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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문자명왕 - 나무위키
06/15/20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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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최근 수정 시각:


   금지소년의 여장남자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나운(금지소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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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자명왕(文咨明王) / 명치호왕(明治好王)
성씨
고(高)
나운(羅雲) / 개운(?雲) / 고운(高雲)
왕태자
고흥안(高興安)
왕자
고보연(高寶延)
공주
안학공주(安鶴公主)
생몰연도
음력
? ~ 519년
재위기간
음력
491년 12월 ~ 519년(28년)

1. 개요
2. 소개
3. 전성기
3.1. 최대 영토의 주인공?3.2. 불교 정책
4.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4.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
4.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
4.3. 외교
5.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고구려 왕조 제 21대 군주. 삼국사기 기록상으론 한국사 최초로 태손(太孫)으로서 성장하였다.

2. 소개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雲)', '고운(高雲)' 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개운은 나운의 변형으로 보이고,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을 나자를 빼고 두 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고구려 왕조의 공식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처럼 길었을 가능성이 큰데 문자명왕, 명치호왕 등의 명칭은 문자 명치 호태왕(文咨 明治 好太王) 같은 형식의 축약일지도 모른다.[1]

장수왕
의 아들인 고추대가[2][3]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 장수왕이 너무나 오래 산 나머지 아들이 먼저 죽어버려서(...) 손자인 나운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3. 전성기

교과서 등에서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문자명왕의 치세까지 유지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기록들을 보면 쇠퇴기에 접어드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며 전성기를 달리던 고구려의 6세기 중반 침체기의 시작을 문자명왕 말년부터라고 보기도 한다.

3.1. 최대 영토의 주인공?

일반적으로 문자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여 최대의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영양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6천리라는 기록[4]이 등장하여 1천 ~ 2천리 스케일에 묘사되던 이전 시대의 수배에 달하고 당서에 나오는 고구려의 영역이나 국경 역시 다소 확장되었기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5]

다만 이것에 대해 환빠, 유사역사학 등을 엮어서 폄훼하는 경우가 있는데 틀린 지적이다. 이인철 경복대학교 교수,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 윤병모 작가, 정원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는 고구려 동서 6천리는 대체적으로 거란과 말갈 방면으로서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 ~ 연해주 방면으로 보고 있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수 전쟁 이후 수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볼 때 동서 6천리는 수대 초반에 한하여 보인다. 고구려가 동서 3100리로 요하를 넘어 영주에 이른다는 기록은 양당서의 기록으로 당대로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윤용구, 윤병모는 동서 6천리와 뭉퉁그려서 거란, 말갈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6]

3.2. 불교 정책

을 좀 세우기는 했다. 이렇게 들으면 그냥 절 좀 세운 아저씨 같은데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4. 실패가 거듭된 대외 정책

4.1. 상실되는 주변국 통제력

물길에게 북쪽 변방이 쓸렸고, 거란등에 대한 통제가 점차 약해짐이 조공에서 드러난다. 특히 북위의 8대 황제인 세종[7]과의 대화를 보면 부여와 섭라가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그들이 생산하는 황금과 옥이 조공품목에서 빠졌다고 하자 이를 두고 세종이 "니네 구역은 너네가 잘 관리해야지."[8]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이는 광개토왕-장수왕대에 비해 주변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4.2. 지지부진한 남진정책

장수왕 재위 후반기의 남진 정책도 계승했다. 다만 장수왕의 후광에 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기록상 정작 한 것은 많지 않은 편이다.

500년 이전까지는 장수왕 시절부터 매년마다 신라를 연례 행사처럼 공격하더니 신라 지증왕이 즉위하는 500년부터는 갑자기 40여년간 신라와의 전쟁이 뚝 끊겨버리는데, 기록상 뭐라고 나오는 건 아니지만 뜬금없이 전쟁이 확 줄어버리는 게 암묵적이든 밀약이든 일종의 휴전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후 문자명왕은 신라보다는 백제 공격에만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 마저도 512년 9월 전쟁에서 무령왕에게 패배한 뒤로는 전쟁을 오랫동안 하지 않는다.

