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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201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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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초하루. 새벽같이 서둘러 집안일을 해 놓고 금정산행 버스를 탔다. 이마에는 물기 채 마르지 않은 머리 결 고르게 내린 채로.


정이월의 순결한 백색 공간. 미끄러운 길 조심스레 오르느라면 눈 속에서도 땀이 흘렀다. 손끝 에이는 듯한 정상의 설한풍도 잠시. 이어서 어김없이 오는 봄. 새순들이 풀기 시작하는 겨자색 연두 물감. 산수유 제비꽃도 바쁘게 피어났다. 달력 한장 넘기고 나면 이미 산은 눈부신 신록. 또 한 달이 지나면 무성한 녹음. 어느새 여름이었다. 챙 너른 모자 쓰고 그늘 골라 걸어도 줄줄이 흐르는 땀. 그러나 다시 달이 바뀌면 단풍 불붙고 소슬한 산길에 보랏빛 구절초 꽃무리. 이윽고 구름으로 내려 앉은 억새 덤불에 지는 낙엽. 짧아진 해, 숲은 완연한 겨울풍경으로 변했다. 


정직하게 지켜지는 묵약, 사계의 질서. 그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윤회의 고리에 나 또한 포함되어 다시금 돌게 될까. 동심원을 긋고 또 긋는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구조사이에서 자칫 빠지기 쉬운 타성. 그로 인한 권태. 군더더기로 삐걱대는 불협화음을 조율하기 위해선 윤활유가 필요할 터. 가령 금정산 행이 신성하고 경건한 종교적인 목적만이었다면 아마 나는 이미 진력을 냈을거라. 오직 기도처로서의 순례만이 아닌. 한 달에 한 번 나 자신을 환기시킬 수 있는 열린 창으로 금정산은 거기 존재했다. 나를 세척해내고 정화시키는 장소로서 알맞춤한 곳. 갇힌 채 갑갑하게 생활해온 나를 활짝 열고 청소할 수 있는 곳. 거기에서 정결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나만의 세례의식을 갖곤 했다. 그렇듯 금정산 행은 재충전을 위한 에너지원이며 기꺼운 도락이며 구원이었다. 더불어 무한한 자연, 무량한 시간과 나를 잇대 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내게는 또 하나의 창이 있었다. 생활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내 삶의 여유이며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의 여백에 쓰는 글. 수필은 바로 나의 열려진 창이었다. 처음부터 당차게 수필을 써보겠다고 작정하고 쓴 바는 물론 아니었다. 글과 인연 닿은 후 시, 시조 등을 내 나름으로 꾸준히는 써왔지만 어떤 형식에 구속됨 없이 일기 적듯 편지 쓰듯 한 낙서같은 글. 그런만치 사상누각의 염려도 없잖으나 하긴 창작이 문법이나 국문학 강의만으로 가능하던가. 한편으로는 아무런 기초도 닦여 있지 않음에 슬그머니 겁이 남도 사실이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으나 천성이 아둔하니 야물지 못한데다 평소에 게으른 나.


수필로 등단이란 과정을 밟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수필입문' 책을 접했다. 수필이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가 슬그머니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수필이 좋은 글이고 잘된 수필인가 싶었다. 이론으로 처음 수필 공부 비슷한 것을 하면서 나는 안개처럼 와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서정 수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아름다움의 바탕인 자연과의 교유도 이때 길 틔웠고 현실을 넘어선 환상의 세계에도 차츰 눈떠갔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피안의 세계를 꿈꿔 온 몽상이었던가. 소녀취향의 섬세함과 탐미주의적 눈부신 형용사의 범람. 화려한 미문에 빠져 알맹이는 갖출 겨를이 없었다. 지성의 결여 탓인가, 굳이 화장술로 덧 꾸미고자 함도 아니었는데 쓰고 보면 용장문이 되곤 하던 글. 한때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시선을 주었다. 그 관심은 불과 몇 편 만으로 한계점을 보였다. 복고 취미의 골동 냄새는 칙칙한 느낌이었고 결국 비슷비슷한 얘기의 되풀이임에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무수한 길이 있는 수필이 나는 편안해서 좋았다. 갈망의 연인이며 내 자유로운 향락 그 자체인 수필. 투철한 문학정신의 결여를 꼬집어도 나는 별반 개의치 않았다. 주제파악 옳게 못하고 대책없이 몰두해 문학에 미치기보다는 그 언저리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싶을 따름이었으니까. 수필이 설령 나를 먹여 살린다 해도 난 그에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편안하게 즐기고 싶을 뿐. 그렇듯 예술은 도취이며 열락이리라. 예술은 부담 아닌 놀이이며 멋이며 나이와 관계없는 낭만이리라.


