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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연설문 II.
05/25/201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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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대학은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했습니다. 문제는 교복을 벗으니 입을 옷도 신을 신발도 없었습니다.

교복 치마에 이웃 언니의 쉐타를 빌려 입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있을리 만무였습니다. 그 때는 박정희 정권시절이라 곳곳에 공장들이 생기던 때였습니다. 공장에 일자리를 잡아 공순이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장일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 달을 채우고 그만두기를 여러번 번복했습니다. 한 달을 채워야

월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 월급으로 스커트를 샀습니다. 다음은 자켓을 다음은 구두를 이렇게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또 바뀌곤 했습니다. 그 때는 내가 민중인지도 몰랐습니다. SFTS에서 민중신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바로 민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 가족들에게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쌀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을 복학시키면서 몇 년을 지나니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가정의 보탬이 되었습니다.

동생들은 차츰 직장을 잡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큰 동생을 결혼시킬 때는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결혼비용을 마련했습니다. 그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기독교 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유명해지더니

신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교파를 초월한 교회는 물론 유치원을 비롯한

유아 교육계에서 나하나 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톡톡히 타기 시작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유명해지더니 우리 가족을 풍요하게 만들었고, 그 가운데서 대학생 넷과 신학대학원생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 몫을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대부분의 신학교 유아교육과에서는 나하나 교수가 쓴 책을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하나 교수가 바로 나의 곁에서 나의 Supporter가 되고 있습니다다음 동생은 목사의 아내로 잘 지내면서 선교사로 목회생활에 열심입니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7년이 지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형제들 중 나의 입지가 가장 초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명해지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뭐든지 배워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받아주는 데가 없어 학원을 찾아다녔습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더듬었습니다.

처음에는 성우학원, 속기학원, 속독학원, 펜글씨학원, 붓글씨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꽃꽂이학원, Video 촬영 학원 등 한국에 존재하는 학원은 모두 섭력했습니다. 그 와중에 붓글씨 전시회, 미술전시회, 꽃꽂이 전시회 등 잠시 잠깐의 인기를 누려가면서 더 유명해지는 길을 찾으며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력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는 내가 유명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산지가 오래되니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 때 내 나이는 40대가 되어 한국 사회에서는

직장도, 학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의 남편이 미군부대에 다니고 있어 그를 통해 미제2사단

사단교회 강단 꽃꽂이 직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하던 나는 꽃꽂이를 하면서 한마디씩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입지를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는 고아원 아이들을 위해 노래를 가르치고

주일 예배 때에 특별 찬양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군인과 한국 여인들과의 결혼을 위해

Pre-marriage Seminar를 담당하게 되었고, Education Coordinator, 그리고 성가대 지휘자로 바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사무실에서 일할 교회헌금 회계담당자로 일하게 되니 내가 하는 일이

다섯 가지나 되었습니다. 요일마다 다른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채플린들의 저를 평하는 이야기는

걷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Energetic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부대내에서 학생모집을 하는 광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미군들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그 때 Los Angeles Metropolitan College Overseas Program이었습니다. 군인이었으면 아무나 입학이 가능했지만 민간인은 영관급 추천이 필요했습니다. 군목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당장 Education Center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등록을 했습니다. 물론 작지 않은 등록금은 목사님의 수표로 우선 지불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졸업 17년 만에 대학교에 입학이 되었습니다. 3년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받은 학위는 AA Degree였습니다. 졸업식은 서울 Garden Hotel에서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 때는 조금 유명했습니다. 사단장을 비롯한 장교들, 23명의 교회 Chaplain들은 물론 한국을 다녀간 많은 군인들이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또 욕심이 났습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신학교 교수로 있는 동생에게 부탁했습니다. 혹 내가 갈 학교가 있지 않을까. 동생의 힘으로 필리핀 신학교 한국 분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2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신학교 한국 분교에 입학을 하고 2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분교만 3곳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졸업장들을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의 교육 여정은 하나도 전통적인 과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처음 유학 허가서를 받은 곳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시골 마을에 조그만 침례교 신학교였습니다. 3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엘에이로 오게 되었는데

장로교 노회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주 행운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Extension Program (SFTS/SC)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어 그 일을 제가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저는 무조건 그 프로그램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서류미비도 상관없이

강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출한 서류가

반려되었습니다. 이유는 내가 다닌 학교는 LA Metropolitan College를 빼고는 하나도 인정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년제 대학교 성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Unclassified Student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자격 미달인 신분으로 3년 가까이 열심히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강의료를 지불하고 강의를 들으며

학생 아닌 학생 노릇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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