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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05/03/201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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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대구 매일 신문, 2016년  시니어 넌픽숀 우수상) 

 

    이마에 주름살이 꽃잎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긴 미국에서 산 세월이 40년이 넘었으니 그렇만도 하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본다. 허둥지둥 달려온 발자국 위에 수많은 상처가 얼룩져 있다.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며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외국인과 결혼을 할 때부터 예상된 길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진 짐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살고 생을 마치겠는가, 그렇지는 못해도 내가 여기 살았음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다.

   내게는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인생이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딸이어서였다. 여성을 차별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이 만든 테두리요 속박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출생이 내가 원한 것도 아니요 부모님이 마음대로 세상에 데려온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결론적으로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가문의 업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딸, 자손의 대를 잇는 것도, 집안을 일으키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아닌 딸은 제아무리 똑똑해봤자 남의 집 좋은 일이나 시킨다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딸에 대한 소신所信이었다.

   나는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출생신고도 되지 않았다. 구석에 버려진 헌 빗자루 같던 나는 남동생이 태어난 덕분에 두루 뭉실 호적에 올려 져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7곱살이 되자 아버지는 부리나케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으나 아무 것도 모른 채 학령學齡을 넘겨버린 나는 또 한 번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말았다. 나이 많은 나는 놔두고 남동생만 학교에 입학을 시키자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악을 쓰며 대들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는 못 했다.

   어머니는 세상 물정 모른 채 멀뚱거리는 나를 끌어안고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다. 많지도 않은 딸 하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악담을 퍼부었지만 경제적 주도권이 없는 어머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내가 계집애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왜 딸인 내가 차별받아야하는지 몰랐지만 그것은 모두 내 잘못 같았다. 여자로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이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동생이 사촌과 함께 학교 간다고 동네 아이들과 쫄랑대며 나가면 나는 큰 길까지 따라 나가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기 새끼를 품어주는데 아버지가 나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어딘가로 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천막학교로 데리고 가셨다. 열댓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초라한 텐트 아래 퍼져 앉아들 있었다. 말이 학생이지 모두들 처녀 총각들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천막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은 내게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군말 없이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몹시 억울했다. 왜 늘 차별을 받는지 그들을 원망하고 불평을 해대면  어머니는 그때마다 그런 것은 다 괜찮단다. '무조건 참고 견뎌라, 선생님 말 잘 듣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 고 타일렀다. 그 어려운 속에서 인내를 한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타이름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내가 절대로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라고, 공부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못을 박았다.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딸을 공부시켜 남들한테 존경받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사는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씀하셨다.

   천막학교는 비가 오면 난장판이었다. 정신없이 돗자리를 걷어들고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고 눈이 오면 궁둥이가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다. 그 숨 막히는 더위와 모진 추위를 견디며 천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이 학교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잘은 몰랐지만 젊은 선생님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움의 길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막막한 페스탈로찌의 길을 젊음과 열정만으로 끌고 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천막 학교가 문을 닫자 가까스로 열렸던 내 배움의 샘터는 다시 말라붙었다. 나는 더 풀이 죽었고 우울한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갔다. 백방으로 알아본 어머니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한숨만 푹푹 쉬며 안절부절 하셨다. 그때 느닷없이 아버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 동네로 이사를 하고 동생은 전학을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동생이 전학 간 새 학교, 그 학교 안에 뜻밖에도 공민학교가 있었다. 공민학교는 나 같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뒤편의 허름한 목조건물이었지만 비가와도 돗자리를 걷을 필요가 없었고 눈이 와도 꽁꽁 얼어붙지 않았다. 책상까지 가지런히 갖춰진 교실은 꿈에도 그리던 학교였다. 어머니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내 손을 잡고 너는 하늘이 돕는 아이다. 이 학교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고 또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우리 반은 12살인 나를 선두로 19살까지의 처녀 총각들이었다. 동생과 함께 매일 학교를 가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니 오빠들은 나를 꼬마라 부르며 가끔 자기네들 연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지만 모두들 동생처럼 예뻐했다. 더구나 자상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담임선생님이 맘에 꼭 들었다. 인자한 아버지 같기도 하고 존경하는 오빠 같기도 해 선생님은 집에 있어도 삼삼하게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학교에 가곤 했다. 선생님도 사춘기를 타느라 삐딱한 언니오빠들보다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나를 훨씬 더 예뻐하셨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언니 오빠들과 공부하는 매일 매일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내 삶이 만발한 진달래꽃 속에 묻혀 있었다.

   공민학교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지만 내 목표는 동생이 다니는 높다란 이층 벽돌 건물, 초등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공부만 잘하면 정식 초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특별히 신경을 쓰며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공민학교를 다닌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초등학교 편입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장을 써주셨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얼떨결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렀다. 하나님의 은혜로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천막학교와 공민학교를 합쳐 2년을 다닌 실력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너는 커서 판사가 되어라. 이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걸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며 수도꼭지처럼 철철 우셨다. 어머니가 어디서 여 판사의 소문을 듣고 딸이 판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고 싶어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집애가 한글을 깨우쳤으면 됐지 무슨 중학교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진학시험을 치렀다. 꿈도 꿀 수 없었던 중학교를 다행히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다.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하겠다는 딸을 아버지도 꿇어앉히지는 못했다. 굽이굽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주고 나는 그 힘으로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갔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일학년은 내 학창 시절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비록 후기였지만 아이들은 수석으로 입학한 나를 부러워했다. 어떤 애들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자부심에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생의 애착이 뭉클뭉클 가슴을 채웠다. 그러나 내 인생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나의 존재의식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고등학교 이학년 초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드들 강을 왼쪽에 바라보는 작은 마을로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전기불이 없다는 것은, 달리는 차에 가스가 떨어진 것 같았다. 환영받지 못한 공부였기에 도시라고 학교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문화생활이었다. 책상조차 없는 방바닥에 엎드려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몸을 사른 등잔이 부스스 헝클어진 내 머리맡에 엎어져 있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드들 강을 가운데 두고 제방 둑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목포로 가는 신작로에서 드들 강다리를 건너기 전에 버스를 내려 둑을 타고 1.6 킬로미터쯤 내려오면 우리 마을 동네 입구가 보이고 그 길목에서 두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드들 강의 수문을 빠져나온 물이 집 앞 길을 따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굽이치는 물처럼 나를 향한 불행이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통학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흰 교복이었다. 하얀 교복에 필수적인 세탁소가 읍내에 있기는 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그 유일한 세탁소는 우리 마을에서 드들 강을 건너 1.6 킬로미터 쯤 가야 했는데 어쩌다 비가 와 강물이 불면 둑을 타고 올라가 다리를 건너서 3.2킬로미터 이상을 돌아야 했다. 아버지가 세탁 비를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세탁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시외버스 간이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면 쉬웠으련만! 새벽에 일어나 남평 역까지 4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가 기차통학을 해야 했다. 기차는 항상 콩나물시루처럼 붐볐다. 그 속에서 비비고 몸살을 치다 종착역에서 내리면 하얀 교복은 물에 빤 행주였다. 하교 때도 푹푹 찌는 열기로 열차 안은 폭발직전의 스팀 통이었다. 찐득거리는 땀과 고단한 삶에 지친 인생들이 뿜어내는 한숨으로 기차 안은 헉헉거리고 메스꺼웠다.

   흰 교복은 땀에 절어 다음날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두벌뿐인 교복을 주말에 깨끗이 손질했지만 그것으로 6일을 때울 수는 없었다. 매일 갈아 입어야하는 상의上衣는 정말 골칫거리였다. 땀에 푹 전 교복을 입고 활짝 웃는 친구들 앞에 서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어느 새 외톨이가 되어갔다. 일 년 전, 꿈에 부풀어 가슴을 쑥 내밀고 교정을 활개 치던 모습이 저만치 흘러간 추억이 돼 버렸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린 어머니가 밤에 등잔불 아래서 어렵사리 교복을 빨아, 숯불 다리미로 대강 주름을 펴주곤 했는데 어쩌다 지친 손이 미끄러져 검은 숯검정이 하얀 교복에 묻기라도 하면 나는 어머니한테 짜증을 있는 대로 부렸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보랏빛 멍울로 남아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 군데군데 찍힌 그 상처의 흔적들,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몇 번이던가.

   하향 열차가 서서히 남평 역에 들어서면 막혔던 하수구가 터지듯 쏟아져 내린 통학생들은 개미가 구멍을 찾아가듯 뿔뿔이 흩어져갔다. 나는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뜨겁게 달궈진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헤어진 운동화 뒤축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끼어들어 따끔거렸다. 두어 발짝마다 절름발이처럼 발을 흔들어 토돌토돌 구르는 돌멩이를 털어내곤 했다. 길게 늘어진 석양 빛 그림자 위로 축 늘어진 책가방이 못 빠진 간판처럼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드들 강 언덕의 겨울밤은 은빛 바다였다. 일찌감치 해를 삼킨 어둠이 거대한 장막을 치고 제 세상을 만난 칼바람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빨가벗은 나뭇가지들은 견디다 못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싹싹 빌었다. 그 은빛 바다위에 하얀 눈사람이 꼿꼿이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나는 이 기막힌 현실이 모두 어머니 탓인 듯 심통스럽게 가방을 떠넘겼다. 어머니는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삼학년이 되자 나는 동생과 함께 자취하는 내 짝꿍의 룸메이트로 조인을 했다. 그녀들 방에 들어온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 내 몫의 방값을 치르지 못해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특히 짝꿍의 동생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소리를 해댔다. 그들도 비용을 줄이러 나를 받아들인 것인 데 어머니가 시골에서 돈을 구하지 못해 계속 미루게 되었다. 준다준다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 주고 있으니 결국 핑계를 댄 꼴이 돼버렸다. 나도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내게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었고 설상가상 아는 사람을 만나도 차마 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기가 민망해 나는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 하늘에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 저 많은 별 중에 내 별은 어느 것일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눈에 띠었다. 별아, 별아 너는 나를 보고 있겠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내가 갈 곳이 있기나 한 거니. 밤 새 부뚜막에 앉아 별과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취직을 하든지 시집이라도 가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진즉에 미용기술이나 배우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더 처량해진 꼴이 아니꼬와 그러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골에 쳐 박힌 내가 취직자리를 알아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생을 팽개치듯 아무한테나 시집을 갈 수도 없었고 또 그럴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들일을 마치고 집 앞 물가에서 발을 씻다가 갑자기 쿵 하고 물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헤엄을 칠 줄 몰라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나가던 동네아저씨가 건져주었다. 아버지가 지나가다 손을 씻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자존심 센 아버지가 자신의 야망과 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들한테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그 화풀이를 내게 한 것이다. 나도 희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인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그래서 아무한테나 시집도 갈 수 없는 내가 미워서 나를 건져준 아저씨를 원망하며 강둑에 퍼질러 앉아 울었다.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말없는 저 구름도 자기 갈 길을 알고 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떠나자. 바로 집에 돌아와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보따리를 쌌다. 울며 붙잡는 어머니를 싸늘하게 뿌리치고 철창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드들 강을 건넜다. 강 언덕에 망연히 주저앉아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건너편 둑 너머로 폴딱 사라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을까. 그 아픔을 삼키며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우리 모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불쌍한 어머니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나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작정 K시로 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학창 시절의 몇몇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차마 그들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내 곤궁한 처지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동정하는 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는 것, 무엇보다 그 동정의 눈길이 싫었다. 내가 원해서 온 인생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내가 죽어버리면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딸이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불효막심하다고 하실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한테 맺힌 한을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킬리만자로의 산정 높이 올라가 우뚝 서는 표범이 되고 싶은 끈질긴 욕망이었다. 나를 위해 서고 나를 위해서 죽어야 진정 아버지한테 복수를 하는 길 아닐까.

   당분간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친구보다는 내 치부를 보여도 자존심 상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했다,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오빠 친구의 애인을 찾아가 며칠 의탁을 부탁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고등학교 시절 남달리 나를 아껴주던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했다. 선생님한테 내 절박한 사정을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었지만 영어선생님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재학시절 영어를 꽤 잘 했던 나를 선생님은 각별히 아껴주셨다. 선생님 소개로 며칠 후 그 곳의 큰 방직회사 사장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우선 숙식이 해결돼 살 것 같았다.

