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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문
10/06/2015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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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172.xx.xx.124

 


 

그날도 오늘처럼 가랑비가 내렸다.

안개 깔리듯 가을비가 가야산 자락에 자욱하던 날. 성철 스님 다비식이 있었다.

한시대의 선지식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속에 인산인해를 이룬 작별 인파와

울긋불긋한 만장의 물결을 뒤로 하고 피안의 문에 드신 그 분.

수만 마디 법어 대신 몸소 보여주신 큰 법문, 放下着!

사리 수습도 말리신 그분이 남기신 것은 검정 고무신 한 켤레와 누더기 가사 한 벌이었다.


지금보다는 한층 철이 기운 만추. 인근 숲의 참나무들도 다비식을 올리는 듯 했다.

바람이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우수수 날리는 단풍잎들은 금빛 화염되어 숲을 휘감았다.

발치엔 이미 흥건하게 떨구어진 낙엽들이 수북했다.

법보 사찰 해인사의 맑은 정기가 배어서인지 샛노랑으로 선연히 타오르던 참나무 숲.

나무들이 치루는 자기 정리 의식은 처연스런 아름다움이었다.

소멸의 쓸쓸함이 아닌 생의 찬란한 반전과 마주쳤던 그날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은 비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한국시간으로 이른 아침, 부산의 친구와 긴 통화를 나눴다.

80년대 초, 박물관 동아리 행사로 경주 남산 불탑골을 답사하던 중에 만난 그녀.

등운곡 그윽한 자리에 숨겨져 있는 범어사 부도탑을 길 안내 받으며 그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열살 연상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우린 취향과 관심사가 비슷해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불자는 아니었지만 석탑에 낀 이끼 흔적과 고찰 법당의 문살조각 문양에 심취한 사진작가인 그녀.


새파란 후진들도 다투어 여는 사진전을 그녀는 줄곧 고사해 왔는데 얼마전 드디어 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간의 궤적을 정리하는 의미로 동시에 사진집 <돌의 향기>도 발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이젠 홀가분히 마침표 찍을 일만 남았다며 좋은 마무리가 허락되도록 기도해 달라던 그녀.

일찌감치 사후 장기기증은 약정해 놓았고 자녀들에게 樹木葬을 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한다.

 

왜 그리 급하세요, 어차피 저마다의 마감날은 오게 마련인데

그 문을 향해 걸어가는 길 서두를 게 뭐 있나요. 짐짓 눙을 쳤지만 사실 그 때는 누구도 모른다.

시작이 있은 즉 끝남 또한 당연하나 그 시간은 나와 상관없는 일인 양 짐짓 외면하려 할 뿐이다.

회피한다고 비켜질 일도 아니니 서서히 준비하며 정리하는 기간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오래 전, 들깻잎 내음 스민 낙안읍성 걸으며 혹은 달빛 속에 운주사 와불 찾아가며 나눴던 대화중에서였던까.

회귀에 관해서, 여정의 마무리에 대해서 화제 삼았던 적이 있다.

어린왕자가 보여준 사막에서의 마지막 시간과

자유로운 넋을 가진 새에게 육신을 보시하는 鳥葬이 히말라야 어디선가 행해진다는 얘기도 나눴다.

남도 어느 섬의 풍습이라는 草墳, 세월의 바람에 죽은 자를 맡긴다는 風葬도 얘기했다.


잠시 머무는 동안 우여곡절 겪으며 희노애락 속을 오가다 시절인연이 다하면 떠나야 하는 이 자리.

부처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너나없이 고해.

로마서에 나와 있듯 고통은 삶의 한부분인 것을.

이는 인간만의 해당사항이 아니라 하늘 아래 목숨받고 태어나 한뉘 살아내기란 결코 녹록치가 않다.

영화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보여준 바대로 저마다 생명은 존엄한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안쓰럽게도 고통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니.

 

그래서인가.

나이테 쌓여갈수록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깊어진다.

이승의 짐 벗고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안식의 문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일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끝맺음을 홀가분히, 라고 표현한 그녀.

대기업 전무를 역임한 남편과 명문대를 나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두 아들을 둔 유복한 여인이다.

객관적으로 평균 수준 이상의 행복의 조건을 갖춘 생애였지만 나름의 고뇌 고통이 그녀라고 없었을까.

오늘 문득, 성철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며 틀림없이 미소 지으셨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낙엽지며 들려주는 무언설법, 고개 숙여 뿌리짬을 둘러보게 하는 계절이다.


 

                                                                            


안식의 문, 무언설법, 방하착, 다비식,수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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