문학 중에서도 그간 내가 탐닉해 온 수필. 수필은 바다이다. 얼마나 많은 형식의 글을 수용하는가. 내용에 있어 서정 서사 서경이 망라되고 논설문 기행문 일기문까지도 포함된다. 한량없이 가슴이 너른 수필. 반면 수필 한계의 모호성은 잡문도 허락하고 헤프게 개방된 문 안에는 국민학생 작문같은 글도 끼어 든다. 더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저명인사들의 교양 덕목쯤으로 인식되는 게 수필이다. 일테면 고상하니 운치있는 악세사리인 셈. 해서 수필은 조선조에 성행한 문인화 격이 된다. 양반 사대부나 선비유림들의 심심파적 여기였던 문인화. 기실 문인화로도 한 세계를 개척한 탄은 이정같은 어른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수필을 선비문학이라 한다. 더구나 근자같이 중수필이 요구되는 추세라면 응당 철학과 사색이 받침되는데다 학문을 깊이있게 천착한 학자나 교수만이 수필을 쓸밖에 없겠으나 꼭이 그렇지만은 않다. 본디 수필은 정의되길 소설로 쓴 시이며 시로 쓴 철학이라 하지 않던가. 말하자면 그 점은, 품격 무시하고 시시콜콜 늘어놓는 신변잡기 일변도나 허황한 서정의 탁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문예 사조는 아닐까 싶다.     

 

언제나 내 수필은 르노아르나 모네의 그림이면 좋겠다. 난해한 칸딘스키나 피카소도 아니고 18세기 고전파의 찍어 낸 듯한 화풍 역시 아니다. 몽환적이기조차한 르노아르도 그러하지만 빛에 심취한 모네의 밝은 캔버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환영을 어쩌지 못해 아침부터 일몰에 걸쳐 수면에 비친 빛의 변화를 그려 나간 '수련'은 그저 먼 이상일 뿐. 나의 수필은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분청이길 바랬다. 태 고운 청자나 백자보다는 쓰윽 휘두른 귀얄무뉘 하나로도 멋스런 풍류 간직한 분청이 되어 매화 저절로 꽃 피어나는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싶었다. 허나 그건 감히 신의 자리를 탐내는 외람된 욕심이었으니.


내가 쓰는 수필은 품위있는 상차림에 올려진 신선로가 못될 바엔 담백한 소찬의 산채무침 같은 향기를 지녔으면 한다. 겨우내 눈 속에서 움 키워 온 깊은 산골짝 취나물처럼 쌉쌀하면서도 향긋하니 독특한 맛을 내는 글. 그처럼 개성 짙은 글을 쓰고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닌 나만의 색과 향을 지니고 싶다. 쉽지는 않은 일이리라. 매달 수필이라 이름 붙여져 나오는 많고 많은 글 중에 눈에 번쩍 띄일만한 글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힘들고 아득한만치 나는 더욱 매력을 느낀다. 기왕이면 수필 속에서 치열하게 활활 불타보고 싶다. 뜨겁게 타고 또 타 마침내 재마저 다 타 버린들 어떠리. 그 가운데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 불새에 빛 부셔 하다 혼절해도 좋으리니.


나의 수필은 난이길 바라지 않는다. 학이길 원하지도 않는다. 수수한 이웃, 무간한 친구로 족하고 나아가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마냥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하다. 하여 혼이 담긴 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의 생명률이 담겨있는 글. 내 마음에 어지간히는 흡족스런 그런 수필 한편 빚고자 나는 자주 창가에서 서성이는 지도 모른다.  -89.1-


<마음만으로 열정만으로 또는 원한다하여 뭐든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한참 뒤에야 깨닫고는, 이후 그저그런 잡문에 만족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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