   그 집에 입주한 몇 개월 후 나는 사장님께 염치 불구하고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취직을 부탁했다. 다행히 사장님의 배려로 방직 회사경비실에서 낮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서서히 대학입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재학시절 그토록 열망하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 묻혔을 때의 좌절감이 뭉클 밀려와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다음해 봄 나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자그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삼년 반이 지난 뒤였다. 눈물로 건넜던 드들 강을 함박웃음을 안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어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해댔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생각같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늘 시간에 쫓기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고 대학 미팅에 한 번 참석할 기회조차 없었다. 생활비, 학비, 기타 잡비 등을 벌기 위해 무리한 과외를 해 몸은 더 말라갔고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느 날 마당에서 누군가가 계세요 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무심히 방문을 열었다. 어떤 중년 남자가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 결국 잡았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며 그 남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 XX 방직 공장 옆 사넬 양장점 주인 정 사장이요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망치로 때려 맞은 듯 내려앉았다. “, , 안녕하세요.” 나는 그 남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전에 방직 공장에서 낮 근무를 할 때 사넬 양장점에서 두벌의 옷을 월부로 맞춰 입었다. 나 뿐 아니라 방직 공장의 많은 여공들이 그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월부로 갚아나가곤 했다. 한 벌 값은 다 갚았으나 두 번 째 옷의 잔금이 조금 남아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방을 얻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저축했던 돈은 다 써버리고 그나마 과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매달 생활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자연히 월부금 옷값이 밀리게 되었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고 침침한 내 자취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 이렇게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어디서 해 먹던 못된 짓이야?” 그는 대뜸 나를 남의 돈이나 떼어먹는 불량자로 몰아붙였다. “숨으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나는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언제 갚겠다는 거야?” 내 몰골이 불쌍했는지 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형편 되는대로 조금씩 갚을 깨요.” 나는 죄송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또 손을 비볐다. “내가 꼭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은 아니야. 자네 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도움이 돼 줄 수도 있어. 알겠나?”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기겁을 해 그를 밀치자 나를 넘어뜨리고 점점 압박을 해왔다. 나는 밑에서 빠져 나오려 몸살을 치다 그의 어깨를 꽉 물어뜯었다. 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망할 년, 감히 나를 물어.” 그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엉엉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당장 자기 돈을 갚으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대문을 꽝 닫고 가버렸다.

   나쁜 놈, 나 뿐 아니라 다른 공장 아가씨들한테도 틀림없이 저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 것이다. 많은 공장 아가씨들이 유린당했을 지도 몰랐다. 이런 수치스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할 수 없듯 그들도 그랬을지 몰랐다. 언제 또 그 늑대 같은 정 사장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이란 것을 알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졸라 빚을 얻어 나머지 옷값을 갚았다. 그러나 그 수치스런 사실을 어머니한테도 얘기하지 못했다.

   대학 이학년 봄 학기였다. 심한 과로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나는 학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대학 병원으로 옮겨져 급성 맹장이란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비가 없었다. 가뭄에 기다리던 비처럼 목마르게 원하던 성공은 고사하고 병든 몸으로 아버지 앞에 설판이었다. 그 고난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버지는 애초부터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내가 아프다한들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기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어머니만 가슴을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설사 수술비가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이제는 내 목숨이 아닌 차라리 운명에 맡기든가 아니면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구원의 밧줄이 엉뚱한 곳에서 내려왔다. 그 대학병원의 외과과장님이 내 딱한 사정을 의대생 제자들한테서 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하셨다. 그때 의대생 반장 석현 씨와 내 친구 수현이는 열애 중이었다. 그 징검다리를 놔 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제자들은 내 사정을 교수님께 얘기했고 제자들을 남달리 사랑하시는 과장님은 제자들의 친구를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는 과장님의 부인이 운영하는 개인 병원으로 옮겨져 의대생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난 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또 한 참을 우셨다. 어머니가 원장님께 최소한의 약값만을 지불하는 인사를 차렸다.

   어쩌면 사경을 헤매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과장님 부부의 지극한 히포크라테스 의사 정신이 아니었다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또 나를 위한 의대생 친구들의 한결 같은 우정과 내 친구 수현이의 남다른 보살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죄 없는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나는 얼마나 염치가 없었는지, 그런데도 나는 그 긴 세월동안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며 편리한 존재인지, 필요할 때 찾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망각해버린다.

   육체적인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고 약을 먹으면 된다. 그 힘든 상황 속에 내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또 나를 덮쳤다. 누군가 사랑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잔인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 내게 사랑 같은 것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절망 속에 헤매고 있을 때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 내가 성공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함께하자던 그가 내 곁을 떠나갔다. 어차피 그때 사랑은 내게 사치였지만 내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에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어차피 과외를 할 바엔 서울이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 얼마나 외로운 벌판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라고 해야 낡은 가방하나였지만 마음은 꽁꽁 묶인 쇠사슬보다 더 무거웠다. 지금은 K대학으로 합병된 W대학에 편입을 했다. 벼랑에 서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갈 곳이 없어 어릴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친척 집을 찾아갔다. 눈치 없게 몸을 의탁하고 그 일대를 샅샅이 뒤져 꽤 큰 제과점에서 밤일을 시작했다. 빵집 주인아저씨의 느끼한 눈길이 가녀린 내 목덜미에 꽂혔지만 모른 채 일에만 열중했다.

   주인아줌마가 잠깐 가게를 비운 어느 날이었다. 제과점 뒤쪽에 있는 골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나를 누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더듬었다. 주인 아저씨였다. 화들짝 놀라 들입다 그를 밀치고 빵집을 뛰쳐나왔다. 성난 주인아저씨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쯤 도망을 쳤는지 길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옛날 짝꿍의 자취방 부엌에서 보았던 별 무리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둘, 별 셋 나 셋을 세다 말고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천천히 눈물을 닦고 집으로 왔다.

   잠시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학계를 제출하려 교수님을 찾아갔다. 대강 내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며칠 후 그 분의 소개로 쾌 큰 의류 생산 공장에 취직을 했다. 밤일하는 여공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빵집보다 분위기도 좋고 여공들도 나를 언니처럼 좋아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그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하루는 이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직원이 한남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센터를 같이 가자고 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회화를 배우기 위해 이 곳에 나가고 있었다. 선교사는 미국 목사님이었다. 용산에 있는 미 8군이 코앞이라 많은 미국 군인들, 미국 주재원들이 드나들었다. 얼마 후 그는 내게 자기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프러포즈였는지 단순한 동료로 유학을 같이 가자는 애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고인 깊은 상처 때문에 나는 누구와 가까워질 수가 없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얼마 후 혼자 유학을 떠났다.

   지금의 남편은 선교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센터의 목사인 동생을 방문 중이었다. 하루는 그가 내게 서울시내 관광 안내를 부탁했다. 나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그 부탁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관광을 마친 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내게 그는 원더풀 투어를 연발하며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처로 얼룩진 내 가슴에 파란 눈의 그를 만나면서 차츰 호수 같은 푸른 하늘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닌 그가 점점 내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관광을 나왔던 그가 미국에 돌아가 제대를 하고 미 8군에 직장을 잡아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자연히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 옥빛 같은 파란 싹이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고생도 견뎌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또 내게 상처만 안겨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이 무성하게 잎을 피웠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사실 남편을 노총각이라고 소개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중년의 이혼남이었다. 대학까지 공부한 것이 양코백이와 결혼을 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내 결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옛날의 물러빠진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내 편이어서 우리는 구청에 가서 박음질 하듯 우리의 결혼을 호적에 올려버렸다.

   내가 미국에 갈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연탄을 갈다 뇌진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해버렸다. 내가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꼭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생전 처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대들었다. -왜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 ? 내 뺨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분에 못 이긴 아버지가 내 뺨을 연거푸 후려친 것이다. 서러워 엎어진 나를 옆에 있던 친척들이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뒤뜰로 뛰쳐나갔다. 흰 눈 속에 덮인 텃밭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수도 펌프로 힘차게 물을 틀고 계셨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발등을 간질이며 철철 쏟아졌다. 나는 노상 헤헤헤 웃으며 시멘트 바닥에 발을 뽀드득뽀드득 비벼대었다. 어머니가 쪽박으로 물을 가득 떠서 내 발등에 쭈르륵 끼얹으며 발등을 씻겨주었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가 시원하게 품어주던 펌프였다.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수도 펌프를 만지자 묵직한 손잡이는 꽁꽁 얼어붙은 채 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는 강둑으로 올라갔다. 그때 고등학교시절 어머니가 늘 나를 기다리던 언덕에 서서 은빛으로 흐느적거리는 드들 강을 내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쫙 깔려있었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가만히 내게 속삭였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찬바람에 찢긴 나무 가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지 바르르 몸을 떨며 내게 손을 벌렸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하와이서 삼년을 살며 두 째 아이를 낳았다. 지상의 낙원이란 하와이였지만 남편의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로 또 이사를 했다. 남편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 나도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시험이라 부담이 컸지만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남편보다 몇 배의 공부를 해 운 좋게 단 번에 합격을 했다. 엘에이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남편의 막내 동생이 사는 레드랜드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같이 미국인 회사에서 부동산 일을 시작했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수입을 보장할 수 없어 나는 남편이 샐러리맨으로 취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취직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 싫은 소리를 하고 그것은 자주 부부 싸움이 되곤 했다. 어느 날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나는 남편의 입사入社 소식인 줄 알고 얼른 봉투를 뜯었다. 그것은 남편의 이력이 너무 넘쳐서(over qualify) 부득이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는 편지였다. 나는 비로소 남편이 왜 적성에 맞지 않는 부동산 에이전트를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잉여 인력으로 내 몰리고 있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옮겨도 영어가 문제였다. 더구나 미국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동산 사업에서 영어가 딸리는 것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소통을 못하고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영어를 마스터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내 길을 개척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고 한국말로 두어 줄 써서 우리 회사 부동산 광고란에 끼워 넣었다.

‘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서비스 합니다.’ 그러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집을 팔겠다는 분이 전화를 했는데 나처럼 국제결혼을 한 분이었다. 내 첫 손님이자 첫 리스 팅, 그리고 나를 부동산 에이전트로 키운 시조가 되신 분, 바로 미시즈 핸슨이었다. 그 분이 영어를 못해서 나를 찾은 게 아니라 그리움을 나누고 싶어서라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느꼈다. 그 분한테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을 내 놓은 지 3일 만에 팔려 미국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에이전트로 돈을 벌었다. 언젠가 미시즈 헨슨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매일 그런 행운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인 내가 보수적인 백인들을 상대로 백인 에이전트와 경쟁을 하면 나는 늘 패자가 되곤 했다. 고정관념과 지속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영어가 서툴러 소통의 통로가 막히는 나를 선택할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깊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들가지라도 붙잡고 헤엄쳐 나와야 했다. 딸이라고 무시한 우리 아버지의 차별을 이겨내듯,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당신들을 이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잡고 매달린 동아줄이었다.

