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queen
은향(ngqueen)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12.30.2012

전체     362038
오늘방문     21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13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2013 Koreadaily Best Blog

  최근 방문 블로거 더보기
  달력
 
치욕의 현장, 재미 일본인 강제 격리 수용소
08/14/2014 08:36
조회  9835   |  추천   44   |  스크랩   0
IP 74.xx.xx.71

 

 

 

* Manzarnar(만자나) 일본인 격리 수용소 이야기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당시

1941년 12월 7일 일본 가미가제(神風)특공비행대가 하와이의 진주만(Pearl Harbor)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그에 대한 응징의 일환으로

1942년 2월 19일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Executive Order 9066(행정명령 9066)에 전격적인 싸인을 했고

그 해 삼사월 화창한 봄날에

미국정부는 11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Japanese-Americans)을

적국인(Enemy Aliens)으로 지정하고 강제수용조치를 취했습니다.

 

 

 

 

 

 

 미국정부는 해안과 멀리 떨어진 록키산맥 부근과 내륙중심부인 아칸소(Arkansas)주와

대서양 연안의 동부지역등 여러 곳에

이주수용소(Relocation Center) 또는 격리수용소(Isoation Center)와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일본계미국인들에 대한 강제수용조치를 단행하였고

서부해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이곳 만자나 수용소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Relocation Center는 명칭과는 달리 독일군 포로들을 수용한 포로수용소(Prisoners of War Camp)와

유사한 것들로 실제 명칭에서도 전쟁캠프라고 표시된 곳도 있었다는군요.

 

 

 

 

 

 

캘리포니아 LA에서 북동쪽으로 230마일 떨어진

씨에라 네바다 오웬스 벨리의

Lone Pine과 Independence시 사이에 위치한, 전쟁 캠프 그라운드였던 곳을

그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곤

전쟁과 역사에 대한 치욕과 아픔과 사과등 교훈을 심어주는 증표가 되어

년중 수천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는 유적지로 재탄생 되어진 Manzanar National Historic Site를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이 캠프에 수용되었던 이들의 2/3가 미 시민권자이자 어떠한 범법자가 아님에도 전쟁포로나 다름없이 강제수용되어

(일본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적국인으로 취급돼 날벼락을 맞은 것이지요)

비록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처럼의 학살은 없었지만

무장된 미군인에게 감시를 받고 억류되어 살아야했던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자

훗날 히바야시 교수 및 재미 일본 시민권자 협회등이 나서

그 당시에 전쟁 수용소(War Relocation Camp)라 불리어졌던곳의 명칭을

1992년 3월 3일에 Manzanar National Historic Site로 변경시켰다는군요.

 

 

 

 

 

미 전역 10개의 캠프에서 11만명 이상을 수용했던 시절,

여기 캘리포니아 만자나 캠프에서만 11,000 여명을 수용했다는데

이 지역은 원래 어메리칸 원주민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물길이 끊긴 후 볼모지로 버려졌던 땅인데다

고도 4000 피트 높이에 여름이면 100도를 넘는 폭염에다 겨울이면 혹한에

늘상 강풍을 동반하는 모래먼지속에서 인간이 견뎌내기엔 극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념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 미국 명소들의 기원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거기엔 늘 Native American 인디언들의 참상이 숨겨져 있는데

이 만자나 지역 역시 옛날엔 인디언들이(Owens Paiute) 평화롭게 사냥이나 Fishing, 잣나무 재배,

주위부족들(미웍족, 모노족, 쇼쇼니족등)과 물물교환등을 하며 삶을 영위했었는데

씨에라 네바다 인요산 지역의 금, 은 발견으로 인해 유럽피안 어메리칸들이 이주해 오면서

그들의 터전을 짓밟아 오웬스 벨리 인디언 전쟁이 터졌고(1861-1863)

그 결과로 이 인디언들은 미군의 총칼앞에서 200마일이나 떨어진 Fort Tehon까지 도보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는군요.

