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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0년: 자유시 참변
08/07/2018 10:08
조회  304   |  추천   10   |  스크랩   1
IP 99.xx.xx.57


회자되듯 역시 이념은 피보다 진했다.
적보다 무서운 것이 피를 나눈 형제였다.
1921/06/28 발생한 ‘자유시 참변’은 일제의 총칼이 아닌
해방이라는 민족의 목표를 추구하던 우리가 민족의 한편을 학살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이같은 일은 100년 전인 그때나, 70년 전인 6.25동란이나,
문재인 정권의 지금이나 암울하게도 되풀이 된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공산혁명 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레닌 공산정부군 적군(赤軍)과 공산혁명에 저항하는 제정러시아 백군(白軍)이 맞섰다.


자유시는 원래 '알렉세예브스크'라는 마을이었다.
적군이 알렉세예브스크를 접수하고 자유라는 뜻의 러시아 말 스보보드에서 따와
마을 이름을 스보보드니로 바꾸고 해방구를 선포했었다.
조선인들은 이 마을을 ‘자유시’로 불렀다.


당시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는 백군을 도와 시베리아까지 진출해 있었다
레닌의 공산정부가 국제군을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1921년 초부터 여러 소속의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모여들었다.
또 일제의 추격을 피해 일제와 싸우는 러시아 적군지대로 온 측면도 있었다.


스보보드니시 주변에는

  • 최진동의 총군부
  • 박이리아의 사할린의용대
  • 박그레고리의 독립군단
  • 오하묵/최고려의 자유대대
  • 안무의 국민군대
  • 홍범도/지청천이 이끄는 독립군대

등 5천여 명의 독립군 병력이 독립군단을 이루고 있었다.


독립군단은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공산당이 독립군을 지원하는 이유에는
눈앞의 일본군을 한인들의 항일운동으로써 막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독립군단 중 이르쿠츠크에서 온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상해파 박이리아의 사할린의용대는 독립군단 통수권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노령(러시아)파로도 불리는 이르쿠츠크파는
1920년 러시아 공산당의 지시로 이르쿠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창당했다.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인화가 된 한인 2,3세가 대부분으로 공산혁명이 주요 목표였다.
(대한국민의회 참고: 건국 70주년: 임시정부들)


상해파 공산당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가 조직했다.
여운형, 신채호, 안병찬, 김두봉, 박헌영 등이 가입했다.
상해파는 공산주의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상해파 공산당은 항일운동이 우선적인 목표였다.


두 파가 독립군단 통수권 경쟁에 목메고 있던 가운데 러시아는
독립군단을 조선공산군으로 공산혁명군 휘하에 복속시킬 것을 요구하고
공산혁명군에 들어오지 않는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통보했다.


독립을 위해 싸우던 무기를 버릴 수 없었던 독립군은 저항했다.
그리고 비극은 96년 전인 1921년 6월.28일에 일어났다.
이 전투에는 스보보드니의 현지 수비대인 적군 29연대가 동원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최고려가 이끄는 조선공산군도 사할린의용대를 기습했다.


총알이 빗발치자 사할린의용대는 강물로 뛰어들었다.
조선공산군은 동족을 향해 무자비한 난사를 퍼부었다.
수 많은 목숨이 사라졌고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다.


박이리아의 사할린의용대는 현장에서 72명이 죽고,
퇴각하다가 37명이 제야(zeya) 강에서 익사했으며,
기병의 추격을 받아 산중에서 사망한 사람이 2백여 명에 달했다.
또 전투 후 행방불명자가 250명이나 됐으며
917명이 포로로 잡혀 부대가 전멸하는 비운을 맞았다.


홍범도 등 다른 독립군 부대는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를 보지는 않았으나
레닌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부분 적군화의 길을 걸었다.
자유시 참변의 결과로

  1. 대한독립군단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2.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했다.
  3. 민족주의 세력과 좌파적 독립운동세력은 몰락했다.
  4. 이 사건으로 순수한 독립운동가들은 반공노선으로 돌아섰다.


공산주의 독립세력과 민족주의 독립세력의 갈등은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의 원인이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대한독립군과 임시정부의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몰락은 해방 후 분할점령을 통해 분단을 초래했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참고: 건국 70년: 독립자금)


민족이 갈등했다.
민족갈등은 외세인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공산혁명 도구가 되었다.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이라는 이권도 끼어들었다.
이권에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독립군의 뒤통수를 쳤다.
동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독립운동의 맥을 끊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분단의 원인을 외세에서 찾는다.
이런 남탓은 건강한 역사관이 아니다.

독립군단과 임정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때 임정이 독립군단과 함께 일제에 선전포고할 수 있었다면,
김구의 무장투쟁과 이승만의 외교투쟁이 갈등 대신 연합했다면
분할점령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승만의 외교노력으로 국제사회은 해방 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을 결의했다.
그러나 그 결의를 거부하고 총선을 boycott한 세력은 공산세력이었다.
분단은 우리 민족이, 특히 공산주의자가, 스스로 초래했다.

분단을 외세의 책임으로 돌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자유진영을 축출하려는 목적이다.


공산주의자에게 공산혁명은 민족에 앞서는 숙명이다.
공산주의자가 민족을 찾을 때 거기서 속임수를 보아야 한다.
공산주의자가 다른 한쪽을 칠 때 거기엔 항상 더러운 이권이 끼어있다.



* 주요 참고 자료: 독립군을 몰살한 공산주의자: http://mehansa.com/p205/6294

적보다 무서운 피를 나눈 형제: http://mehansa.com/p205/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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