   나는 한 지역을 골라서 꾸준한 일대일의 마케팅 전략을 폈다. 우선 그들과 마음을 나누기위해 자주 그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아 서비스를 했다. 서툰 영어지만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전문지식을 넓히고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다.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배운 것을 부지런히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손님들을 만나고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을 기록해 공부를 했다. 그런 세월이 일 년을 넘어서자 드디어 나를 찾는 손님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몇 개의 리스팅(Listing)을 확보하면서 영어 문제도 조금씩 풀리고 자신감도 붙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백인 에이전트보다 더 잘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것은 나를 무시한 아버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당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딸이 저 높은 곳에 세우려는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었다. 어느덧 그것은 내가 성공해야 되는 이유요 목적이 돼 있었다. 일단 내게 일이 맡겨지면 손님들의 만족을 끌어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성공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질주하다 보면 두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비례했다. 어린 두 아들에게 엄마로서 제대로 살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체증처럼 가슴에 걸렸다. 마땅히 애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 둘을 다 프리스쿨에 보냈다. 작은 애는 두 살, 큰 애는 세 살이 조금 넘어 겨우 기저귀를 뗐을 때였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프리스쿨에 가기 싫다고 내 바지 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2시간 후에 엄마가 데리러 갈게가까스로 아이들을 달랬다. ‘2시간 후에 꼭 데리러 와야 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시베리아 벌판에 끌려가는 죄수마냥 선생님 손에 끌러 교실로 들어가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바이 바이를 하는 우리 아이들, 두 아이를 보며 내 가슴은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결혼 전에 내가 그리던 핑크 빛 꿈은 아득히 먼 곳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손님을 만나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어 나는 숨도 돌리지 못하고 학교로 뛰어갔다. 아이들은 두 시간이 왜 이렇게 기냐고 울먹거렸다. 그때마다 내 눈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어린 아이들 생각에도 하루가 걸리는 엄마의 2시간은 무진장 길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은 빅토빌에 손님을 만나러 갔다가 일을 마친 뒤 좀 더 빨리 오려고 빅 베어 레익(Lake)이 있는 지름길인 산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산속의 겨울을 알지 못했다. 어둠이 쏜살같이 달려와 진눈깨비 눈을 뿌리며 앞을 막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어둠 속에 꽃처럼 날리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더구나 차의 가스까지 바닥을 쳐 잘못하다간 산 속에 갇힐 판이었다. 주유소를 찾아 겨우 가스를 넣고, 시동생에게 애들 픽업을 부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얼굴은 온통 눈물 반죽이 돼 있었다.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시동생 집에서 아이들을 찾아 집으로 오며 나는 나무꾼의 선녀처럼 두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이럴 때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의 오픈 하우스에도 애들을 데리고 다녔다. 내성적인 남편은 부동산 에이전트란 직업이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손님들을 만나고 남편은 대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내가 손님들을 만나고 부동산 일을 할 때 남편은 애들을 챙기고 광고 편지를 써주고 팔려는 집에 세일 사인을 붙이고 떼고 록 박스(Lockbox)를 거는 등 허다한 뒤치다꺼리를 싫다는 말없이 도와주었다. 남편의 헌신적인 도움과 맨발로 뛴 나의 노력으로 나는 점점 세일즈 우먼으로 두각을 나타내 몇 년 후에는 우리 사무실의 톱 세일즈 에이전트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유난히 스모그가 많이 끼는 랜드랜드에서 나는 심한 알레르기 증상으로 고생을 했다. 눈병이 생겨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7년을 일하다보니 손님도 자리가 잡혔고 친한 사람들도 생겨 정든 곳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1985년에 우리는 큰맘 먹고 오렌지카운티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무지나 다름없던 레드랜드에서 쌓아 올린 그 체험이 있기에 결코 두렵지 않았다.

   건강 때문에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그 곳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곳은 내가 미국인으로 자리를 잡도록 주춧돌을 깔아준 곳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운명 같은 인연을 확인시켜준 곳이기도 했다. 내가 레드랜드에 사는 동안 서로 자매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연수때문이었다. 연수는 사넬 양장점의 주인 정 사장의 딸이었다. 우연히 둘이 고국 얘기를 나누다 연수가 그 분의 딸이란 것을 알고 나는 자지러질 듯 놀랐다. 연수는 정 사장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의 장로로 좋은 아버지로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나는 연수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명암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밤에 틈틈이 컴무니티 칼리지에서 수료한 어카운팅(Accounting), 에스크로(Escrow), 그리고 부동산 감정(Appraisal) 코스도 우리가 새로 자리를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오렌지카운티로 와서 주로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부동산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레드랜드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닦은 체험이 아닌가싶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늘 공부하며 전진하는 강한 나의 도전 정신도 나를 세운 주춧돌의 하나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위틈에 난 소나무가 더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듯, 끊임없는 나의 도전 정신,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미워하며 쌓아올린 탑, 바로 그것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불어 닥친 미국의 대불황은 어찌 보면 내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심한 불황으로 많은 에이전트들이 업계를 떠났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비전으로 돌파구를 시도했다. 아침 7시면 오피스에 나왔고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나의 하루였다.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이미 일벌레가 돼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살길이고 갈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인 듯 나는 일에 매달렸다. 남들이 손대지 않는 숏 세일을 전문으로 처리해 한발 앞서 나갔다. 우리 사업이 점차 자리를 잡자 불황이 절정을 달리던, 불경기로 몸살을 앓던 1992년에 남편과 나는 우리 사업을 ‘ERA 부동산 프랜차이즈로 확장시켰다.

   또 나는 그 해에 오렌지카운티 서부 부동산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성공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다. 영어가 짧아 미국인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던 이방인인 내가 이제는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당당히 사업체를 일궈내고 그들의 리더로 선 것이다. 늘 나를 믿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돌보아주던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결연히 아버지에 맞서 딸을 공부 시키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비록 판사는 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성공시켰다며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무던히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1995년에는 미국 연방정부 모기지 회사의 하나인 페니메-FNMA (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 에이전트로 발탁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 뒤로 10년은 내가 부동산 에이전트로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이었다. 부동산 에이전트라면 누구나 한번쯤 페니메(FNMA) 회사의 공식 에이전트로 선정되기를 바랐다. 내가 알기론 한국인으로써, 아니 동양인으로서도 처음인 것 같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나보다 더 뛰어난 훌륭한 에이전트들도 들어가지 못한 자리이기에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고 승리가 있는 곳에 패배의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들을 한다. 부동산 브로커를 하려면 빈손으로 하라. 절대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브로커 이름으로 재산이 있으면 소송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미국만큼 변호사가 많은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소송의 천국이 바로 미국이다. 어느 에이전트가 실수를 해도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브로커가 지는 것이 미국의 부동산 법이다.

   그때 우리 회사가 소송을 당했을 때는 내가 브로커였다. ERA 프랜차이즈 컨벤숀에서 매년 상을 받고 또 지역 신문에도 해마다 톱 세일스 에이전트로 소개되는 둥 나는 꽤 알려진 에이전트였다. 우리가 실책 보험을 들었던 회사는 그때 파산 선고 중이었다. 십년 넘게 부어온 보험은 내가 필요할 때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민사 소송은 사 년 넘게 시간을 끌었다.

   숏 세일을 하던 집이었는데 은행은 손해가 더 적은 차압을 해 버렸다. 집 주인은 1차와 2차 융자, 라인 오브 크레딧 까지 동원해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다 빼 쓰고 빈 깡통인 집을 던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차압으로 끝난 것을 에이전트 탓으로 돌렸다. 들리는 소문으론 우리 오피스 가까이에 부동산 사무실을 갖고 있던 콜드웰 뱅커의 B 부동산브로커가 일부러 나를 찍고 그 집주인에게 자기네 고문 변호사를 붙여줬다고들 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브로커의 잘못이 아니었다.

   집을 잃었다고 훌쩍거리며 정신적인 피해를 들먹이는 주인을 보고 판사의 마음도 흔들렸는지 모른다. 그에게 한 푼의 손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재판은 집 주인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서는 어중간한 중간보다는 가진 것 없이 정부 돈을 축내는 약자가 더 법의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 동안의 변호사 비용과 집 주인에게 보상을 해 주느라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정신적으로 지치고 피폐해져 더 이상 사업을 하고픈 의욕을 잃었다. 남편과 상의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내가 깊은 실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또 다시 드들 강둑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여고생 시절로 돌아가 찬바람을 뚫고 돌아오는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주었다.

‘  엄마는 네가 성공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고 또 성공을 이뤘지 않느냐? 미국에서 일한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줬느냐! 때로는 그들의 친구처럼, 자매처럼, 가족처럼 그리고 생활의 상담자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너의 큰 성공이 아니라 네가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나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모처럼 오랫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으며 피해와 슬픔 그리고 난관 속에서 성공에 대한 콤플렉스가 엄청나게 심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나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똑똑한 사람이고 싶었고 큰 성공을 거둬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모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진정 원한 것은 나의 부나 성공, 명예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남편과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내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의 실패는 오히려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해할 충분한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배웠고 가정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신용으로 잘할 자신이 있다.

   아직도 많은 손님들이 나를 믿고 찾아준다. 내가 거둔 결실이 비록 대단치는 않아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에 비해 출발선에서 훨씬 늦게 시작한 나로서는 내 삶에 대한 긍지로 뿌듯해진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무엇보다 엄마를 소중하게 여기는 두 아들이 곁에 있다. 엄마가 일 때문에 제대로 돌봐 주지 못 했어도 두 아이 모두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하게 잘 커주었다. 남편과 오랜 상의를 한 끝에 나는 은퇴하기로 결정을 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많은 사람들의 이웃으로 그리고 친구로 나는 돌아왔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구시대의 완고함과 좌절된 꿈을 안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비록 그가 나를 많이 슬프게 했지만 나를 꺾어지지 않게 단련시키고 불굴의 강인함을 길러 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나를 소송해 곤경에 빠뜨린 사람도 용서해 주고 싶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올해는 어머니가 기다리던 드들 강변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강 언덕에서 딸을 기다리다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실 것이다. 드들 강 언덕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살을 에는 찬바람은 간데없고 따스한 봄바람이 내 발길에 함께 할 것이다. 물 따라 흘러가며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을 강둑에 남기며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다.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이마에 주름살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긴 미국에서 산 세월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본다. 허둥지둥 달려온 발자국 위에 수많은 상처가 얼룩져 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며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외국인과 결혼을 할 때부터 예상된 길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진 짐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살고 생을 마치겠는가, 그렇지는 못해도 내가 여기 살았음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다.

내게는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인생이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딸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차별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이 만든 테두리요 속박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것을 따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나의 출생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마음대로 세상에 데려온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결론적으로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가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딸, 자손의 대를 잇는 것도, 집안을 일으키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아닌 딸은 제아무리 똑똑해봤자 남의 집 좋은 일이나 시킨다는 것이 아버지의 딸자식에 대한 소신所信이었다.

나는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출생신고마저 되지 않았다. 구석에 버려진 헌 빗자루 같던 나는 남동생이 태어난 덕분에 두루 뭉실 호적에 올려 져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7곱살이 되자 아버지는 부리나케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으나 미적미적 학령學齡을 넘겨버린 나는 또 한 번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말았다. 나이 많은 나는 놔두고 남동생만 학교에 입학을 시키자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법이 있느냐고 악을 쓰며 대들었다. 그런 어머니의 애끓는 발악도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는 못 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멀뚱거리는 나를 끌어안고 눈이 빠지게 울었다. 많지도 않은 딸 하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모진 악담을 퍼부었지만 경제적 주도권이 없는 어머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내가 계집애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왜 내가 차별받아야하는지 몰랐지만 그것은 모두 내 잘못 같았다. 여자로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이 공평하지 못한 처사를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동생이 사촌과 함께 학교 간다고 동네 아이들과 쫄랑대며 나가면 나는 큰 길까지 따라 나가 아이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기 새끼를 품어주는데 아버지가 나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어딘가로 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천막학교로 데리고 가신 것 같았다. 열댓 명 되는 학생들이 초라한 텐트 아래 앉아들 있었다. 말이 학생이지 모두들 처녀 총각들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천막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은 내게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군말 없이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억울했다. 왜 늘 차별을 받아야하는지 어머니한테 그들의 대한 흉을 보고 불평을 해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은 다 괜찮단다.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타일렀다. 그나마 내가 참을성을 기른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타이름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내가 절대로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라고 공부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못을 박았다.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딸을 공부시켜 남들한테 존경받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사는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씀하셨다.

천막학교는 비가 오면 난장판이었다. 정신없이 돗자리를 걷어들고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고 눈이 오면 궁둥이가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다. 그 숨 막히는 더위와 모진 추위를 견디며 천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이 학교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잘은 몰랐지만 젊은 선생님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움의 길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막막한 페스탈로찌의 길을 젊음과 열정만으로 끌고 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천막 학교가 문을 닫자 가까스로 열렸던 내 배움의 샘터는 다시 말라붙었다. 나는 더 풀이 죽었고 우울한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갔다. 백방으로 알아본 어머니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한숨만 푹푹 쉬며 안절부절 하셨다.

그때 느닷없이 아버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 동네로 이사를 하고 동생은 전학을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동생이 전학 간 새 학교, 그 학교 안에 뜻밖에도 공민학교가 있었다. 공민학교는 나 같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뒤편의 허름한 목조건물이었지만 비가와도 돗자리를 걷을 필요가 없었고 눈이 와도 꽁꽁 얼어붙지 않았다. 책상까지 가지런히 갖춰진 교실은 꿈에도 그리던 학교였다. 어머니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내 손을 잡고 너는 하늘이 돕는 아이다. 이 학교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고 또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우리 반은 12살인 나를 선두로 19살까지의 처녀 총각들이었다. 동생과 함께 매일 학교를 가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니 오빠들은 나를 꼬마라 부르며 가끔 자기네들 연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지만 모두들 동생처럼 예뻐했다. 더구나 자상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담임선생님이 맘에 꼭 들었다. 인자한 아버지 같기도 하고 존경하는 오빠 같기도 해 선생님은 집에 있어도 삼삼하게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학교에 가곤 했다. 선생님도 사춘기를 타느라 삐딱한 언니오빠들보다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나를 훨씬 더 예뻐하셨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언니 오빠들과 공부하는 매일 매일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꽃동산이었다.