 

수년후에 다수의 인디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번엔 개척자들의 자본과 인디언들의 노동력으로

작물을 재배하고 과수원을 경영하며 그나마 가장 행복한 전성기를 꾸렸었는데

문제는 점점 더 신속하게 덩치가 커지는 로스엔젤레스시가 발단이었습니다.

 

1905년 LA시는 오웬스 벨리로부터 비밀리에 Water Rights를 사들여 1913년에 233마일의 수로건설을 끝내곤

물길을 돌려 식수를 공급 받았는데, 그랬슴에도 가뭄과 함께 점점 불어나는 LA인구에 비해선 역부족이라

오웬스 벨리 근처의 땅을 모노카운티까지(그래서 모노 레잌이 소금 호수가 됨)) 사들이기에 이르렀으니

물길을 빼앗긴 오웬스 벨리의 목장이나 과수원은 볼모지로 버려지게 되었고(1929년경)

그 안에 만자나가 속해 있었습니다.

 

 

 

 

 

 

이 버려졌던 만자나 황무지중 6200 에이커를 US.ARMY가 LA시로부터 리스를 해

재미 일본인 격리 수용소로 삼은게지요.

 

(전범외엔 독일계나 이태리계 미국인들을 가두었단 예긴 못들었습니다만..)

  

 

 

 

 

 

위령탑

이 만자나 수용소에서 죽은 150명의 혼령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전역에서 자국정부에 의해 억류되었던 120,313 명의

자패니즈 어메리칸을 추모하고자 세워진 탑으로 추모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그 당시 역사를 재현해 놓은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서

그 때의 수용소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도록 할까요?

 

(기술된 모든 내용이 전시관안의 자료들과 위키피디아를 참조로 제가 번역한 글이 돼서

완벽하진 않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방문자 센터 화장실벽에 붙어있는 사진으로 그 당시 수용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데

칸막이 없이 오픈된 변기와 더럽고 악취나고 오픈된 공동샤워시설이

모멸감으로 떨만큼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해 놓았네요. 

 

 

 

 

 

 

전시관안의 모습입니다.

 

 

 

 

 

 

 

의외로, 기록해 놓은 사진자료나 문서들을 꼼꼼히 챙겨보는 백인들이 많았습니다.

 

 

 

 

 

 

 

Assembly Centers

캘리포니아만 해도 각지에서 끌고 온 일본인들을 임시 수용했던 곳이 상당했더군요.

여기에서 머물다  전쟁 이주 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로 강제 이주되는 것이지요.

 

 

 

 

 

 

미 전역에 걸쳐 있는 열군데의 전쟁 이주 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

 

캘리포니아주의 만자나, Tule Lake

아리조나주의 Poston, Gila River

유타주의 Topaz

아이다호주의 Minidoka

와이오밍주의 Heart Mtn.

콜로라도주의 Granada

알칸사스주의 Rohwer, Jerome

 

 

 

 

 

 

이 6200 에이커 땅에 10000 여명을 수용했던 막사의 조감도입니다.

 

 

 

 

 

 

 

모래폭풍 휘몰아치는 사막을 그들은 불도저로 밀고 터를 닦아

자신들이 살아야할 만여명의 막사를 백인 지휘관들의 감독하에서 손수 지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황무지는 점차적으로 바뀌어서

연못도, 꽃 피는 정원도 생겼을만치 사람 사는 땅으로 변모했다는군요. 

출간 첫 돌 기념판, 만자나 무료신문에 실렸던 작자미상의 시입니다.

 

" Out of smiles and curses, of tears and cries, forlorn:

Mixed with broken laughter, forced because they must...

Out on the desert's bosom--a new town is born."