이때쯤 백제도 무령왕이라는 중흥 군주가 나타나서 1:1로도 버거워지기도 했고. 신라도 예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곤 했지만 진흥왕 이전까지는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521년 11월에 무령왕 본기에는 "백제가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고구려의 위세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

아래는 문자명왕 치세에 벌어진 고구려와 나제동맹간의 전투다.
  • 494년 7월 신라와의 살수 벌판에서 승리. 견아성 전투에서 백제의 지원군을 보고 퇴각.(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495년 8월 백제의 치양성 전투에서 신라의 원병에 의해 패배.(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신라 원군에 의해 궤멸(신라본기)
  • 496년 7월 신라 우산성 전투 패배.(고구려본기, 신라본기)
  • 497년 8월 신라 우산성 전투 승리.(고구려본기, 신라본기)
  • 502년 11월 백제의 침략. 전투결과는 불명.(고구려본기, 백제본기)
  • 503년 11월 백제의 수곡성 공격. 전투결과는 불명.(고구려본기)
  • 506년 11월 백제를 침공했으나 동장군으로 별다른 소득없이 퇴각.(고구려본기)
  • 507년 10월 백제 한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백제의 저항으로 퇴각.(고구려본기)
  • 512년 9월 백제의 가불, 원산을 무너트리고 포로를 데려옴.(고구려본기) / 고구려가 가불, 원산을 침공했으나 위천 북쪽에서 크게 물리쳤다.(백제본기)

이처럼 수차례 남쪽을 침공했지만 확실한 승리가 기록된 것은 497년 8월에 우산성을 함락한 것 하나 뿐이다. 고구려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말갈의 침공도 고구려의 계획이었다고 가정해도 506년 7월에 백제의 고목성에서 승리를 거둔 거 하나가 더 해질뿐이다.

4.3. 외교

북위와는 장수왕 대에 이어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허나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 북위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외에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고려 사신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일본과 "긍정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듯하다.
무인 백제가 작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사나노아히다(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안정(安定) 등이 따라와 내조(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일본서기. 514년 9월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문자명왕 본기
一年 문자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북위 효문제가 왕의 즉위를 축하하다
一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부여가 항복해오다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七年春一月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七年秋七月 금강사를 창건하다
七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오다
九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一年秋八月 농작물에 병충해가 발생하다
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다
十一年夏四月 양 고조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침입하다
十一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백제가 수곡성을 침략하다
十三年夏四月 사신이 북위를 방문하여 황제를 면담하다
十五年秋八月 사냥을 하다
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七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八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夏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秋九月 백제 가불· 원산 두 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二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조공 기록이 전체의 절반이다. 다만 이걸 가지고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자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린 건가요?' 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삼국 시대에는 외교 사절도 조공 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기 때문으로, 조공을 많이 바쳤다는 건 그만큼 외교에 적극적이었다는 뜻이 되고. 상위 항목에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북위와 친선 관계를 계속했다는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9]
[1]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시노하라 히로가타, 2004), 『고구려 태왕호의 제정과 국강형 왕릉입지의 성립』(여호규, 2010)
[2] 왕족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호칭으로 고구려가 졸본성-국내성의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성장하면서 합병한 세력들의 호칭들을 왕 아래에 일원화시키면서 등장했고 태자가 겸직했다. '태자'라는 공식 직위와는 또 별도로 붙는 타이틀로서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
[3] 고구려가 오부족 체제였을 때, 왕족인 계루부와 전왕족인 소노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장을 고추가라고 해서 별도의 조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루부의 최고 수장은 당연히 왕이니까, 정통 계승자가 고추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라의 갈문왕이나 백제의 길사와 같이 왕권 버금 세력의 흔적이다.
[4] 통전, 태평환우기 등
[5] 북한의 경우에는 이 기록을 역사 부도에 적극 반영하는 편이다.
[6]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 중에 월희주가 있는데 발해의 15부 중 회원부,안원부에 있던 월희말갈로 추정된다.
[7] 선무황제 원각(元恪). 499~515.
[8] 이는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인정해준 발언이다.
[9] 애초에 조공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기 보다는 동아시아 특유의 상호 무역 체제로 보는 것이 현 학계의 중론이다. 대대로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와 돌궐과 같은 유목 민족 역시 표면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역대 이민족의 국가들 역시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고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에는 말이 조공이지 상대적으로 대등한 취급을 하거나 아예 상전 노릇을 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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