공민학교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지만 내 목표는 동생이 다니는 높다란 이층 벽돌 건물, 초등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공부만 잘하면 정식 초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특별히 신경을 쓰며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공민학교를 다닌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초등학교 편입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장을 써주셨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얼떨결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렀다. 하나님의 보살핌인지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천막학교와 공민학교를 합쳐 2년을 다닌 실력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너는 커서 판사가 되어라. 이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걸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며 수도꼭지처럼 철철 우셨다. 어머니가 어디서 여 판사의 소문을 듣고 딸이 판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고 싶어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집애가 한글을 깨우쳤으면 됐지 무슨 중학교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진학시험을 치렀다. 꿈도 꿀 수 없었던 중학교를 다행히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다.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하겠다는 딸을 아버지도 꿇어앉히지는 못했다.

굽이굽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주고 나는 그 힘으로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갔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일학년은 내 학창 시절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비록 후기였지만 아이들은 수석으로 입학한 나를 부러워했다. 어떤 애들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자부심에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행복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생의 애착이 뭉클 가슴을 채웠다. 그러나 내 인생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나의 존재의식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고등학교 이학년 초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드들 강을 왼쪽에 바라보는 작은 마을로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전기불이 없다는 것은, 달리는 차에 가스가 떨어진 것 같았다. 환영받지 못한 공부였기에 도시라고 학교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문화생활이었다. 책상조차 없는 방바닥에 엎드려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몸을 사른 등잔이 부스스 헝클어진 내 머리맡에 엎어져 있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드들 강을 가운데 두고 제방 둑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목포로 가는 신작로에서 드들 강다리를 건너기 전에 버스를 내려 둑을 타고 1.6 킬로미터쯤 내려오면 우리 마을 동네 입구가 보이고 그 길목에서 두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드들 강의 수문을 빠져나온 물이 집 앞 길을 따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굽이치는 물처럼 나를 향한 불행이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통학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흰 교복이었다. 하얀 교복에 필수적인 세탁소가 읍내에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 유일한 세탁소는 우리 마을에서 드들 강을 건너 1.6 킬로미터 쯤 가야 했는데 어쩌다 비가 와 강물이 불면 둑을 타고 올라가 다리를 건너서 3.2킬로미터 이상을 돌아야 했다. 아버지가 세탁 비를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세탁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시외버스 간이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면 쉬웠으련만! 새벽에 일어나 남평 역까지 4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가 기차통학을 해야 했다. 기차는 항상 콩나물시루처럼 붐볐다. 그 속에서 비비고 몸살을 치다 종착역에서 내리면 하얀 교복은 물에 빤 행주 같았다. 하교 때도 푹푹 찌는 열기로 열차 안은 폭발직전의 스팀 통이었다. 찐득거리는 땀과 고단한 삶에 지친 인생들이 뿜어내는 한숨으로 기차 안은 헉헉거리고 메스꺼웠다.

흰 교복은 땀에 절어 다음날 다시 입을 수 없었다. 두벌뿐인 교복을 주말에 깨끗이 손질했지만 그것으로 6일을 때울 수는 없었다. 매일 갈아 입어야하는 상의上衣는 정말 골칫거리였다. 땀에 푹 전 교복을 입고 생글거리는 친구들 앞에 서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어느 새 외톨이가 되어갔다. 일 년 전, 꿈에 부풀어 가슴을 쑥 내밀고 교정을 활개 치던 모습이 저만치 흘러간 옛일이 돼 버렸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린 어머니가 밤에 등잔불 아래서 어렵사리 교복을 빨아, 숯불 다리미로 대강 주름을 펴주곤 했는데 어쩌다 무딘 손이 미끄러져 까만 숯검정이 하얀 교복에 묻기라도 하면 나는 어머니한테 짜증을 있는 대로 부렸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보랏빛으로 뭉쳐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 군데군데 찍힌 그 상처의 흔적들,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몇 번이던가.

하향 열차가 서서히 남평 역에 들어서면 막혔던 하수구가 터지듯 쏟아져 내린 통학생들은 개미가 구멍을 찾아가듯 뿔뿔이 흩어져갔다. 나는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뜨겁게 달궈진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헤어진 운동화 뒤축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끼어들어 따끔거렸다. 두어 발짝마다 절름발이처럼 발을 흔들어 토돌토돌 구르는 돌멩이를 털어내곤 했다. 길게 늘어진 석양 빛 그림자 위로 축 늘어진 책가방이 못 빠진 간판처럼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드들 강 언덕의 겨울밤은 은빛 바다였다. 일찌감치 해를 삼킨 어둠이 거대한 장막을 치고 제 세상을 만난 칼바람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빨가벗은 나뭇가지들은 견디다 못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싹싹 빌었다. 그 은빛 바다위에 하얀 눈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나는 이 기막힌 현실이 모두 어머니 탓인 듯 심통스럽게 가방을 떠넘겼다. 어머니는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삼학년이 되자 나는 동생과 함께 자취하는 내 짝꿍의 룸메이트로 조인을 했다. 그녀들 방에 들어온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 내 몫의 방값을 치르지 못해 두 자매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특히 짝꿍의 동생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소리를 해댔다. 그들도 비용을 줄이러 나를 받아들인 것인 데 어머니가 시골에서 돈을 구하지 못해 계속 미루게 되었다. 준다준다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 주고 있으니 결국 핑계를 댄 꼴이 돼버렸다. 나도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내게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었고 설상가상 아는 사람을 만나도 차마 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기가 민망해 나는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 하늘에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 저 많은 별 중에 내 별은 어느 것일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눈에 띠었다. 별아, 별아 너는 나를 보고 있겠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내가 갈 곳이 있기나 한 거니. 밤 새 부뚜막에 앉아 별과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취직을 하든지 시집이라도 가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진즉에 미용기술이나 배우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더니 더 처량해진 꼴이 아니꼬와 그러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골에 쳐 박힌 내가 취직자리를 알아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생을 팽개치듯 아무한테나 시집을 갈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들일을 마치고 집 앞 물가에서 발을 씻다가 갑자기 쿵 하고 물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헤엄을 칠 줄 몰라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나가던 동네아저씨가 건져주었다. 아버지가 지나가다 손을 씻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자존심 센 아버지가 자신의 야망과 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들한테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그 화풀이를 내게 한 것이었다. 나도 희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인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그래서 아무한테나 시집도 갈 수 없는 내가 미워서 나를 건져준 아저씨를 원망하며 강둑에 퍼질러 앉아 울었다.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구름도 자기 갈 길을 알고 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떠나자. 바로 집에 돌아와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보따리를 쌌다. 울며 붙잡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철창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드들 강을 건넜다. 강 언덕에 망연히 주저앉아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건너편 둑 너머로 폴딱 사라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을까. 그 아픔을 삼키며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우리 모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불쌍한 어머니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나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작정 K시로 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학창 시절의 몇몇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차마 그들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 곤궁한 처지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동정하는 체 하지만 그것은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동정의 눈길이 싫었다. 내가 원해서 온 인생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죽어버리면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딸이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불효막심하다고 하실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한테 맺힌 한을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킬리만자로의 산정 높이 올라가 우뚝 서는 표범이 되고 싶은 끈질긴 욕망이었다. 나를 위해 서고 나를 위해서 죽어야 진정 아버지한테 복수를 하는 길 같았다.

당분간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친구보다는 내 치부를 보여도 자존심 상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했다,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오빠 친구의 애인을 찾아가 며칠 의탁을 부탁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고등학교 시절 남달리 나를 아껴주던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했다. 선생님한테 내 절박한 사정을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었지만 영어선생님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재학시절 영어를 꽤 잘 했던 나를 선생님은 각별히 아껴주셨다. 선생님 소개로 며칠 후 그 곳의 큰 방직회사 사장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우선 숙식이 해결돼 살 것 같았다.

그 집에 입주한 몇 개월 후 나는 사장님께 염치 불구하고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취직을 부탁했다. 다행히 사장님의 배려로 방직 회사경비실에서 낮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서서히 대학입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재학시절 그토록 열망하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 묻혔을 때의 좌절감이 뭉클 밀려와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다음해 봄 나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자그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삼년 반이 지난 뒤였다. 눈물로 건넜던 드들 강을 함박웃음을 안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어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해댔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생각같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늘 시간에 쫓기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고 대학 미팅에 한 번 참석할 기회조차 없었다. 생활비, 학비, 기타 잡비 등을 벌기 위해 무리한 과외를 해 몸은 더 말라갔고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느 날 마당에서 누군가가 계세요 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무심히 방문을 열었다. 어떤 중년 남자가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 결국 잡았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며 그 남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 XX 방직 공장 옆 사넬 양장점 주인 정 사장이요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망치로 때려 맞은 듯 내려앉았다. “, , 안녕하세요.” 나는 그 남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전에 방직 공장에서 낮 근무를 할 때 사넬 양장점에서 두벌의 옷을 월부로 맞춰 입었다. 나 뿐 아니라 방직 공장의 많은 여공들이 그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월부로 갚아나가곤 했다. 한 벌 값은 다 갚았으나 두 번 째 옷의 잔금이 조금 남아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방을 얻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저축했던 돈은 다 써버리고 그나마 과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매달 생활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자연히 월부금 옷값이 밀리게 되었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고 침침한 내 자취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 이렇게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어디서 해 먹던 못된 짓이야?” 그는 대뜸 나를 남의 돈이나 떼어먹는 불량자로 몰아붙였다. “숨으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나는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언제 갚겠다는 거야?” 내 몰골이 불쌍했는지 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형편 되는대로 조금씩 갚을 깨요.” 나는 죄송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또 손을 비볐다. “내가 꼭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은 아니야. 자네 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도움이 돼 줄 수도 있어. 알겠나?”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기겁을 해 그를 밀치자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고 점점 압박을 해왔다. 나는 밑에서 빠져 나오려 몸살을 치다 그의 어깨를 꽉 물어뜯었다. 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망할 년, 감히 나를 물어.” 그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엉엉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당장 자기 돈을 갚으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대문을 꽝 닫고 가버렸다.

나쁜 놈, 나 뿐 아니라 다른 공장 아가씨들한테도 틀림없이 저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 것이다. 많은 공장 아가씨들이 유린당했을 지도 몰랐다. 이런 수치스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할 수 없듯 그들도 그랬을지 몰랐다. 언제 또 그 늑대 같은 정 사장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이란 것을 알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졸라 빚을 얻어 나머지 옷값을 갚았지만 그 수치스런 사실은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대학 이학년 봄 학기였다. 심한 과로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나는 학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대학 병원으로 옮겨져 급성 맹장이란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비가 없었다. 가뭄에 기다리던 비처럼 목마르게 원하던 성공은 고사하고 병든 몸으로 아버지 앞에 설판이었다. 그 고난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버지는 애초부터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내가 아프다한들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기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어머니만 가슴을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설사 수술비가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이제는 내 목숨이 아닌 차라리 운명에 맡기든가 아니면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구원의 밧줄이 엉뚱한 곳에서 내려왔다. 그 대학병원의 외과과장님이 내 딱한 사정을 의대생 제자들한테서 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하셨다. 그때 의대생 반장 석현 씨와 내 친구 수현이는 열애 중이었다. 그 징검다리를 놔 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제자들은 내 사정을 교수님께 얘기했고 제자들을 남달리 사랑하시는 과장님은 제자들의 친구를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는 과장님의 부인이 운영하는 개인 병원으로 옮겨져 의대생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난 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또 한 참을 우셨다. 어머니가 원장님께 최소한의 약값만을 지불하는 인사를 차렸다.

어쩌면 사경을 헤매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과장님 부부의 지극한 히포크라테스 의사 정신이 아니었다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또 나를 위한 의대생 친구들의 한결 같은 우정과 내 친구 수현이의 남다른 보살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죄 없는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나는 얼마나 염치가 없었는지, 그런데도 나는 그 긴 세월동안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며 편리한 존재인지, 필요할 때 찾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망각해버린다.