 

 

 

 

 

 

일본의 진주만 공격후 미 본토 San Pedro항을 터전으로 살던 다수의 일본인들에게는

직장이나 학업중단, 은행동결등 형벌이나 다름없는 제재가 가해졌고

급기야는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일본 타운인 리틀 도꾜 역시 1900년 초반 반일본주의 사상 확산으로 거리를 활보하지 못한채

산 페드로와 1가의 3마일 반경내에서만 움츠리며 생활하다간

전부 다 수용소로 보내진후엔 고스트 타운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 시민이라 안전이 보장 되리라 믿었던 2세들에겐 충격이었고 Rafu신문은 휴간되었습니다.

 

그러면 정작 진주만 공격의 발상지인 하와이는 어땠을까요?

그 즉시 군 통수권이 발효되었고 모든 시민의 자유는 통제되었슴에도

하와이에선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일본인들이었기에 본토의 일본인들에 비해선 자유를 누린 편이었으며

인종편견에도 덜 시달린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생업활동이나 일본어 사용등에선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Wanto 식품점이 백인에게 팔렸으며 나는 미국인이라고 크게 붙여놓은것으로 보아

그 당시 사회에서의 극심한 반일감정을 보여주는 단면이네요.

 

 

 

 

 

 

Mass Hall

각 막사마다 강당이 있어 식사배급을 받곤 했는데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입에 맞지않는 음식을 먹을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점진적으로 농작물 재배에 나서 32가지의 채소와 과일,

돼지, 닭 사육등과 두부, 간장, 된장, 콩나물등을 자급자족했고 심지어는 알콜금지상황에서도

사께 비스무리한 발효주(감주라 사려됨)까지 담근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는군요.

 

 

 

 

 

 

직업

1만여명의 한 도시나 다름없는 인구이다보니 그 중 약 4000여명은

직업을 갖고 각분야에서 종사했는데(가드너, 사무직, 회계사, 의사, 간호사, 농부, 선생, 수리공,소방서원등) 

한달 월급이 12~19 불로 그 당시 미군 일병의 월 21불을 결코 넘겨선 안되게 책정되었으며

이들 일본계 미시민중 약 500여명은 그물 제조나 고무 채출, 탄약제조에 필요한 글리세린 채취등

전쟁군수품 조달에 일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 사는 곳엔 훈훈한 정이 싹트기 마련,

점점 미국화되어 가면서 여러가지 운동이나 여가선용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점점 오웬스 벨리 주류인들과 수용소인들과의 교류속에 친목이 융화되어졌다는군요.

 

또한 한 방에 8명씩을 배당해 살아야하는 관계로 낯선 이들과 살기도 하고

칸막이 없는 변기를 공동사용해야하는 모멸감과 공포속에서도 사랑은 싹터서

188쌍이 이 만자나에서 결혼을 했고 541명의 아기가 태어났으며

"Children's Village"를 만들어 고아나 어린아기들을 돌보는 시설도 운영했다고 합니다.

 

 

 

 

 

 

재현해 놓은 막사의 모습인데 담요를 늘어뜨려 칸막이로 구분했슴을 보여주네요..

 

 

그리고 교육에 있어선

처음엔 책상도 의자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점차 개선되어지며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전 커뮤니티의 50%가 학생일만큼 교육참여도가 높았다고 하네요.

이 캠프안엔 학교 교장의 딸을 비롯해서 몇 안되지만 백인 학생도 있었구요.

 

 

 

 

 

 

책상위엔 그 옛날식 타이프라이터가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데

보이는 딱지가 바로 수용인들의 ID Tag이라고 합니다.

 

감옥의 죄수들처럼 어디로 이송되든 그들의 가슴엔 이 신분딱지가 늘 따라다녔던게지요.

 

 

 

 

 

 

그 당시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이들의 명단입니다.

 

 

 

 

 

 

 

.... of Liberty and Royalty (자유를 얻자면 충성을 바쳐라 !!)

Why should I prove my loyalty? (왜 내가 충성심을 증명해보여야만 할까? 나는 미국인인데...)

