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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06/25/201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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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그리고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한국인이 터키를 여행하다 보면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 터키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터키 노인들에게 한국인은 형제와도 같은 존재다.

6.25 전쟁 69주년을 맞아 이스탄불 군사박물관과 터키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한다.





터키는 아시아 대륙(95%)과 유럽 대륙(3%)에 걸쳐 있는 매우 독특한 나라다. 인구의 98%가 이슬람이다.

그러나 일부 난폭한 이슬람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순진하고 특히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절하다.

69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연 때문이다.





트로이 유적지, 앙카라,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괴레메 야외박물관, 베르가마와 아스클레피온,

콘야, 에페스 유적지, 하투샤 등 갈 곳과 볼 것도 많다.





터키의 최대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기원전 667년경 비잔티움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도시는 후에

콘스탄티노폴로 바뀌었다가 1924년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됐다.

이스탄불은 1985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유럽과 중동에서는 가장 큰 도시다.

도시의 방문지로는 성 소피아 박물관, 톱카프 궁전, 블루 모스크, 이집션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

돌마바흐체 궁전, 보스포러스 해협,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이 있다.





*군사박물관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라 불리기도 한다.

1881년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케말은 갈리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스탄불을 침공하던 그리스군을 격퇴한 터키 최고의 영웅겸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수많은 개혁을 구상하고 몸소 그 개혁을 힘차게 이끌어 갔다.

남녀평등은 물론 여성 참정권은 1930(지방선거) 1934(전국)에 모두 허용할 정도였다.

이것은 한국이 1948, 프랑스 1944, 스페인 1931년에 비하면 매우 파격적인 이슬람 국가로서의 개혁이다.

그 것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쓰던 화분형의 모자 페즈(Fez)와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던 베일 착용도 모두 금했다.

현재의 터키가 이슬람이면서도 관용적인 국가가 된 것은 모두 그의 개혁 덕분이다.

나라를 위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일했던 그는 1938 11 10일 오전 9 5분 세상을 떠났다.

아타튀르크가 없었다면 터키는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터키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금 그의 동상과 이름은 터키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은 1,000년에 이르는 터키군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15세기, 성 이레네 교회에 보관돼 있던 전쟁병기로 부터 시작됐다.

후에 오스만 제국의 전 육군사관학교 건물로 이전된 박물관은 현재 5,000점 정도의 전시물이 진열돼 있다.

하지만 진열되지 못한 군사 유물이 지하실에 5만점 이상 쌓여 있다.

오스만 제국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터키의 군사 유물들이다.





군사박물관에서는 메흐테르(Mehter) 군악대 공연도 한다.

군악대의 총책임자는 초르바시바시라 하는데 깃털이 달린 긴모자를 쓰고 있다.

그 외에 군악대를 지휘하는 지휘자, 공연내내 칼을 들고 서있는 예니체리 병사 복장의 군인도 몇 명 있다.

공연은 오후 3시부터 1시간동안 진행된다.





군사박물관을 가기 전, 무스타파 케말이 살았다고 하는 집(현재는 박물관)을 찿았지만,

그 날은 박물관이 문을 닫는 날이어서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군사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것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용한 거대한 독일제 대포다.

전투에서 터키군은 영국이 주도한 연합군 함대를 무참히 격파시킨다.

그 것도 대포가 아닌 기뢰를 설치하여 전투전함 6척을 침몰시킨 것이다.

결국 칼리폴리 해전은 터키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당시 영국의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사임하게 된다.





대포 옆으로는 터키 공군의 CF 104 스타파이터 전투기도 보인다.

1963년부터 비행하다 1995년 퇴역한 전투기다.





전시관 안에는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참모들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는 밀랍인형도 눈에 뛴다.

케말 장군은 오스만 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바로 이곳에서 6년동안 공부했다.





백마를 탄 메흐메트 2세가 전투를 지휘하며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모형전시관 앞에 섰다.

거대한 대포알이 날아 가 성벽을 파괴하는 공성전으로 시작된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날.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3중으로 지은 튼튼한 성벽에 둘러 쌓인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로마 제국의 천년 도읍은 결국 이슬람 제국으로 탈바꿈 하고 만다.