육체적인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고 약을 먹으면 된다. 그 힘든 상황 속에 내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또 나를 덮쳤다. 누군가 사랑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잔인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 내게 사랑 같은 것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절망 속에 헤매고 있을 때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 내가 성공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함께하자던 그가 내 곁을 떠나갔다. 어차피 그때 사랑은 내게 사치였지만 내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에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어차피 과외를 할 바엔 서울이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 얼마나 외로운 벌판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라고 해야 낡은 가방하나였지만 마음은 꽁꽁 묶인 쇠사슬보다 더 무거웠다. 지금은 K대학으로 합병된 W대학에 편입을 했다. 벼랑에 서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갈 곳이 없어 어릴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친척 집을 찾아갔다. 눈치 없게 몸을 의탁하고 그 일대를 샅샅이 뒤져 꽤 큰 제과점에서 밤일을 시작했다. 빵집 주인아저씨의 느끼한 눈길이 가녀린 내 목덜미에 꽂혔지만 모른 채 일에만 열중했다.

주인아줌마가 잠깐 가게를 비운 어느 날이었다. 제과점 뒤쪽에 있는 골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나를 누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더듬었다. 주인 아저씨였다. 화들짝 놀라 들입다 그를 밀치고 빵집을 뛰쳐나왔다. 성난 주인아저씨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쯤 도망을 쳤는지 길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옛날 짝꿍의 자취방 부엌에서 보았던 별 무리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둘, 별 셋 나 셋을 세다 말고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천천히 눈물을 닦고 집으로 왔다.

잠시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학계를 제출하려 교수님을 찾아갔다. 대강 내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며칠 후 그 분의 소개로 쾌 큰 의류 생산 공장에 취직을 했다. 밤일하는 여공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빵집보다 분위기도 좋고 여공들도 나를 언니처럼 좋아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그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하루는 이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직원이 한남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센터를 같이 가자고 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회화를 배우기 위해 이 곳에 나가고 있었다. 선교사는 미국 목사님이었다. 용산에 있는 미 8군이 코앞이라 많은 미국 군인들, 미국 주재원들이 드나들었다. 얼마 후 그는 내게 자기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프러포즈였는지 단순한 동료로 유학을 같이 가자는 애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고인 깊은 상처 때문에 나는 누구와 가까워질 수가 없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얼마 후 혼자 유학을 떠났다.

지금의 남편은 선교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센터의 목사인 동생을 방문 중이었다. 하루는 그가 내게 서울시내 관광 안내를 부탁했다. 나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그 부탁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관광을 마친 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내게 그는 원더풀 투어를 연발하며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처로 얼룩진 내 가슴에 파란 눈의 그를 만나면서 차츰 호수 같은 푸른 하늘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닌 그가 점점 내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관광을 나왔던 그가 미국에 돌아가 제대를 하고 미 8군에 직장을 잡아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자연히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 옥빛 같은 파란 싹이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고생도 견뎌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또 내게 상처만 안겨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이 무성하게 잎을 피웠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사실 남편을 노총각이라고 소개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중년의 이혼남이었다. 대학까지 공부한 것이 양코백이와 결혼을 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내 결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옛날의 물러빠진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내 편이어서 우리는 구청에 가서 박음질 하듯 우리의 결혼을 호적에 올려버렸다.

내가 미국에 갈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연탄을 갈다 뇌진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해버렸다. 내가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꼭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생전 처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대들었다. -왜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 ? 내 뺨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분에 못 이긴 아버지가 내 뺨을 연거푸 후려친 것이다. 서러워 엎어진 나를 옆에 있던 친척들이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뒤뜰로 뛰쳐나갔다. 흰 눈 속에 덮인 텃밭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수도 펌프로 힘차게 물을 틀고 계셨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발등을 간질이며 철철 쏟아졌다. 나는 노상 헤헤헤 웃으며 시멘트 바닥에 발을 뽀드득뽀드득 비벼대었다. 어머니가 쪽박으로 물을 가득 떠서 내 발등에 쭈르륵 끼얹으며 발등을 씻겨주었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가 시원하게 품어주던 펌프였다.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수도 펌프를 만지자 묵직한 손잡이는 꽁꽁 얼어붙은 채 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는 강둑으로 올라갔다. 그때 고등학교시절 어머니가 늘 나를 기다리던 언덕에 서서 은빛으로 흐느적거리는 드들 강을 내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쫙 깔려있었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가만히 내게 속삭였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찬바람에 찢긴 나무 가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지 바르르 몸을 떨며 내게 안겨왔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하와이서 삼년을 살며 두 째 아이를 낳았다. 지상의 낙원이란 하와이였지만 남편의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로 또 이사를 했다. 남편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 나도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시험이라 부담이 컸지만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남편보다 몇 배의 공부를 해 운 좋게 단 번에 합격을 했다. 엘에이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남편의 막내 동생이 사는 레드랜드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같이 미국인 회사에서 부동산 일을 시작했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수입을 보장할 수 없어 나는 남편이 샐러리맨으로 취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취직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 싫은 소리를 하고 그것은 자주 부부 싸움이 되곤 했다. 어느 날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나는 남편의 입사入社 소식인 줄 알고 얼른 봉투를 뜯었다. 그것은 남편의 이력이 너무 넘쳐서(over qualify) 부득이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는 편지였다. 나는 비로소 남편이 왜 적성에 맞지 않는 부동산 에이전트를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잉여 인력으로 내 몰리고 있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옮겨도 영어가 문제였다. 더구나 미국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동산 사업에서 영어가 딸리는 것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소통을 못하고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영어를 마스터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내 길을 개척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고 한국말로 두어 줄 써서 우리 회사 부동산 광고란에 끼워 넣었다.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서비스 합니다.’ 그러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집을 팔겠다는 분이 전화를 했는데 나처럼 국제결혼을 한 분이었다. 내 첫 손님이자 첫 리스 팅, 그리고 나를 부동산 에이전트로 키운 시조가 되신 분, 바로 미시즈 핸슨이었다. 그 분이 영어를 못해서 나를 찾은 게 아니라 그리움을 나누고 싶어서라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느꼈다. 그 분한테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을 내 놓은 지 3일 만에 팔려 미국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에이전트로 돈을 벌었다. 언젠가 미시즈 헨슨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매일 그런 행운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인 내가 보수적인 백인들을 상대로 백인 에이전트와 경쟁을 하면 나는 늘 패자가 되곤 했다. 고정관념과 지속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영어가 서툴러 소통의 통로가 막히는 나를 선택할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깊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들가지라도 붙잡고 헤엄쳐 나와야 했다. 딸이라고 무시한 우리 아버지의 차별을 이겨내듯,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당신들을 이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잡고 매달린 동아줄이었다.

나는 한 지역을 골라서 꾸준한 일대일의 마케팅 전략을 폈다. 우선 그들과 마음을 나누기위해 자주 그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아 서비스를 했다. 서툰 영어지만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전문지식을 넓히고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다.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배운 것을 부지런히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손님들을 만나고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을 기록해 공부를 했다. 그런 세월이 일 년을 넘어서자 드디어 나를 찾는 손님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몇 개의 리스팅(Listing)을 확보하면서 영어 문제도 조금씩 풀리고 자신감도 붙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백인 에이전트보다 더 잘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것은 나를 무시한 아버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당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딸이 저 높은 곳에 세우려는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었다. 어느덧 그것은 내가 성공해야 되는 이유요 목적이 돼 있었다. 일단 내게 일이 맡겨지면 손님들의 만족을 끌어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성공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질주하다 보면 두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비례했다. 어린 두 아들에게 엄마로서 제대로 살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체증처럼 가슴에 걸렸다. 마땅히 애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 둘을 다 프리스쿨에 보냈다. 작은 애는 두 살, 큰 애는 세 살이 조금 넘어 겨우 기저귀를 뗐을 때였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프리스쿨에 가기 싫다고 내 바지 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2시간 후에 엄마가 데리러 갈게가까스로 아이들을 달랬다. ‘2시간 후에 꼭 데리러 와야 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시베리아 벌판에 끌려가는 죄수마냥 선생님 손에 끌러 교실로 들어가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바이 바이를 하는 우리 아이들, 두 아이를 보며 내 가슴은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결혼 전에 내가 그리던 핑크 빛 꿈은 아득히 먼 곳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손님을 만나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어 나는 숨도 돌리지 못하고 학교로 뛰어갔다. 아이들은 두 시간이 왜 이렇게 기냐고 울먹거렸다. 그때마다 내 눈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어린 아이들 생각에도 하루가 걸리는 엄마의 2시간은 무진장 길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은 빅토빌에 손님을 만나러 갔다가 일을 마친 뒤 좀 더 빨리 오려고 빅 베어 레익(Lake)이 있는 지름길인 산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산속의 겨울을 알지 못했다. 어둠이 쏜살같이 달려와 진눈깨비 눈을 뿌리며 앞을 막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어둠 속에 꽃처럼 날리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더구나 차의 가스까지 바닥을 쳐 잘못하다간 산 속에 갇힐 판이었다. 주유소를 찾아 겨우 가스를 넣고, 시동생에게 애들 픽업을 부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얼굴은 온통 눈물 반죽이 돼 있었다.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시동생 집에서 아이들을 찾아 집으로 오며 나는 나무꾼의 선녀처럼 두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이럴 때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의 오픈 하우스에도 애들을 데리고 다녔다. 내성적인 남편은 부동산 에이전트란 직업이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손님들을 만나고 남편은 대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내가 손님들을 만나고 부동산 일을 할 때 남편은 애들을 챙기고 광고 편지를 써주고 팔려는 집에 세일 사인을 붙이고 떼고 록 박스(Lockbox)를 거는 등 허다한 뒤치다꺼리를 싫다는 말없이 도와주었다. 남편의 헌신적인 도움과 맨발로 뛴 나의 노력으로 나는 점점 세일즈 우먼으로 두각을 나타내 몇 년 후에는 우리 사무실의 톱 세일즈 에이전트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유난히 스모그가 많이 끼는 랜드랜드에서 나는 심한 알레르기 증상으로 고생을 했다. 눈병이 생겨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7년을 일하다보니 손님도 자리가 잡혔고 친한 사람들도 생겨 정든 곳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1985년에 우리는 큰맘 먹고 오렌지카운티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무지나 다름없던 레드랜드에서 쌓아 올린 그 체험이 있기에 결코 두렵지 않았다.

건강 때문에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그 곳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곳은 내가 미국인으로 자리를 잡도록 주춧돌을 깔아준 곳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운명 같은 인연을 확인시켜준 곳이기도 했다. 내가 레드랜드에 사는 동안 서로 자매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연수때문이었다. 연수는 사넬 양장점의 주인 정 사장의 딸이었다. 우연히 둘이 고국 얘기를 나누다 연수가 그 분의 딸이란 것을 알고 나는 자지러질 듯 놀랐다. 연수는 정 사장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의 장로로 좋은 아버지로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나는 연수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명암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밤에 틈틈이 컴무니티 칼리지에서 수료한 어카운팅(Accounting), 에스크로

(Escrow), 그리고 부동산 감정(Appraisal) 코스도 우리가 새로 자리를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오렌지카운티로 와서 주로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부동산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레드랜드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닦은 체험이 아닌가싶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늘 공부하며 전진하는 강한 나의 도전 정신도 나를 세운 주춧돌의 하나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위틈에 난 소나무가 더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듯, 끊임없는 나의 도전 정신,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미워하며 쌓아올린 탑, 바로 그것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불어 닥친 미국의 대불황은 어찌 보면 내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심한 불황으로 많은 에이전트들이 업계를 떠났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비전으로 돌파구를 시도했다. 아침 7시면 오피스에 나왔고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나의 하루였다.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이미 일벌레가 돼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살길이고 갈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인 듯 나는 일에 매달렸다. 남들이 손대지 않는 숏 세일을 전문으로 처리해 한발 앞서 나갔다. 우리 사업이 점차 자리를 잡자 불황이 절정을 달리던, 불경기로 몸살을 앓던 1992년에 남편과 나는 우리 사업을 ‘ERA 부동산 프랜차이즈로 확장시켰다.

또 나는 그 해에 오렌지카운티 서부 부동산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성공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다. 영어가 짧아 미국인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던 이방인인 내가 이제는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당당히 사업체를 일궈내고 그들의 리더로 선 것이다.

