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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0주년: 임시정부의 통합과 분열
07/11/20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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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후 세워진 여러 임시정부 중 추진주체가 밝혀진 세 곳은:

  • 1919.03.17: 노령정부라 불리는 연해주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
  • 1919.04.11: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 1919.04.23: 한성정부라 불리는 서울에 세워진 대조선공화국


<노령정부: 대한국민회의>

1919년 3월 17일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되었다.
연해주는 1850년대부터 한인이 모여들기 시작해 항일의병의 전초기지가 된 곳이다.


<상해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신한청년당은1918년에 창립해 3.1 운동 전후에 크게 활약한 청년독립운동단체다.
신한청년당의 당수는 여운형이었으며 1919년에 김구, 이광수 등이 가담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행정수반은 이승만이었다.


<한성정부: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는 인천 자유공원(당시 만국공원)에 위치했다.
다른 임시정부와 달리 1919년 4월 23일 24명의 13도 대표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한성정부의 초대 대통령(집정관 총재)은 이승만이었다.



1919년 9월 6일 상해에서 노령정부·상해임시정부·한성정부 통합이 시작됐다.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정부조직은 한성정부의 조직을 계승했다.
통합된 임시정부의 국호는 상해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을,
영문은 한성정부의 영문 국호인 Republic of Korea로 정했다.


통합교섭은 주로 노령정부와 상해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한성정부는 국민대회로 결성되고 국내에 위치했으므로
정통성이 가장 높았지만 현실적으로 잦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노령정부는 연해주 독립단체들의 독자 수립이라는 한계로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19년 9월 11일 단일 임시정부는 결국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때 임시정부 위치를 어디로 할지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러시아 연해주로 위치를 잡았다면 우리 역사가 어찌 되었을까 가슴이 서늘하다.
2차대전에서 함께 싸운 연합군은 전후(戰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해방 전후(前後) 건국과정과 건국된 모습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는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의
독립노선의 차이와 통치권의 부재로 처음부터 심각한 분열에 부딛혔다.
통치권의 부재는 임정의 지위를 여타 독립단체 수준으로 하락시켰다.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으로 갈라졌다.
민족주의 세력은 우로는 이승만/김구의 자유민주주의
좌로는 김원봉/김규식의 사회민주주의로 한결같지 않았다.

* 김구는 정치적 이념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훨씬 강했다.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임시정부는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1925년 쯤 임정은 불과 10여 명의 각료와 그들의 식솔로
구성된 독립운동가 단체로 격하되고 말았다.


임정을 끝까지 븥들고 회생시킨 사람은 김구였다.
그가 임정을 살리기 위해 취한 전략은 무력투쟁이었다.
최초의 성과는 1932년 천황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였다.
이 사건으로 임정은 중국인과 미국 교포사회로부터 큰 성원을 받게 되었다.


김구와 경쟁하던 김원봉은
1935년에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
좌파 민족주의 세력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통합했다.
그러자 김구는 같은 해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38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창설했다.
이에 맞서 김구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 살짝 요약

이승만/김구 김원봉/김규식
자유민주주의 (우파) 사회민주주의 (좌파)
한국국민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좌파 민족주의 통합에 큰 타격을 받은 임정은 1941년 좌우합작으로 돌아섰다.
1942년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뒤이어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도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좌파의 참여는 임정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혔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끝까지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본국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여러 독립단체를 결집하지 못함이 이유였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도 여러 분파로 갈등하였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에 반발하는
뉴욕/시카고/LA의 중국후원회는 조선의용대를 지원했다.
또 다른 세력은 이승만의 반소/빈공노선 대신 좌우연립정부를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독립운동은 공산혁명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요구했다.
이념적 동질성과 조직의 체계성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지속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정신이 강해서가 아니라
공산당 조직의 기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봉건왕조 신분제도에서 곧장 식민통치를 겪게된 우리 민족에게
계급소멸, 노동자가 주체, 공공소유라는 공산주의는 신세계요 유토피아였다.
순박한 우리 민족은 한없이 이런 환상에 빠져들어갔다.


우리뿐 아니라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겪었던 동아시아가 모두 그랬다.
공산주의의 허구를 간파하고 민족분단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건국부터 자유민주체제를 선택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에게 행운이었다.


이후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김구의 무장투쟁 노선,
이승만의 자유민주 노선과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은 첨예하게 부딛혔다.
김구의 무장투쟁 노선이 지역에 희망과 존재감을 주었다면
여러 국제회담에서 독립을 확답받은 건 이승만의 외교노선이었다.


* 주요 참고 서적: 이영훈 저 대한민국 역사 (p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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