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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삽화
11/02/201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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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없는 시월에 안식처럼 내리는 낙엽. 발치에 노랗게 깔리기 시작하는 잎새들 다소곳 지켜보며 서있는 자애로운 어머니같은 은행나무를 가까이 보려고 용두산 공원 앞에서 차를 내렸다.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는 도심의 가로에 돌연 금빛 등불 밝혀 주는 은행나무. 시선 들자 청추(淸秋)의 드맑은 하늘 배경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은행잎 눈부시다. 그 놀라운 변신은 마치 새로이 개안해서 보는 첫세상처럼 황홀하다.


그것은 멀쩡한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공연히 흉금 뜨거워지고 부신 빛을 오래 바라보면 느끼는 아득한 현기증 같은 게 인다. 나이 걸맞지 않게 순수질박한 감동은 그러나 빙글빙글 돌듯한 혼곤에 빠지게 한다. 잠시 쉴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빌딩 숲 예서제서 손 이끄는 현란한 상가의 쇼윈도우. 발음조차 까다로운 외래어가 범람하는 한 가운데 홀연 눈에 띈 곳이 단청으로 장식된 <전승 공예전>안내판이다.


면면이 맥 이어온 우리 선대들의 얼을 만난다는 설레임. 허나 남루한 삶 속에 이어진 각고와 정진의 결실을 숙연한 마음없이 어이 대하랴. 고난과 인내의 어려운 과정을 묵묵히 견디며 손 마디가 굳고 손끝 무뎌지도록 갈고 닦은 기량들. 아니 단순한 기(技)에 앞서 한 가지에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예(藝)의 기질과 장인 정신이 아니더면 감내하지 못할 고행의 길을 걸어간 이들. 인간문화재나 공예작가로 대접받아도 그들은 여전히 소박한 장인이다. 그저 예나이제나 사투리 소탈한 채 하던 일 계속할 뿐인 외길인생.


입구 벽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작가 사진들은 한결같이 인정스런 이웃집 아재 같고 스스럼없는 사촌형제 얼굴과도 닮았다. 허심한 표정 지으며 '인생 뭐 있나. 살아보니 별 거 아니더군.' 한마디 툭 던질듯 하다. 느슨하고 푸근한 분위기와는 달리 막상 전시회장에 들어서 작품들과 상면하자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진다. 투박하고 거친 손길들에서 이리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탄생됐을까 싶을 정도다. 사진 촬영은 불허, 눈과 마음에 아로새겨두기로 한다.


제일 앞쪽의 청자. 고려청자가 지닌 비색을 재현하고자 기울인 혼신의 노력. 수없는 실의를 딛고 반복을 거듭한 집념 끝에 드디어 깊고도 오묘한 청자를 빚어 낸 도공의 긍지가 돋보인다. 그 옆자리 나전칠기는 섬세함의 극이었고 천지의 정(精)이 스몄다는 옥향로는 물에 젖은 양 파르스름 신비하다. 벽에 걸린 갖가지 탈. 삶의 애환과 해학이 깃든 표정들은 히죽샐죽 벙긋새침 저마다 개성 다른 하회탈 봉산탈이 재미있다. 하염없이 서 있는 키 큰 목장승, 우두커니 내다보는 동구 밖 풍경엔 해묵은 느릅나무 위 까치소리 얹혔을까.


코너를 도니 뎅그렁 여운 깊은 종의 허리쯤에 새겨진 비천상 부조가 가벼이 옷깃 나부낀다. 그 한 옆 섬세한 조각 품은 대나무화살꽂이(筍筒)에는 무사의 시퍼런 기개가 송죽처럼 강직하다. 풍년가를 구성지게 끌어낼 징이 있는가 하면 소슬한 달밤, 태평성대 구가하는 가락이라도 뽑아올릴 저(笛) 다소곳. 목공예부에 드니 보석함 면면에 사군자 아로새긴 소품은 사치스럽지가 않다. 그 옆자리엔 백동장식 깔끔한 삼층장, 용목으로 결맞춰 짠 옷장과 먹감나무 문갑이 눈길 묶는다. 거멍쇠 장식으로 단단히 맞춘 반닫이, 거북 모양 조각이 네 귀를 받친 경상은 또 얼마나 검소하던가.