늘 나를 믿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돌보아주던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결연히 아버지에 맞서 딸을 공부 시키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비록 판사는 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성공시켰다며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무던히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1995년에는 미국 연방정부 모기지 회사의 하나인 페니메-FNMA (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 에이전트로 발탁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 뒤로 10년은 내가 부동산 에이전트로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이었다. 부동산 에이전트라면 누구나 한번쯤 페니메(FNMA) 회사의 공식 에이전트로 선정되기를 바랐다. 내가 알기론 한국인으로써, 아니 동양인으로서도 처음인 것 같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나보다 더 뛰어난 훌륭한 에이전트들도 들어가지 못한 자리이기에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고 승리가 있는 곳에 패배의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들을 한다. 부동산 브로커를 하려면 빈손으로 하라. 절대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브로커 이름으로 재산이 있으면 소송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미국만큼 변호사가 많은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소송의 천국이 바로 미국이다. 어느 에이전트가 실수를 해도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브로커가 지는 것이 미국의 부동산 법이다.

그때 우리 회사가 소송을 당했을 때는 내가 브로커였다. ERA 프랜차이즈 컨벤숀에서 매년 상을 받고 또 지역 신문에도 해마다 톱 세일스 에이전트로 소개되는 둥 나는 꽤 알려진 에이전트였다. 우리가 실책 보험을 들었던 회사는 그때 파산 선고 중이었다. 십년 넘게 부어온 보험은 내가 필요할 때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민사 소송은 사 년 넘게 시간을 끌었다.

숏 세일을 하던 집이었는데 은행은 손해가 더 적은 차압을 해 버렸다. 집 주인은 1차와 2차 융자, 라인 오브 크레딧 까지 동원해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다 빼 쓰고 빈 깡통인 집을 던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차압으로 끝난 것을 에이전트 탓으로 돌렸다. 들리는 소문으론 우리 오피스 가까이에 부동산 사무실을 갖고 있던 콜드웰 뱅커의 B 부동산브로커가 일부러 나를 찍고 그 집주인에게 자기네 고문 변호사를 붙여줬다고들 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브로커의 잘못이 아니었다.

집을 잃었다고 훌쩍거리며 정신적인 피해를 들먹이는 주인을 보고 판사의 마음도 흔들렸는지 모른다. 그에게 한 푼의 손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재판은 집 주인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서는 어중간한 중간보다는 가진 것 없이 정부 돈을 축내는 약자가 더 법의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 동안의 변호사 비용과 집 주인에게 보상을 해 주느라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정신적으로 지치고 피폐해져 더 이상 사업을 하고픈 의욕을 잃었다. 남편과 상의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내가 깊은 실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또 다시 드들 강둑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여고생 시절로 돌아가 찬바람을 뚫고 돌아오는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주었다.

엄마는 네가 성공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고 또 성공을 이뤘지 않느냐? 미국에서 일한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줬느냐! 때로는 그들의 친구처럼, 자매처럼, 가족처럼 그리고 생활의 상담자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너의 큰 성공이 아니라 네가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나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모처럼 오랫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으며 피해와 슬픔 그리고 난관 속에서 성공에 대한 콤플렉스가 엄청나게 심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나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똑똑한 사람이고 싶었고 큰 성공을 거둬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모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진정 원한 것은 나의 부나 성공, 명예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남편과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내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의 실패는 오히려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해할 충분한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배웠고 가정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신용으로 잘할 자신이 있다.

아직도 많은 손님들이 나를 믿고 찾아준다. 내가 거둔 결실이 비록 대단치는 않아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에 비해 출발선에서 훨씬 늦게 시작한 나로서는 내 삶에 대한 긍지로 뿌듯해진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무엇보다 엄마를 소중하게 여기는 두 아들이 곁에 있다. 엄마가 일 때문에 제대로 돌봐 주지 못 했어도 두 아이 모두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하게 잘 커주었다. 남편과 오랜 상의를 한 끝에 나는 은퇴하기로 결정을 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많은 사람들의 이웃으로 그리고 친구로 나는 돌아왔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구시대의 완고함과 좌절된 꿈을 안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비록 그가 나를 많이 슬프게 했지만 나를 꺾어지지 않게 단련시키고 불굴의 강인함을 길러 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나를 소송해 곤경에 빠뜨린 사람도 용서해 주고 싶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올해는 어머니가 기다리던 드들 강변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강 언덕에서 딸을 기다리다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실 것이다. 드들 강 언덕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살을 에는 찬바람은 간데없고 따스한 봄바람이 내 발길에 함께 할 것이다. 물 따라 흘러가며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을 강둑에 남기며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다.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이마에 주름살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긴 미국에서 산 세월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본다. 허둥지둥 달려온 발자국 위에 수많은 상처가 얼룩져 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며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외국인과 결혼을 할 때부터 예상된 길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진 짐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살고 생을 마치겠는가, 그렇지는 못해도 내가 여기 살았음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다.

내게는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인생이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딸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차별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이 만든 테두리요 속박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것을 따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나의 출생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마음대로 세상에 데려온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결론적으로 내 책임이 되고 말았다. 가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딸, 자손의 대를 잇는 것도, 집안을 일으키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아닌 딸은 제아무리 똑똑해봤자 남의 집 좋은 일이나 시킨다는 것이 아버지의 딸자식에 대한 소신所信이었다.

나는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출생신고마저 되지 않았다. 구석에 버려진 헌 빗자루 같던 나는 남동생이 태어난 덕분에 두루 뭉실 호적에 올려 져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7곱살이 되자 아버지는 부리나케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으나 미적미적 학령學齡을 넘겨버린 나는 또 한 번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말았다. 나이 많은 나는 놔두고 남동생만 학교에 입학을 시키자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법이 있느냐고 악을 쓰며 대들었다. 그런 어머니의 애끓는 발악도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는 못 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멀뚱거리는 나를 끌어안고 눈이 빠지게 울었다. 많지도 않은 딸 하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모진 악담을 퍼부었지만 경제적 주도권이 없는 어머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내가 계집애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왜 내가 차별받아야하는지 몰랐지만 그것은 모두 내 잘못 같았다. 여자로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이 공평하지 못한 처사를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동생이 사촌과 함께 학교 간다고 동네 아이들과 쫄랑대며 나가면 나는 큰 길까지 따라 나가 아이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기 새끼를 품어주는데 아버지가 나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어딘가로 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천막학교로 데리고 가신 것 같았다. 열댓 명 되는 학생들이 초라한 텐트 아래 앉아들 있었다. 말이 학생이지 모두들 처녀 총각들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천막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은 내게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군말 없이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억울했다. 왜 늘 차별을 받아야하는지 어머니한테 그들의 대한 흉을 보고 불평을 해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은 다 괜찮단다.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타일렀다. 그나마 내가 참을성을 기른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타이름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내가 절대로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라고 공부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못을 박았다.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딸을 공부시켜 남들한테 존경받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사는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씀하셨다.

천막학교는 비가 오면 난장판이었다. 정신없이 돗자리를 걷어들고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고 눈이 오면 궁둥이가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다. 그 숨 막히는 더위와 모진 추위를 견디며 천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이 학교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잘은 몰랐지만 젊은 선생님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움의 길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막막한 페스탈로찌의 길을 젊음과 열정만으로 끌고 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천막 학교가 문을 닫자 가까스로 열렸던 내 배움의 샘터는 다시 말라붙었다. 나는 더 풀이 죽었고 우울한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갔다. 백방으로 알아본 어머니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한숨만 푹푹 쉬며 안절부절 하셨다.

그때 느닷없이 아버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 동네로 이사를 하고 동생은 전학을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동생이 전학 간 새 학교, 그 학교 안에 뜻밖에도 공민학교가 있었다. 공민학교는 나 같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뒤편의 허름한 목조건물이었지만 비가와도 돗자리를 걷을 필요가 없었고 눈이 와도 꽁꽁 얼어붙지 않았다. 책상까지 가지런히 갖춰진 교실은 꿈에도 그리던 학교였다. 어머니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내 손을 잡고 너는 하늘이 돕는 아이다. 이 학교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고 또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우리 반은 12살인 나를 선두로 19살까지의 처녀 총각들이었다. 동생과 함께 매일 학교를 가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니 오빠들은 나를 꼬마라 부르며 가끔 자기네들 연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지만 모두들 동생처럼 예뻐했다. 더구나 자상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담임선생님이 맘에 꼭 들었다. 인자한 아버지 같기도 하고 존경하는 오빠 같기도 해 선생님은 집에 있어도 삼삼하게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학교에 가곤 했다. 선생님도 사춘기를 타느라 삐딱한 언니오빠들보다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나를 훨씬 더 예뻐하셨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언니 오빠들과 공부하는 매일 매일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꽃동산이었다.

공민학교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지만 내 목표는 동생이 다니는 높다란 이층 벽돌 건물, 초등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공부만 잘하면 정식 초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특별히 신경을 쓰며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공민학교를 다닌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초등학교 편입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장을 써주셨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얼떨결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렀다. 하나님의 보살핌인지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천막학교와 공민학교를 합쳐 2년을 다닌 실력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너는 커서 판사가 되어라. 이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걸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며 수도꼭지처럼 철철 우셨다. 어머니가 어디서 여 판사의 소문을 듣고 딸이 판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고 싶어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집애가 한글을 깨우쳤으면 됐지 무슨 중학교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진학시험을 치렀다. 꿈도 꿀 수 없었던 중학교를 다행히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다.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하겠다는 딸을 아버지도 꿇어앉히지는 못했다.

굽이굽이 힘든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주고 나는 그 힘으로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갔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일학년은 내 학창 시절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비록 후기였지만 아이들은 수석으로 입학한 나를 부러워했다. 어떤 애들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자부심에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행복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생의 애착이 뭉클 가슴을 채웠다. 그러나 내 인생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나의 존재의식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고등학교 이학년 초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드들 강을 왼쪽에 바라보는 작은 마을로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전기불이 없다는 것은, 달리는 차에 가스가 떨어진 것 같았다. 환영받지 못한 공부였기에 도시라고 학교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문화생활이었다. 책상조차 없는 방바닥에 엎드려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몸을 사른 등잔이 부스스 헝클어진 내 머리맡에 엎어져 있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드들 강을 가운데 두고 제방 둑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목포로 가는 신작로에서 드들 강다리를 건너기 전에 버스를 내려 둑을 타고 1.6 킬로미터쯤 내려오면 우리 마을 동네 입구가 보이고 그 길목에서 두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드들 강의 수문을 빠져나온 물이 집 앞 길을 따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굽이치는 물처럼 나를 향한 불행이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통학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흰 교복이었다. 하얀 교복에 필수적인 세탁소가 읍내에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 유일한 세탁소는 우리 마을에서 드들 강을 건너 1.6 킬로미터 쯤 가야 했는데 어쩌다 비가 와 강물이 불면 둑을 타고 올라가 다리를 건너서 3.2킬로미터 이상을 돌아야 했다. 아버지가 세탁 비를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세탁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시외버스 간이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면 쉬웠으련만! 새벽에 일어나 남평 역까지 4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가 기차통학을 해야 했다. 기차는 항상 콩나물시루처럼 붐볐다. 그 속에서 비비고 몸살을 치다 종착역에서 내리면 하얀 교복은 물에 빤 행주 같았다. 하교 때도 푹푹 찌는 열기로 열차 안은 폭발직전의 스팀 통이었다. 찐득거리는 땀과 고단한 삶에 지친 인생들이 뿜어내는 한숨으로 기차 안은 헉헉거리고 메스꺼웠다.

흰 교복은 땀에 절어 다음날 다시 입을 수 없었다. 두벌뿐인 교복을 주말에 깨끗이 손질했지만 그것으로 6일을 때울 수는 없었다. 매일 갈아 입어야하는 상의上衣는 정말 골칫거리였다. 땀에 푹 전 교복을 입고 생글거리는 친구들 앞에 서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어느 새 외톨이가 되어갔다. 일 년 전, 꿈에 부풀어 가슴을 쑥 내밀고 교정을 활개 치던 모습이 저만치 흘러간 옛일이 돼 버렸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린 어머니가 밤에 등잔불 아래서 어렵사리 교복을 빨아, 숯불 다리미로 대강 주름을 펴주곤 했는데 어쩌다 무딘 손이 미끄러져 까만 숯검정이 하얀 교복에 묻기라도 하면 나는 어머니한테 짜증을 있는 대로 부렸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보랏빛으로 뭉쳐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 군데군데 찍힌 그 상처의 흔적들,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몇 번이던가.