 

미국에 대한 충성이냐 아니냐하는 질문에 Yes하면 이세들은 군대로 보내졌고

아니면 Tule Lake 전쟁 캠프(이곳엔 이태리, 독일 전범들도 수용돼있었다고 함)로 재이송되는 형편에

 이세와 그의 가족들간의 분열, 눈물, 이별등 처참한 상황이 이어졌으며 

 

 

 

 

 

 

이세들중엔 자원입대하여 장렬히 전사한 애국청년들도 있었답니다.

 

 

 

 

 

 

 

대부분의 수용소인들은 그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순종한 편이었지만

일부 불만세력의 임금격차로 인한 충돌이나 암거래 밀고에 대한 루머확산등

반목과 증오심이 부풀어오름에 따라 상당한 저항조짐이 몇몇 캠프에 있곤 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했던 사건은 1942년 12월의 만자나 폭동이었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에게 쏜 최루개스로 아수라장이 된 대치상황속에서

결국 군경찰은 총을 쏘아 사상자를 만들어냈다는군요. (2명 사살,  9명 상해)   

 

 

 

 

 

 

No Japs Wanted

일본인들의 집에 칠해져있던 반일주의의 표시

 

 

 

 

 

 

 

Japs Keep Out

여긴 백인지역이니 일본인들은 꺼져라 !!

 

그 당시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북한이 도발하면 우리 한국인 핏줄은 어쩌나 하며 잠시 아찔했습니다.

성난 군중들이 남한 북한 가려서 대접해주겠는지요?)

 

 

 

 

 

 

Watch Tower(감시탑)

 

2005년에 복원된 감시탑으로

그 당시엔 조명등과 머신건으로 무장된 8개의 감시탑이 수용소안을 겨누고 있었답니다.

 

혹자는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성난 민심으로부터의 보호차원에서 격리수용시켰다고도 하지만 

그 미군들의 총부리가 어디로 향해 있었던가요?

바로 일본계 미국인입니다. 

 

 

 

 

 

 

그리고 1945년, 8 15 해방 후인 11월 21일에 여기 만자나 캠프는 드디어 문을 닫습니다.

 

이미 살던 터전을 잃어 돌아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은 완강히 거부했슴에도

(물론 반색하며 기쁨으로 떠난 자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이 수용소를 급하게 떠나야만 했습니다.

 

WRA는 전 재산 $600(현 시세 $7860)미만의 수용인들에겐

현금 $25(현 시세 $327)과 기차나 버스 One Way요금과 한 끼니를 주어서 보내버렸다는군요.   

 

그리고 막사의 쓸만한 건축자재등이나 병원내 시설, 장비등은 팔리거나 재배치되었고

캠프는 헐렸습니다.

 

 

 

 

 

하지만 1988년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재미 일본인을 강제수용했던 사실에 대해 사과결의안(Apology Resolution)을 만들어 인정하고 공식사과했으며

피해자와 후손들에게 개인당 2만불의 배상을 행했다는군요.

 

또한 미국은 부끄러웠던 역사를 교과서에도 실어 

전쟁과 인종편견등의 부당성과 더불어 교훈을 삼는 발판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

.

 

May the Injustices and Humiliation suffered here

as a result of Hysteria, Racism, and Economic

Exploitation never emerge again

.

.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주춧돌만 남은 이 치욕의 현장을 둘러보며

한국인, 일본인을 떠나, 같은 이민자의 입장에서, 

이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유사시엔, 시민권이 방패막이가 될수 없을뿐 아니라

삶에 위협이 가해질수도 있다는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제발 북한의 김정은은 경거망동하지말고 조국에선 정치를 잘해주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쪼록 일본은 자국의 핏줄이 이렇게 호되게 당했던 치욕을 교훈삼아야할 것이며

과거 그릇된 역사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고 그에 맞는 응분의 댓가를 치뤄야만 되겠습니다.

 

 

 

이상 역사의 현장, 만자나에서

은향의 블로그 뉴스를 전해드렸습니다.

 

 

* Kevin Kern/ Childhood Remembered

 

 

은향

 

 

이 블로그의 인기글

치욕의 현장, 재미 일본인 강제 격리 수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