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bell
촌장(kubell)
한국 블로거

Blog Open 07.15.2012

전체     651990
오늘방문     346
오늘댓글     1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친구 새글 더보기
  달력
 
선홍빛 루비처럼
04/06/2017 15:13
조회  1190   |  추천   18   |  스크랩   0
IP 172.xx.xx.124




오래전 어떤 텔레비전 프로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사자성어를 알아맞히는 퀴즈프로의 출연진은 시골 노부부다. 할아버지에게 답을 먼저 보여준 다음 그 내용을 할머니가 알아듣도록 요령껏 설명해주어 제한된 시간 안에 사자성어를 맞히게끔 하면 된다. 
오십 년 이상을 해로하신 분들이니 서로 표정만 봐도 감이 올 거 같다.


답지를 쓰윽 훑어본 영감님은 '까짓, 이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빙긋 웃는 여유까지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한마디 건넨다. "임자하고 나하고 그런 사이 있잖여. 그걸 뭐라구 혀?" 척하면 삼천리, 이심전심 통하는 구석을 철썩같이 믿는 영감님이다. 그러나 약간 긴장한 할머니, 영감님을 건너다보며 뜬금없이 뭔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다. 도통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인지 뚱한 얼굴로 "그게 대체 뭐여?"오히려 반문한다. 

답답한 채 애가 탄 영감님이 던지는 제 2탄. "우리 두고 남들이 하는 말!" 그것도 모르냐는 듯 냅다 소리를 지른다. 봉건군주처럼 군림해 온 전력에다 구세대 남편의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내를 하인 다루듯 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수십 년에 걸쳐 단련된 터라 고까울 것도 없다는 듯 담담한 할머니. 오직 답을 파악한 것에만 신바람이 난 할머니가 위풍당당 받아친다. "아~ 원수!" 당황한 영감님이 손가락 넷을 좌악 펴들고는 "아니, 넉 자여, 네 글자라구!" 이번에야말로 할머니 큰소리로 호기롭게 외친다. "평생 웬수!" 정답은 천생연분이었다. 동상이몽의 극치요 진짜로 코메디가 따로 없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하소연 전화가 길고 길다. 직함뿐인 명예교수되어 은퇴한 남편이 집에 들앉아 하루 세끼를 꼬박 차려달라니 꼼짝없이 매이게 됐다는 그녀. 늘그막에 족쇄를 찬 신세가 되었노라는 한탄이 무진 이어진다. 좋게 말해 선비 타입의 골샌님 같은 조용한 성품에다 반생을 강단에 선 양반이라 책 읽는 취미 외엔 즐기는 도락이 있는 것도,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산행이니 낚시에 흥미를 붙여볼 생각도 전혀 없이 죽으나사나 그저 집구석밖에 모른다. 해서 그녀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게 갑갑해 미치겠다는 푸념이 늘어진다. 

젊어서부터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착실한 분이다. 한창때 남정네들 밖에서 주색에 빠져 아녀자들 속 무진 썩힐 그 무렵쯤. 그녀 남편은 가정적인 모범생 가장으로 친구들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던 착한 남자였다. 일요일이면 온 식구들이 함께 가까운 유원지로 나들이 가고, 방학이면 번번이 먼 고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참 부러운 생활을 하던 그들이었다. 헌데 세심한 성격은 이제 '쪼잔한' 남자가 되어 사소한 살림간섭 별걸 다 하는 피곤한 사람으로 격하되었다. 자녀들도 갈수록 잔소리꾼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기피하며 한심한 노인네로 치부해버린다. 그 흔한 동창회 모임조차 잘 끼지 않다보니 진작에 사회성 전무한 남자로 낙인찍혔다. 그렇게 점점 그는 소외된 아웃사이더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비온 뒤 길바닥에 가을 낙엽 들어붙듯 집에 들어붙어 있는 남자. 해서 평소 친구들과 어울려 찻집에서 수다떨고 연극도 보고 문화센터로 이것저것 배우러 쏘다니던 재미도 다 놓쳐버렸다고 그녀는 한숨을 푹 쉰다, 게다가 남편이 부쩍 몸에 좋다는 약 이것저것 챙기며 몸 위하는 것도, 또박또박 주는대로 밥그릇 비우는 것도, 웬 잠이 그리 퍼붓는지 누웠다 하면 바로 코를 고는 것도, 매사 하는 짓거리마다 다 밉상이란다. 이렇게 꼴 보기 싫어서야 정말이지 남은 인생 어찌 살꺼나 탄식하기에, 모두가 부러워 한 젊은 시절 얘기로 그녀를 위무하며 그래도 나이들수록 부부 밖에 없다는 뻔한 논리나 펴볼 밖에 없었다.

한때 일본에서 황혼이혼이 유행했다. 남편이 퇴직금을 받을 즈음 아내가 당당히 이혼을 선언하고, 자기 몫을 요구하며 재산분할 訴를 거는것이다. 평생을 나붓나붓 상냥하게 남편 시중이나 들며 자신의 꿈은 접어둔 채 가정을 돌본 주부들의 뒤늦은 반란이었다. 그간 가족위해 바친 희생의 시간들을 법이 책정한대로 가사노동비로 환산해 챙기고는 갈라서서 자유로이 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더랬다. 일생을 자기 주장 못 펴보고 남편 그늘에서 숨죽이고 산 여자들이 지난 삶에 넌더리를 내며 황혼에 이르러 과감히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럭저럭 결혼한 지 마흔 해가 되었다. 잘 견뎌내고 여태껏 살아온 내가 꽤나 대견스럽다. 어찌보면 나는 참 바보요 못난이, 뒤돌아보면 억울하단 생각도 든다. 오직 단 한 번 주어진 유한한 생인데 말이다. 파란만장까지는 아니어도 우여곡절도 많았던 여정, 굽이굽이 말 못할 사연들이 그 얼마인가. 피장파장,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거리하고 나설 만큼 후안무치인 남편은 아닐 것이다. 힘들게 시달리며 살아온 지난날로 인해 남달리 주름 깊은 얼굴, 무수히 그어진 굵고 가는 주름살이 지나온 인생역정을 말없이 증거한다. 아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데다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위인이 뒤늦게나마 신앙의 힘으로 많이 변화되었다. 이점 날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당신은 매우 훌륭한 동료였소. 정말 만족스러운 삶이었소. 좋고 또 좋았소.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소." 오십 여 성상을 해로하다가 드디어 죽음을 앞둔 남편이 아내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다. 헬렌 니어링이 쓴<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나온다. 결혼 45주년을 뜻하는 보석은 루비라고 한다. 루비처럼 맑은 홍옥빛으로 생이 아름답게 익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보며 다가올 금혼식을 기다려본다.                                                  -2016년 10-


 




천생연분과 평생웬수,결혼 45주년, 루비,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 블로그의 인기글

선홍빛 루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