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休戰)
07/14/20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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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성가시게 군다

감히 내 밥그릇까지는 못 건드리고 조금 떨어진 밥도둑 김치접시 끄트머리에 일단 발을 붙인다

상황 봐서 공격할 모양이다. 밥상에서 파리채를 들 수도 없거니와, 파리채 써본지는 반백년도 넘었다

일단 김치는 안 된다고 손짓을 하니 잽싸게 날아 도망갔다

조금 있더니 또 날아와 이번에는 고추조림 접시에 내려앉는다. 간장 냄새에 회가 동했을 것이다

저게 또 내 눈치를 보다가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으면 공격을 하겠지!

 

저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

드디어 한쪽 발을 접시 안쪽으로 내어밀었다, 지체하다가는 고추조림이 공격당할 것이다

저걸 잡아 죽여야 하는데 밥 먹다 말고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쫓아 보냈다

한동안 집안에서 파리 구경을 못했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

 

창문마다 그물을 쳐놓았으니, 그리로는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드나드는 현관 문, 뒷문, 그리고 거실에서 밖으로 드나드는 문은 다르다

저도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고등어구이 냄새가 코를 죽이고, 또 어떤 때는 김치찌개가 속을 뒤집는데 참을 수가 없었겠지. 내가 잠간 나갔다 들어오는 틈을 노리고 있다가 잽싸게 따라 들어왔나 보다

틈을 준 내가 잘못이지 파리보고 나무랄 일도 아니거니와

머리 꼭대기로 따라 들어오는 놈을 내가 어찌 막으랴

일단 들어왔으니 저도 죽기 살기로 덤빈다. 세상에 무서운 놈은 죽기 살기로 덤비는 놈이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난다

그래봐야 지가 죽지 내가 죽을 일은 없을 터이지만 아무튼 싸워야 한다.

 

일단 밥 다 먹고 나서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저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내 손이 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 밥상 끝에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참 난감하다. 분명 저도 배가 고파서 저러고 있는데, 잡아다가 입을 열고 뭘 먹여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반찬접시에나 내려앉아 맘대로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길은 한가지다.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밥 다 먹었다. 이제 한판 붙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없다. 어디로 숨었나보다

조금 기다리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겠지 하고 거실 소파랑 주방 밥솥 등을 살피고 있는데, 

드디어 나타났다. 밥솥 뚜껑 위에 앉아있다.

 

살금살금 다가갔다

오른 손 손바닥을 펴고 각도를 맞추어 잽싸게 위로 후려치면서 주먹을 쥐어야 잡을 수 있다

거리도 적당하게 되었다. 파리와 내 손바닥 사이는 약 두 뼘 거리, 아직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다

숨을 멈추고 잽싸게 잽을 날렸다

주먹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있어야하는데 없다. 놓쳤다

이번엔 내가 당했다. 어디 요 담에 보자


두리번두리번 살피고 있는데 요번에는 밥상 모서리에 앉았다

할 수 있는 대로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각도를 조금 높이고 파리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잡았다

손바닥에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느낌이 있다.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마룻바닥에 힘껏 패대기치면 파리는 타박상을 입고 기절해 죽는다

그 다음엔 주어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그러면 전쟁은 내가 이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는가? 왜 하필 내 밥상을 건드려가지고 이신세가 되었나

좀 색다른 것이 먹고 싶었나

그래도 그렇지 파리 주제에 감히 사람의 밥상을 넘보다니, 괘씸죄에 해당하는 일이다

아무래도 사형 집행을 하고 전쟁을 끝내야겠다

그런데 막상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려 하니 불쌍하단 생각이 났다

저도 오죽했으면 사람의 밥상을 넘보았을까


나도 이러면 안 되지 싶었다

파리 제 까짓게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좀 먹게 놔두지, 나는 배불리 먹고 굶주린 파리는 잡아 죽여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주먹을 쥔 채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슬그머니 주먹을 펴니 그놈은 잽싸게 날아 허공으로 사라졌다


포로로 잡았던 파리를 놓아주며 휴전을 선포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자비를 베풀어 파리 살려주었어!”(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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