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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를 말리며
01/30/20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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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마켓에 들렀더니 시퍼런 무청을 단 동치미 무 세일을 했다. 김장철이 한참 지났으므로 동치미 무를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청만 사도 그 가격대는 줘야할텐데 무 뿌리까지 딸려오니 웬 횡재람. 주저없이 한보따리를 샀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대폭세일 중인 무 덕에 철 지났건 말건 동치미를 한 단지 담았다. 무를 다듬으며 잘라둔 무청은 가지런히 담에 걸쳐 놓고 말렸다. 우기가 끝난 캘리포니아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니 날마다 햇살 눈부셨다. 서부로 이사온 뒤부터 볕이 하도 좋아 걸핏하면 냉장고에 든 버섯이며 하다못해 생강까지도 채를 썰어 말려두었다 쓰는 나로서야 당연했다.  


전에 뉴저지에서 살적 일이다. 시정어린 만추가 되면 때 놓치지 않고 해마다 갖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낙엽져 뒹구는 단풍잎이 아니라도 무엇이든 바싹 건조시키기 알맞은 날씨, 양광 투명하고 바람 소소한 날. 그즈음 한국이라면 농가 안 마당에 멍석 가득 태양초를 말리겠고 밭둑의 깻단은 저 혼자 톡톡 알갱이를 쏟고 있을 것이다. 무말랭이 호박고지도 썰어 말리고 들껫잎 부각도 바삭하게 말려두기 아주 좋은 절기가 된 것이다.


무가 제철을 맞은 늦가을. 서리맞은 무는 동삼이라 치켜세우는데 뿌리만이 아니라 무청도 아주 우수한 식품이다. 비타민 A는 당근의 열 배나 된다는 무청은 각종 비타민 공급원이자 칼슘과 철이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식이섬유의 함유율도 높다. 근자들어 항암 효과까지 알려졌는데 간암 억제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특히 통풍 잘되는 곳에서 자연건조시킨 무시래기는 무공해 웰빙 식품으로 대접받는 세월이다. 예전에는 정월대보름 나물로나 사용될 뿐 소여물에 썰어 던지며 허드레 취급을 당하던 시래기다. 시래기의 하대는 바닥이 없어 오죽하면 지지리 못사는 가난한 살림을 일컬어 시래기죽을 먹는다 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찾아먹는 자연건강식품의 하나다.


내가 갖는 연례행사란 바로 시래기 말리기. 인심 후덕한 요한 아저씨가 몇 년째 줄창 한국인이 운영하는 인근 농장에 가서 시퍼런 무청을 한아름 실어다 주곤 했다. 그걸 가게 뒤곁 송판 담장에 가지런히 걸쳐두고 하루하루 말라가며 변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데 그리스 사람인 랜드로드가 다가온다. 이게 대체 뭔고?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래기를 들춰보기도 한다. 이번엔 이탈리안인 피자집 아줌마가 넌지시 건너다본다. 수프감이라고 설명해준들 어림짐작도 못할 그녀다. 아이리쉬인 태닝샵 금발머리는 사진 찍는 나를 보며 하이~멋진 날씨야, 라며 엉뚱스레 하늘을 가리킨다. 그들이 시래기를 알 턱이 있나. 나야 그 곁에 서면 절로 고향을 회억하게도 되고 술술 생활시가 읊어지기도 하지만. 시래기가 다 시가 될 수 있다니 참 신통방통한 노릇이다. 


시래기. 흙으로 돌아가는 섭리 당분간 유예시키고 서릿바람에 내맡긴 영혼이다. 참으로 오롯한 순명이다. 참선수행 깊어질수록 그는 차츰 투명해진다. 마침내 그는 무여열반에 이르른다. 그렇게 우리도 빳빳한 오기며 짙푸른 결기 삭히고 삭혀야 한다. 순한 무채색 될 때까지, 한 줌 깃털만큼 가벼워질 때까지. 그렇게 우리도 비우고 비워야 한다. 삭히고 비워야 비로소 완성되는 너. 나임에야. 생각은 뻔해 말로는 쉬우나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옛적, 무서리 내리기 전 밭둑에서 주섬주섬 건져올린 김장철 버려진 무청이었다. 짚으로 엮음엮음 수더분히 엮여 길게 매달린채 어느 장소든 자리는 개의치 않았다. 굴뚝 옆 토담에서든 감나무 줄기에서든 지나는 바람과 두런두런 나누던 정담이야말로 오랜 세월 익혀온 고향의 초겨울 풍경이었다. 저만치 추수 끝난 빈 논에서는 참새 떼 부지런히 떨어진 낱알을 쪼고 있었다. 곧이어 눈발 구성지게 휘날려 초가지붕을 덮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아무래도 여전히 낯설기만 한 타관, 문화와 관습만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언어의 토양마저 영 다른 머나먼 이역 땅에 둥지 틀게 되었다. 안과 밖 경계 긋는 뒤란 팬스, 그 송판 담장에 걸터앉아 노옹(老翁)되어 즐기는 시래기의 볕바라기. 퇴락한 행색의 남루조차 한 폭 담채화 되는 이치야 허심히 놓아버린 애집(愛執) 그 수련 덕이리, 습(習)의 동아줄 툭 끊어버린 해탈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음이리. 아니면 계절병처럼 고질로 도지는 향수 자못 처연한 까닭인가.


더러 비도 맞아가며 어느 해인가는 소복히 눈모자를 쓴 적도 있지만 적당한 바람과 햇살에 잘 마른 시래기. 바스러지지 않게 착착 거두어 종이봉투에 쟁여 담아 둔다. 양질의 겨울 찬감을 갈무리한 흐뭇함은, 나락 가마니를 높직하니 쟁여놓은 듯 기분까지 넉넉하게 만든다. 식성이 순 한국토종인 나는 빡빡한 된장찌개나 우거지국을 끼니마다 질리지도 않고 즐긴다. 된장 풀고 땡초 쫑쫑 썰어넣어 얼큰하게 끓인 시래기 우거지국.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다셔진다. 캘리포니아 빛나는 정월 햇살 아래 무청은 지금 시래기로 알맞게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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