이외에도 전시관에는 가죽과 나무 비단등을 이용해 만든 낙타 안장과 가죽 말안장,

거북이등 파충류 동물의 단단한 등껍질로 만들어진 방패와 각종 투구, 술탄이 쓰던 지휘용 칼과 권총,

17세기에 시용하던 오스만 전투 헬멧, 오래된 터키 국기와 대포들만 모아 놓은 전시실도 있다.





군사박물관의 특이한 전시관으로는 그리스관과 한국관이 있다.

그리스관에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쳐부수고 빼앗은 그리스 국기가 진열장 안에 걸려있다.

그리스군은 1차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터키를 침공하려 1919년 이즈미르에 상륙했다.

터키군에 빼앗겼던 콘스탄티노플을 되찿으려는 것이 그리스군의 목표였다.

하지만 터키군 총사령관 케말 장군의 활약으로 터키는 살아 남게 되고 그리스 군은 국기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한국관에는 한국지도와 꼬레(Kore)라고 쓰여 있는 터키 국기가 전시돼 있다.

꼬레는 터키어로 대한민국을 뜻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 터키는 15,000명의 터키군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것은 미국의 480,000, 영국군의 56,000명에 이은 세 번째로 많은 파병군이다.





용맹한 터키군은 적진으로 돌격하면 가공할 육박전으로 적군을 섬멸했다.

중공군에게 사로 잡힌 포로들도 용맹성만큼은 절대 잃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회고록에 의하면 전세계에

한국전 참전 도움을 요청했을 때 터키가 가장 먼저 응답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전쟁이 끝나면 자신이나 미군이 아닌 터키군이 가장 널리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한국전쟁에서의 터키군 희생자는 군우리 전투의 전사자 212명 등 모두 774명의 전사자,

부상자 2,147, 실종 175, 포로 346명 등의 많은 인명손실이 있었다.





한국관 벽에는 전쟁 당시의 사진도 전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터키군 군인과 한국고아 소녀가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바로 얼마 전 아일라라는 영화로 터키와 한국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주인공들이다.





*1950년 한국전쟁에 파병된 슐레이만은 섭씨 마이너스 35도의 추운 겨울 울고 있는 5살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얇은 옷만 입고 있었으며, 그녀의 가족 전체는 인민군에게 살해 당한 직후였다.

전쟁터에 소녀를 그냥 버릴 수 없었던 슐레이만은 그녀를 데리고 막사로 오게 된다.

그리고는 소녀에게 터키어로 달빛이라는 뜻의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함께 부대에서 지내게 된다.

어느새 아빠와 딸 사이가 된 두 사람은 14개월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슐레이만은 종전과 함께 고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 가겠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아일라가 들어 갈 만큼 큰 나무궤짝을 만든다.

그리고는 아일라를 궤짝 속에 숨기고 위는 빵과 과자로 덮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에 타기 직전 아일라는 헌병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한다. 슐레이만은 울고 있는 어린 아일라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아빠들은 아이들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는거야,

약속하마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터키로 돌아 온 그는 몇 년동안 아일라만 생각했다.

1999년 터키 지진 때는 한국이 구출팀을 파견했을 때 아일라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했다고 한다.

2002년 터키 축구팀이 한국 월드컵에서 뛰었을 때도 그는 TV 스크린을 통해 아일라를 찾았다.

한국을 떠나온 후 한시도 아일라를 잊은 적이 없는 슐레이만이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후 여의도의 앙카라 공원에서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아일라는 65세의 손자 손녀가 있는 할머니가 되었고, 퇴역 대령 슐레이만은 85세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보자마자 부둥켜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두 사람. 몇 년 후 2017 11,

71세의 김은자씨는 터키를 방문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슐레이만을 다시 만났다.

김씨는 입원실에 들어 서자 마자 슐레이만과 그의 아내를 붙들고 하염없는 눈물을 쏟는다.

이미 91세의 노령이 된 슐레이만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슐레이만은 2주 후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그의 아내도 눈을 감았다.





*한국전쟁 당시 터키군은 고아들을 위해 앙카라 학교를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슐레이만과 헤어진 아일라가 간 곳도 바로 앙카라 학교였다.

아일라는 이곳에서 김은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고 지내게 된다.





*그 때 불렀던 앙카라 노래를 아일라(김은자씨)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앙카라 앙카라 귀젤(최고의) 앙카라”.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이다.

 

 

 

, 사진: 서정








슐레이만과 아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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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의 이미지(7장)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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