼 나는 그녀가 이 아파트의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여기 이사 오면서 치르는 신고식이에요.” 하고 웃기도 했다.

   하루는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복도에서 왁자지껄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 엄마와 은영이 엄마였다. 둘러선 한국여자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민수 엄마 욕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한테서 멀어진 뒤 그녀는 곧장 은영 엄마와 친하게 지낸 모양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은영 엄마가 민수 엄마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싸움이 됐다고 했다. 나보다 어린 은영 엄마였지만 센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민수 엄마와 계속 어울렸더라면 저 싸움판의 주인공은 나였을지도 몰랐다. 혹시 이 아파트에 사는 외국 사람들이 볼까봐 신경이 쓰였으나 구경꾼들 중에 외국인은 없었다. 말리는 이웃들로 싸움은 더 커지지 않았다. 민수 엄마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발을 뻗고 엉엉 울었다. 여자들은 웅성웅성, 모두 한 마디씩 민수 엄마 흉을 보았다. 그녀가 공짜를 좋아한다는 둥,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했다는 둥, 수억대 빚을 지고 미국으로 도망 왔다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얘기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그 후 민수 엄마나 민수를 통 볼 수가 없었다. 민수 아빠는 우리 집 앞을 여전히 뚜벅거리고 다녔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를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별도 달도 모두 외출을 한 어느날 밤, 나는 도둑고양이 모양 살금살금 걸어와 그녀 집 방문 앞에 섰다. 막 노크를 하려는 찰나, 투박한 민수 아빠의 말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차고 나왔다.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해. 당신이 진 빚이 얼만지 알아? 매달 교회에 갖다 바치는 돈, 더 이상은 안 돼. 덕분에 나까지 빚더미에 앉았잖아. 당신이 자선 사업가야, 재벌의 딸이야?” 기어들어가는 민수 엄마 목소리도 들렸다. “교회 선교비를 내가 책임지기로 해서.” 한층 볼륨을 높인 민수 아빠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다 때려 치워. 교회가 할 일이지, 왜 당신이 책임을 져?” 나는 도망치듯 우리 집으로 와 버렸다.

   괜히 가슴이 방방 뛰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넉넉지 않는 남편의 월급에서 무리를 해 늘 쪼들린 것 같았다. 교회를 나가지 않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끔 일요일 아침 민수를 데리고 일찌감치 교회를 가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민수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의 모습은 늘 집에서 보던 민수엄마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는 수고하는 자의 얼굴이었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주고 기분 나빠하고 돈 30달러에 안달복달한 내가 왠지 부끄러웠다. 한 번쯤 민수 엄마를 만나 진정어린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두 달 후 나는 레드랜드로 이사를 했다. 몇 년 후, 그녀가 남편과 이혼했다는 얘기를 준 언니를 통해 들었다. 나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끔 민수 엄마 생각이 났다. 누군가를 위해  사랑으로 수고를 한다는 것, 하나님 뜻에 따라 살고자 했던 민수 엄마, 그녀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빵빵대는 차들을 따라가며 베렌도 아파트 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생글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 민수 엄마의 모습이 힐끗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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