하향 열차가 서서히 남평 역에 들어서면 막혔던 하수구가 터지듯 쏟아져 내린 통학생들은 개미가 구멍을 찾아가듯 뿔뿔이 흩어져갔다. 나는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뜨겁게 달궈진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헤어진 운동화 뒤축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끼어들어 따끔거렸다. 두어 발짝마다 절름발이처럼 발을 흔들어 토돌토돌 구르는 돌멩이를 털어내곤 했다. 길게 늘어진 석양 빛 그림자 위로 축 늘어진 책가방이 못 빠진 간판처럼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드들 강 언덕의 겨울밤은 은빛 바다였다. 일찌감치 해를 삼킨 어둠이 거대한 장막을 치고 제 세상을 만난 칼바람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빨가벗은 나뭇가지들은 견디다 못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싹싹 빌었다. 그 은빛 바다위에 하얀 눈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나는 이 기막힌 현실이 모두 어머니 탓인 듯 심통스럽게 가방을 떠넘겼다. 어머니는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삼학년이 되자 나는 동생과 함께 자취하는 내 짝꿍의 룸메이트로 조인을 했다. 그녀들 방에 들어온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 내 몫의 방값을 치르지 못해 두 자매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특히 짝꿍의 동생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소리를 해댔다. 그들도 비용을 줄이러 나를 받아들인 것인 데 어머니가 시골에서 돈을 구하지 못해 계속 미루게 되었다. 준다준다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 주고 있으니 결국 핑계를 댄 꼴이 돼버렸다. 나도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내게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었고 설상가상 아는 사람을 만나도 차마 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기가 민망해 나는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 하늘에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 저 많은 별 중에 내 별은 어느 것일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눈에 띠었다. 별아, 별아 너는 나를 보고 있겠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내가 갈 곳이 있기나 한 거니. 밤 새 부뚜막에 앉아 별과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취직을 하든지 시집이라도 가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진즉에 미용기술이나 배우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더니 더 처량해진 꼴이 아니꼬와 그러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골에 쳐 박힌 내가 취직자리를 알아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생을 팽개치듯 아무한테나 시집을 갈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들일을 마치고 집 앞 물가에서 발을 씻다가 갑자기 쿵 하고 물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헤엄을 칠 줄 몰라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나가던 동네아저씨가 건져주었다. 아버지가 지나가다 손을 씻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자존심 센 아버지가 자신의 야망과 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들한테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그 화풀이를 내게 한 것이었다. 나도 희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인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그래서 아무한테나 시집도 갈 수 없는 내가 미워서 나를 건져준 아저씨를 원망하며 강둑에 퍼질러 앉아 울었다.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구름도 자기 갈 길을 알고 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떠나자. 바로 집에 돌아와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보따리를 쌌다. 울며 붙잡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철창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드들 강을 건넜다. 강 언덕에 망연히 주저앉아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건너편 둑 너머로 폴딱 사라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을까. 그 아픔을 삼키며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우리 모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불쌍한 어머니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나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작정 K시로 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학창 시절의 몇몇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차마 그들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 곤궁한 처지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동정하는 체 하지만 그것은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동정의 눈길이 싫었다. 내가 원해서 온 인생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죽어버리면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딸이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불효막심하다고 하실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한테 맺힌 한을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킬리만자로의 산정 높이 올라가 우뚝 서는 표범이 되고 싶은 끈질긴 욕망이었다. 나를 위해 서고 나를 위해서 죽어야 진정 아버지한테 복수를 하는 길 같았다.

당분간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친구보다는 내 치부를 보여도 자존심 상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했다,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오빠 친구의 애인을 찾아가 며칠 의탁을 부탁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고등학교 시절 남달리 나를 아껴주던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했다. 선생님한테 내 절박한 사정을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었지만 영어선생님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재학시절 영어를 꽤 잘 했던 나를 선생님은 각별히 아껴주셨다. 선생님 소개로 며칠 후 그 곳의 큰 방직회사 사장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우선 숙식이 해결돼 살 것 같았다.

그 집에 입주한 몇 개월 후 나는 사장님께 염치 불구하고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취직을 부탁했다. 다행히 사장님의 배려로 방직 회사경비실에서 낮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서서히 대학입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재학시절 그토록 열망하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 묻혔을 때의 좌절감이 뭉클 밀려와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다음해 봄 나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자그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삼년 반이 지난 뒤였다. 눈물로 건넜던 드들 강을 함박웃음을 안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어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해댔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생각같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늘 시간에 쫓기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고 대학 미팅에 한 번 참석할 기회조차 없었다. 생활비, 학비, 기타 잡비 등을 벌기 위해 무리한 과외를 해 몸은 더 말라갔고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느 날 마당에서 누군가가 계세요 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무심히 방문을 열었다. 어떤 중년 남자가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 결국 잡았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며 그 남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 XX 방직 공장 옆 사넬 양장점 주인 정 사장이요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망치로 때려 맞은 듯 내려앉았다. “, , 안녕하세요.” 나는 그 남자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전에 방직 공장에서 낮 근무를 할 때 사넬 양장점에서 두벌의 옷을 월부로 맞춰 입었다. 나 뿐 아니라 방직 공장의 많은 여공들이 그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월부로 갚아나가곤 했다. 한 벌 값은 다 갚았으나 두 번 째 옷의 잔금이 조금 남아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방을 얻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저축했던 돈은 다 써버리고 그나마 과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매달 생활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자연히 월부금 옷값이 밀리게 되었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고 침침한 내 자취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 이렇게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어디서 해 먹던 못된 짓이야?” 그는 대뜸 나를 남의 돈이나 떼어먹는 불량자로 몰아붙였다. “숨으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나는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언제 갚겠다는 거야?” 내 몰골이 불쌍했는지 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형편 되는대로 조금씩 갚을 깨요.” 나는 죄송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또 손을 비볐다. “내가 꼭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은 아니야. 자네 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도움이 돼 줄 수도 있어. 알겠나?”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기겁을 해 그를 밀치자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고 점점 압박을 해왔다. 나는 밑에서 빠져 나오려 몸살을 치다 그의 어깨를 꽉 물어뜯었다. 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망할 년, 감히 나를 물어.” 그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엉엉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당장 자기 돈을 갚으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대문을 꽝 닫고 가버렸다.

나쁜 놈, 나 뿐 아니라 다른 공장 아가씨들한테도 틀림없이 저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 것이다. 많은 공장 아가씨들이 유린당했을 지도 몰랐다. 이런 수치스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할 수 없듯 그들도 그랬을지 몰랐다. 언제 또 그 늑대 같은 정 사장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이란 것을 알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졸라 빚을 얻어 나머지 옷값을 갚았지만 그 수치스런 사실은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대학 이학년 봄 학기였다. 심한 과로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나는 학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대학 병원으로 옮겨져 급성 맹장이란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비가 없었다. 가뭄에 기다리던 비처럼 목마르게 원하던 성공은 고사하고 병든 몸으로 아버지 앞에 설판이었다. 그 고난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아버지는 애초부터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내가 아프다한들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기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어머니만 가슴을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설사 수술비가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이제는 내 목숨이 아닌 차라리 운명에 맡기든가 아니면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구원의 밧줄이 엉뚱한 곳에서 내려왔다. 그 대학병원의 외과과장님이 내 딱한 사정을 의대생 제자들한테서 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하셨다. 그때 의대생 반장 석현 씨와 내 친구 수현이는 열애 중이었다. 그 징검다리를 놔 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제자들은 내 사정을 교수님께 얘기했고 제자들을 남달리 사랑하시는 과장님은 제자들의 친구를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는 과장님의 부인이 운영하는 개인 병원으로 옮겨져 의대생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난 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또 한 참을 우셨다. 어머니가 원장님께 최소한의 약값만을 지불하는 인사를 차렸다.

어쩌면 사경을 헤매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과장님 부부의 지극한 히포크라테스 의사 정신이 아니었다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또 나를 위한 의대생 친구들의 한결 같은 우정과 내 친구 수현이의 남다른 보살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죄 없는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나는 얼마나 염치가 없었는지, 그런데도 나는 그 긴 세월동안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며 편리한 존재인지, 필요할 때 찾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망각해버린다.

육체적인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고 약을 먹으면 된다. 그 힘든 상황 속에 내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또 나를 덮쳤다. 누군가 사랑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잔인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 내게 사랑 같은 것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절망 속에 헤매고 있을 때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 내가 성공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함께하자던 그가 내 곁을 떠나갔다. 어차피 그때 사랑은 내게 사치였지만 내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에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어차피 과외를 할 바엔 서울이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 얼마나 외로운 벌판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라고 해야 낡은 가방하나였지만 마음은 꽁꽁 묶인 쇠사슬보다 더 무거웠다. 지금은 K대학으로 합병된 W대학에 편입을 했다. 벼랑에 서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갈 곳이 없어 어릴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친척 집을 찾아갔다. 눈치 없게 몸을 의탁하고 그 일대를 샅샅이 뒤져 꽤 큰 제과점에서 밤일을 시작했다. 빵집 주인아저씨의 느끼한 눈길이 가녀린 내 목덜미에 꽂혔지만 모른 채 일에만 열중했다.

주인아줌마가 잠깐 가게를 비운 어느 날이었다. 제과점 뒤쪽에 있는 골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나를 누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더듬었다. 주인 아저씨였다. 화들짝 놀라 들입다 그를 밀치고 빵집을 뛰쳐나왔다. 성난 주인아저씨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쯤 도망을 쳤는지 길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옛날 짝꿍의 자취방 부엌에서 보았던 별 무리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둘, 별 셋 나 셋을 세다 말고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천천히 눈물을 닦고 집으로 왔다.

잠시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학계를 제출하려 교수님을 찾아갔다. 대강 내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며칠 후 그 분의 소개로 쾌 큰 의류 생산 공장에 취직을 했다. 밤일하는 여공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빵집보다 분위기도 좋고 여공들도 나를 언니처럼 좋아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그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하루는 이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직원이 한남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센터를 같이 가자고 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회화를 배우기 위해 이 곳에 나가고 있었다. 선교사는 미국 목사님이었다. 용산에 있는 미 8군이 코앞이라 많은 미국 군인들, 미국 주재원들이 드나들었다. 얼마 후 그는 내게 자기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프러포즈였는지 단순한 동료로 유학을 같이 가자는 애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고인 깊은 상처 때문에 나는 누구와 가까워질 수가 없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얼마 후 혼자 유학을 떠났다.

지금의 남편은 선교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센터의 목사인 동생을 방문 중이었다. 하루는 그가 내게 서울시내 관광 안내를 부탁했다. 나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그 부탁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관광을 마친 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내게 그는 원더풀 투어를 연발하며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처로 얼룩진 내 가슴에 파란 눈의 그를 만나면서 차츰 호수 같은 푸른 하늘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닌 그가 점점 내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관광을 나왔던 그가 미국에 돌아가 제대를 하고 미 8군에 직장을 잡아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자연히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 옥빛 같은 파란 싹이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고생도 견뎌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또 내게 상처만 안겨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이 무성하게 잎을 피웠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사실 남편을 노총각이라고 소개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중년의 이혼남이었다. 대학까지 공부한 것이 양코백이와 결혼을 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내 결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옛날의 물러빠진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내 편이어서 우리는 구청에 가서 박음질 하듯 우리의 결혼을 호적에 올려버렸다.