아기자기한 자수와 매듭 앞에 이르러 내 발길은 한참도록 머문다. 고래로 청홍색이 백의(白衣)와 어우러져 장식에 즐겨 사용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은은하니 우아한 자연 색조를 더욱 아낀 선조들이다. 꼭두서니로 물들인 분홍, 치자의 부드러운 미색, 연두도 초록도 아닌 미묘한 녹두색, 고담한 품격의 대추색 황토색 등등. 화려한 원색보다 한결 매력적인 중간색이 빚는 환상의 세계, 한국의 전통색이라는 오방색(五方色)에 흠씬 빠진다. 결결이 고운 비단 색실로 수놓여진 신부 활옷에는 목단 나비 원앙이 앉을자리 가려 조화롭게 안배됐다. 호사스런 금사 테 두른 흉배엔 깃 활짝 편 백학 한쌍. 뿐 아니라 좌우대칭의 균형 이룬 매듭에 차랑히 내려진 술, 거기에 멋 더한 칠보 노리개며 은장도가 곁들여져 짐짓 욕심부리게 한다.
 
그 외에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많았다. 이를테면 넉넉한 백자 품도 예사롭지 않은 귀태를 간직했다. 격자창 맵시있게 꾸며진 초롱, 손잡이마저 대나무 무늬 조각 넣은 게 일품이고 괴목 서탁에 얹힌 옥 문진()은 또 어떤가. 연잎 위에 난죽 올라앉은 청개구리 부조 또렷한 남포 벼루는 정말이지 샘이 날 지경이었다. 그건 천상 내당 여인의 것이리. 스란치마에 깨끼저고리 받쳐입고 참빗질 곱게 한 규방여인이 묵향에 젖은 모습 아른거린다. 갖고 싶은 건 이처럼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눈을 감고 그중 반닫이 하나를 우리 집에 담싹 옮겨 본다. 꼭 형체가 따라야만 하는가. 잠시 잠깐 마음만으로 호사 누림에 만족하며 홀로 읊어 보는 율(律), 반닫이.

 

깊은 골 바람소리 물빛마저 시린 곳
올연히 지킨 일월(日月) 회한없이 부려 놓고
어느 날 무명의 장인(匠人) 그 먹줄을 받았더라.

 

천자문 외는 가락 물레 잣는 그림자
무시로 새김하며 손때 묻어 길든 윤기
달빛도 허물 모르고 흥건히 쉬다 갔지.

지금은 거실 한 켠 세월 잊고 짐짓 앉아
목향(木香) 추스려서 묵시하는 온고지정
변하는 풍속도 따라 인연마저 여윈 그대.

 

 

경탄과 선망 그리고 꿈같은 도취에서 깨어나니 왠지 허수하다. 계절 탓인가. 아무 것도 거둘게 없어 곳간 빈 채 거미줄뿐인 나의 늦가을이 보이는듯 하다. 무엇에 나는 열정을 바쳤던가. 전심전력 최선 다하고 몰입하여 전력투구한 기억이란 도통없다. 안이한 나날. 수월한 일상. 나를 일으켜 세운 주체라 고집한 글마저 실은 얕은 손장난에 불과한 삶의 편린일 뿐. 치열하게 투철하게 그러나 담담하고 꾸준히 무언가와 대좌하고 싶다. 그것이 생활이든 글이든 아니면 허튼 이상이든 물질이든. 찾아야 한다. 만나야 한다.


갑자기 급해지는 마음에 떠밀려 밖에 나오니 타임머신 갈아탄 듯 어리둥절해진다. 어느새 저물 무렵. 도심엔 활기찬 젊은이들의 물결이 흐르고 하나 둘 빛나기 시작하는 네온의 생기로운 반짝임. 낮과 또다른 모습의 화려한 부산야경을 준비하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노란빛 한잎 낙엽 내 어깨에 내린다. 마치 노을이 내리듯.

 


 

#은행나무 #용두산공원#시조#반닫이#전승공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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