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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이 둘로 갈라지다, 아비뇽 유수 Avignon
10/02/201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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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남쪽 40km 지점에 있는 인구 9만여명이 사는 작은 도시 아비뇽 Avignon

찾았다. 이 곳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긴 로마 교황청이,

1309년 부터 1377년 까지 시무했던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고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붙들려 갔던 바벨론 유수에 빗대어, 교황이 정치적인

이유로 바티칸으로 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머물었던 사건을 아비뇽 유수라 부른다.

68년 동안 이 곳에 머문 7명의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Rhone 강 위에 지어진 아비뇽 다리라고도 부르는 생베네제교 Pont St. Benezet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오가는 순교자들과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다리이다. 17세기

까지 보수를 여러번 반복하다 더 이상 보수하지 않아 끊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이제 이 다리는, 교황청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 론강과 어울린 멋진 경치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포토존으로 다시 태어났다. 12세기에 양치기 소년 베네제가

다리를 지으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높이 50m, 두께 4m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교황청은, 유럽에서 가장 큰 14세기 고딕

양식 성이다. 텅 빈 회랑과 프레스코화 만이 남아있는 건물을 나와, 노트르담 성당

첨탑과 황금색 성모 마리아 상을 돌아보며, 그 쓸쓸함을 조금 달래보았다.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지는 엄청난 금액의 헌금을 통제하고 있던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길 것을 강요한다. 파벌주의로

위기를 느끼고 있던 교황은 당시 교황의 봉신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




 

교황의 아비뇽 거주에 영국과 독일이 맹렬히 반대하자,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청을

로마로 다시 옮겼다. 아비뇽의 추기경회가 교황을 따로 선출하여, 대립 교황이 되풀이

되는 분열의 시기를 거쳐, 1417년 교황청은 로마로 완전히 복귀하였다.




 

한국에서 교황 敎皇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파파’papa는 그리스어로아버지

뜻하는 파파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3세기 모든 주교에게 사용되었던 이 칭호는,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오직 로마의 주교만이 사용토록 하였다.




 

파파의 한국어 호칭인 교황은 본래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감화시킨다

의미의교화황’(敎化皇)이었다. 1915년경부터 교화황과 교황이 혼용되다가

1920년대부터 교황은 일반 용어로 정착되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마태 16)

하시며 그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다. 그가 배신한 후에도 부활하여 나타나

내 양들을 돌보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시며, 그를 세워, 교황 제도가 생겼다.


교황들은,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겼다. 베드로는 단지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초대 교황으로서의 직책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는

로마 선교중,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로마는 베드로를 시작으로 많은 교황을 유배하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박해는 313

32대 교황 멜키아데 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식되었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452년 훈족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던 서로마 황제에 실망한 로마 시민들은 교황

레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로마 시의 수호자가 된 그는, 훈족 지도자 아틸라와

담판하여, 그들을 물러가게 한 공로로, ‘대교황칭호를 받았다.






서로마 제국 멸망후, 서고트족 등 야만족들은 캐톨릭이나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본래 아리우스파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과

동맹 관계를 맺은 최초의 야만족 군주였다.


레오 1세에 이어 대교황칭호를 받은 그레고리오 1세는 게르만과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켜 서유럽 각지에 성당을 세웠다. ‘사목규정을 저술하였던 그는 이전까지의

성가를 집대성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착시키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카를대제를 서방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였고, 962년 요한

12세는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켰다. 이 때부터, 교황으로

부터 직접 황제의 관을 받아 써야만 비로소 황제로 인정된다는 관례가 생겼다.

 

8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남부에 크게 확산되자, 1095년 동로마 황제는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기독교

지역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1054년 교회는 성상 파괴의 교리적 이견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동방 정교회와

서방 캐톨릭 교회로 나뉘어졌다. 동방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이 약해지면서 함께

쇠퇴하였다. 15세기에 이슬람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동로마 제국에게 군사 원조를 하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200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자, 교황의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영토 분쟁을 벌여 힘을 키우면서, 차근차근 중앙집권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1517년 독일의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독일에 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이 등장하였다. 캐톨릭 교회도 1560

부터 바오로 3, 비오 5세 등 교황들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 서유럽 열강들의 압박으로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 들었다.

19세기 나폴레옹에 의해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를 거쳐서 부활하였으나,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령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5분의 1을 차지했던

교황청 영토는 대부분 줄어들었다. 1926년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한 비오 11세는,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을 선언하여 교황의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련 등 동유럽의 공산주의권 붕괴에 일조하였다. 그는 사회

정의와 윤리를 다지는 일에 앞장섰고, 과거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가장 많은 국외순방과 성인을 시성한 교황으로 남았다.

 

세계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가 21.4 (카톨릭 13, 정교회 2.4, 개신교 7),

이슬람교가 12 (이집트 중동 코란 중심 수니파 9.4, 이란 이락 무하마드

혈통 중시의 시아파 1.7), 인도 힌두교가 9,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가 4,

유대교가 1400만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천주교는 600, 개신교는 900, 불교는 1,100만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종교로 분류한 위키피디어의 한 자료에서는 북한 주민중 1,900만명을 신도수로

계산하여, 세계 10위에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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