내가 미국에 갈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연탄을 갈다 뇌진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해버렸다. 내가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꼭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생전 처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소리를 치며 대들었다. -왜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 ? 내 뺨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분에 못 이긴 아버지가 내 뺨을 연거푸 후려친 것이다. 서러워 엎어진 나를 옆에 있던 친척들이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뒤뜰로 뛰쳐나갔다. 흰 눈 속에 덮인 텃밭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수도 펌프로 힘차게 물을 틀고 계셨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발등을 간질이며 철철 쏟아졌다. 나는 노상 헤헤헤 웃으며 시멘트 바닥에 발을 뽀드득뽀드득 비벼대었다. 어머니가 쪽박으로 물을 가득 떠서 내 발등에 쭈르륵 끼얹으며 발등을 씻겨주었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가 시원하게 품어주던 펌프였다.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수도 펌프를 만지자 묵직한 손잡이는 꽁꽁 얼어붙은 채 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는 강둑으로 올라갔다. 그때 고등학교시절 어머니가 늘 나를 기다리던 언덕에 서서 은빛으로 흐느적거리는 드들 강을 내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쫙 깔려있었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가만히 내게 속삭였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찬바람에 찢긴 나무 가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지 바르르 몸을 떨며 내게 안겨왔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하와이서 삼년을 살며 두 째 아이를 낳았다. 지상의 낙원이란 하와이였지만 남편의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로 또 이사를 했다. 남편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 나도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시험이라 부담이 컸지만 학원에 등록을 하고 남편보다 몇 배의 공부를 해 운 좋게 단 번에 합격을 했다. 엘에이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남편의 막내 동생이 사는 레드랜드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같이 미국인 회사에서 부동산 일을 시작했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수입을 보장할 수 없어 나는 남편이 샐러리맨으로 취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취직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 싫은 소리를 하고 그것은 자주 부부 싸움이 되곤 했다. 어느 날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나는 남편의 입사入社 소식인 줄 알고 얼른 봉투를 뜯었다. 그것은 남편의 이력이 너무 넘쳐서(over qualify) 부득이 다른 사람을 고용한다는 편지였다. 나는 비로소 남편이 왜 적성에 맞지 않는 부동산 에이전트를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잉여 인력으로 내 몰리고 있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옮겨도 영어가 문제였다. 더구나 미국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동산 사업에서 영어가 딸리는 것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소통을 못하고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영어를 마스터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내 길을 개척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고 한국말로 두어 줄 써서 우리 회사 부동산 광고란에 끼워 넣었다.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서비스 합니다.’ 그러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집을 팔겠다는 분이 전화를 했는데 나처럼 국제결혼을 한 분이었다. 내 첫 손님이자 첫 리스 팅, 그리고 나를 부동산 에이전트로 키운 시조가 되신 분, 바로 미시즈 핸슨이었다. 그 분이 영어를 못해서 나를 찾은 게 아니라 그리움을 나누고 싶어서라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느꼈다. 그 분한테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을 내 놓은 지 3일 만에 팔려 미국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에이전트로 돈을 벌었다. 언젠가 미시즈 헨슨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매일 그런 행운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인 내가 보수적인 백인들을 상대로 백인 에이전트와 경쟁을 하면 나는 늘 패자가 되곤 했다. 고정관념과 지속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영어가 서툴러 소통의 통로가 막히는 나를 선택할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깊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들가지라도 붙잡고 헤엄쳐 나와야 했다. 딸이라고 무시한 우리 아버지의 차별을 이겨내듯,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당신들을 이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잡고 매달린 동아줄이었다.

나는 한 지역을 골라서 꾸준한 일대일의 마케팅 전략을 폈다. 우선 그들과 마음을 나누기위해 자주 그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아 서비스를 했다. 서툰 영어지만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전문지식을 넓히고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다.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배운 것을 부지런히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손님들을 만나고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을 기록해 공부를 했다. 그런 세월이 일 년을 넘어서자 드디어 나를 찾는 손님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몇 개의 리스팅(Listing)을 확보하면서 영어 문제도 조금씩 풀리고 자신감도 붙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백인 에이전트보다 더 잘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것은 나를 무시한 아버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당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딸이 저 높은 곳에 세우려는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었다. 어느덧 그것은 내가 성공해야 되는 이유요 목적이 돼 있었다. 일단 내게 일이 맡겨지면 손님들의 만족을 끌어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성공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질주하다 보면 두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비례했다. 어린 두 아들에게 엄마로서 제대로 살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체증처럼 가슴에 걸렸다. 마땅히 애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 둘을 다 프리스쿨에 보냈다. 작은 애는 두 살, 큰 애는 세 살이 조금 넘어 겨우 기저귀를 뗐을 때였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프리스쿨에 가기 싫다고 내 바지 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2시간 후에 엄마가 데리러 갈게가까스로 아이들을 달랬다. ‘2시간 후에 꼭 데리러 와야 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시베리아 벌판에 끌려가는 죄수마냥 선생님 손에 끌러 교실로 들어가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바이 바이를 하는 우리 아이들, 두 아이를 보며 내 가슴은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결혼 전에 내가 그리던 핑크 빛 꿈은 아득히 먼 곳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손님을 만나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어 나는 숨도 돌리지 못하고 학교로 뛰어갔다. 아이들은 두 시간이 왜 이렇게 기냐고 울먹거렸다. 그때마다 내 눈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어린 아이들 생각에도 하루가 걸리는 엄마의 2시간은 무진장 길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은 빅토빌에 손님을 만나러 갔다가 일을 마친 뒤 좀 더 빨리 오려고 빅 베어 레익(Lake)이 있는 지름길인 산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산속의 겨울을 알지 못했다. 어둠이 쏜살같이 달려와 진눈깨비 눈을 뿌리며 앞을 막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어둠 속에 꽃처럼 날리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더구나 차의 가스까지 바닥을 쳐 잘못하다간 산 속에 갇힐 판이었다. 주유소를 찾아 겨우 가스를 넣고, 시동생에게 애들 픽업을 부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얼굴은 온통 눈물 반죽이 돼 있었다.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시동생 집에서 아이들을 찾아 집으로 오며 나는 나무꾼의 선녀처럼 두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이럴 때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의 오픈 하우스에도 애들을 데리고 다녔다. 내성적인 남편은 부동산 에이전트란 직업이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손님들을 만나고 남편은 대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내가 손님들을 만나고 부동산 일을 할 때 남편은 애들을 챙기고 광고 편지를 써주고 팔려는 집에 세일 사인을 붙이고 떼고 록 박스(Lockbox)를 거는 등 허다한 뒤치다꺼리를 싫다는 말없이 도와주었다. 남편의 헌신적인 도움과 맨발로 뛴 나의 노력으로 나는 점점 세일즈 우먼으로 두각을 나타내 몇 년 후에는 우리 사무실의 톱 세일즈 에이전트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유난히 스모그가 많이 끼는 랜드랜드에서 나는 심한 알레르기 증상으로 고생을 했다. 눈병이 생겨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7년을 일하다보니 손님도 자리가 잡혔고 친한 사람들도 생겨 정든 곳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1985년에 우리는 큰맘 먹고 오렌지카운티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무지나 다름없던 레드랜드에서 쌓아 올린 그 체험이 있기에 결코 두렵지 않았다.

건강 때문에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그 곳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곳은 내가 미국인으로 자리를 잡도록 주춧돌을 깔아준 곳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운명 같은 인연을 확인시켜준 곳이기도 했다. 내가 레드랜드에 사는 동안 서로 자매처럼 의지하며 지냈던 연수때문이었다. 연수는 사넬 양장점의 주인 정 사장의 딸이었다. 우연히 둘이 고국 얘기를 나누다 연수가 그 분의 딸이란 것을 알고 나는 자지러질 듯 놀랐다. 연수는 정 사장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의 장로로 좋은 아버지로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나는 연수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명암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밤에 틈틈이 컴무니티 칼리지에서 수료한 어카운팅(Accounting), 에스크로

(Escrow), 그리고 부동산 감정(Appraisal) 코스도 우리가 새로 자리를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오렌지카운티로 와서 주로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부동산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레드랜드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닦은 체험이 아닌가싶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늘 공부하며 전진하는 강한 나의 도전 정신도 나를 세운 주춧돌의 하나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위틈에 난 소나무가 더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듯, 끊임없는 나의 도전 정신,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미워하며 쌓아올린 탑, 바로 그것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불어 닥친 미국의 대불황은 어찌 보면 내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심한 불황으로 많은 에이전트들이 업계를 떠났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비전으로 돌파구를 시도했다. 아침 7시면 오피스에 나왔고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나의 하루였다.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이미 일벌레가 돼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살길이고 갈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인 듯 나는 일에 매달렸다. 남들이 손대지 않는 숏 세일을 전문으로 처리해 한발 앞서 나갔다. 우리 사업이 점차 자리를 잡자 불황이 절정을 달리던, 불경기로 몸살을 앓던 1992년에 남편과 나는 우리 사업을 ‘ERA 부동산 프랜차이즈로 확장시켰다.

또 나는 그 해에 오렌지카운티 서부 부동산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성공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다. 영어가 짧아 미국인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던 이방인인 내가 이제는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당당히 사업체를 일궈내고 그들의 리더로 선 것이다.

늘 나를 믿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돌보아주던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결연히 아버지에 맞서 딸을 공부 시키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비록 판사는 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성공시켰다며 온 동네 사람들에게 또 딸 자랑을 무던히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1995년에는 미국 연방정부 모기지 회사의 하나인 페니메-FNMA (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 에이전트로 발탁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 뒤로 10년은 내가 부동산 에이전트로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이었다. 부동산 에이전트라면 누구나 한번쯤 페니메(FNMA) 회사의 공식 에이전트로 선정되기를 바랐다. 내가 알기론 한국인으로써, 아니 동양인으로서도 처음인 것 같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나보다 더 뛰어난 훌륭한 에이전트들도 들어가지 못한 자리이기에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고 승리가 있는 곳에 패배의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들을 한다. 부동산 브로커를 하려면 빈손으로 하라. 절대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브로커 이름으로 재산이 있으면 소송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미국만큼 변호사가 많은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소송의 천국이 바로 미국이다. 어느 에이전트가 실수를 해도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브로커가 지는 것이 미국의 부동산 법이다.

그때 우리 회사가 소송을 당했을 때는 내가 브로커였다. ERA 프랜차이즈 컨벤숀에서 매년 상을 받고 또 지역 신문에도 해마다 톱 세일스 에이전트로 소개되는 둥 나는 꽤 알려진 에이전트였다. 우리가 실책 보험을 들었던 회사는 그때 파산 선고 중이었다. 십년 넘게 부어온 보험은 내가 필요할 때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민사 소송은 사 년 넘게 시간을 끌었다.

숏 세일을 하던 집이었는데 은행은 손해가 더 적은 차압을 해 버렸다. 집 주인은 1차와 2차 융자, 라인 오브 크레딧 까지 동원해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다 빼 쓰고 빈 깡통인 집을 던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차압으로 끝난 것을 에이전트 탓으로 돌렸다. 들리는 소문으론 우리 오피스 가까이에 부동산 사무실을 갖고 있던 콜드웰 뱅커의 B 부동산브로커가 일부러 나를 찍고 그 집주인에게 자기네 고문 변호사를 붙여줬다고들 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브로커의 잘못이 아니었다.

집을 잃었다고 훌쩍거리며 정신적인 피해를 들먹이는 주인을 보고 판사의 마음도 흔들렸는지 모른다. 그에게 한 푼의 손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재판은 집 주인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서는 어중간한 중간보다는 가진 것 없이 정부 돈을 축내는 약자가 더 법의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 동안의 변호사 비용과 집 주인에게 보상을 해 주느라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정신적으로 지치고 피폐해져 더 이상 사업을 하고픈 의욕을 잃었다. 남편과 상의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내가 깊은 실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또 다시 드들 강둑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여고생 시절로 돌아가 찬바람을 뚫고 돌아오는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주었다.

엄마는 네가 성공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고 또 성공을 이뤘지 않느냐? 미국에서 일한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줬느냐! 때로는 그들의 친구처럼, 자매처럼, 가족처럼 그리고 생활의 상담자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너의 큰 성공이 아니라 네가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나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모처럼 오랫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으며 피해와 슬픔 그리고 난관 속에서 성공에 대한 콤플렉스가 엄청나게 심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나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똑똑한 사람이고 싶었고 큰 성공을 거둬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모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진정 원한 것은 나의 부나 성공, 명예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남편과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내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의 실패는 오히려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해할 충분한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배웠고 가정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신용으로 잘할 자신이 있다.

아직도 많은 손님들이 나를 믿고 찾아준다. 내가 거둔 결실이 비록 대단치는 않아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에 비해 출발선에서 훨씬 늦게 시작한 나로서는 내 삶에 대한 긍지로 뿌듯해진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무엇보다 엄마를 소중하게 여기는 두 아들이 곁에 있다. 엄마가 일 때문에 제대로 돌봐 주지 못 했어도 두 아이 모두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하게 잘 커주었다. 남편과 오랜 상의를 한 끝에 나는 은퇴하기로 결정을 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많은 사람들의 이웃으로 그리고 친구로 나는 돌아왔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구시대의 완고함과 좌절된 꿈을 안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비록 그가 나를 많이 슬프게 했지만 나를 꺾어지지 않게 단련시키고 불굴의 강인함을 길러 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나를 소송해 곤경에 빠뜨린 사람도 용서해 주고 싶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올해는 어머니가 기다리던 드들 강변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강 언덕에서 딸을 기다리다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실 것이다. 드들 강 언덕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살을 에는 찬바람은 간데없고 따스한 봄바람이 내 발길에 함께 할 것이다. 물 따라 흘러가며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을 강둑에 남기며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다.





            





걸어 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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