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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흔적 여기도
03/22/202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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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에서 내려다 본 죽성마을과 동해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나아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고산 윤선도의 연시조 <어부사시사>를 모르는 이 없으리라.

보길도 부용정에서 만년을 보낸 고산은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최고봉에 오른 가인이다.

어지러운 현실을 초월해 자연과 교감나누며 아름다운 서정시를 엮어나간 그다.

그는 생애에서 16년간을 유배지라는 폐쇄된 공간에 머물었으나 갇혀있으되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다.

명문가 자손으로 편안한 생을 살 수 있었음에도 올곧은 지조로 최고권력의 실세들과 맞섰던 시대의 지성인.

여섯 살 때 임란이 발발했고 50대에 이르러 병자호란을 겪은 윤선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내야 했다.

그는 관직에 오르자마자 광해를 업고 권세를 휘두르며 비리를 일삼는 이이첨을 고발, 최고실세에 저항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된다.

그 상소문으로 하여 혈기방장한 서른의 윤선도는 최북단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고산은 이듬해인 1618년 광해군 9년 겨울에 동래부 기장현 죽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동해바닷가 기암괴석과 해송이 어우러져 자연경관 수려한 죽성마을에는 그 지명대로 곧게 자란 대나무가 흔하다.

죽성마을은 일찍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에 시달려온 터라 이미 조선초기 병영이 있었던 어촌이다.

멀지않은 곳에는 두모포진 성이 있어 병선 십수 척과 군사 8백여명이 상주하는 수군진영이었다. 

포구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구릉에 쌓아올린 왜성은 노략질 패거리들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조선백성을 징발해 축성하여 각지에서 걷어들인 양곡과 잡아온 도공들을 유치시켜놨다가 왜로 실어갔다. 

바로 그런 아픈 역사의 장소인 왜성 아래 유배를 온 고산은 바닷가 황학대(黃鶴臺)에 올라 파도소리 벗삼아 시름을 달래며 독서로 지샜다.

이곳에서 젊은 고산은 견회요(遣懷謠), 우후 (雨後謠) 등 보석같은 시 여섯 수를 남겼다.

틈틈이 뒷산에서 구한 약초로 가난한 민초들을 병마에서 건져주었기에 주민들은 그를 '한양에서 오신 의원님'으로 뫼셨다고. 

죽성리는 기장읍내에서 순한 산자락을 서너 차례 구비돌면 나타나는 해변 마을로 원죽, 두호, 월전 등 세 개의 자연부락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죽성리 왜성은 낮으막한 야산 위의 석성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돼 있다.

아직은 앙상한 나목 떨고 선 성터위로 무심한 구름장 흐르고 무너져 내린 바윗틈새엔 봄이 왔다고 진달래꽃 몇 송이.

석성 흘러내려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으나 조선시대 백성들처럼 쪼그린채 근처에서 햇나물 뜯는 사람들, 솜을 둔 백의 아닌 패딩자켓 잔등에 봄볕 다사로이 내린다.

바닷바람 맞으며 자란 쑥은 약쑥이라 알려졌기에 양지녘 마른 풀섶 사이에 돋아난 쑥을 뜯었는데 잠시만에 한 봉투를 채웠다.  

허리를 펴자 마주 건너다 보이는 바다쪽 구릉 독야청청한 죽성리 해송, 마치 장려한 분재를 연상시킨다. 

고산이 유배가 풀려 머물던 적소를 떠나자 바로 옆 야트막한 언덕에 고산의 푸른 기개를 그리듯 자라기 시작했다는 해송. 

400년 가까이 죽성 바다를 지켜온 기품있는 자태에서 마을 수호목의 위풍당당함이 넘쳐난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50호이자 보호수인 해송(곰솔)은 멀리서 보기엔 한그루 나무 같으나 다섯 그루가 모여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었다.

소나무 사이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國樹堂)이라는 작은 당집이 자리했다.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목(神木)으로 여겨져 온 나무 사이에 당집이 있는 경우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칩거의 너울을 벗고 긴 터널 나서서 간만에 갈맷길따라 걸으며 대여섯 시간 흔쾌한 시간을 즐겼다.


왜성 오르는 산길



 

왜성 위의 나목도 봄눈 틔우고

무너진 성터에 피어난 진달래꽃

봄나물을 뜯는 마을사람들

죽성마을 성터 위 대나무숲 해풍에 잔뜩 쏠리고



죽성리 해송

청청한 해송 솔방울도 야무치다


신목 사이 신당

수호목 언덕에서 내려다 본 아랫마을, 맨끝에 죽성성당과 등대

황학이 나는듯 했다는 해변가 갯바위마다 황토색



드라마 세트장으로 지었다는 죽성성당, 지금은 전시실이다


고산 당시의 예전 황학대는 바위섬이으나 앞바다 매립해서 현재는 뭍,

주위에 전깃줄, 팬스 등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도저히 사진에 담을 수 없어 구글에서 옮김 




보약도 아님시롱 재탕이지만 심심풀이 땅콩 삼아서리.......

 

먼빛이 더욱 좋다


  그리던 섬이 하나 있었다. 다도해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의 속성, 이를테면 척박한 생존의 터 혹은 특이한 풍습이나 민속으로서가 아닌 수준 높은 문학의 향기를 간직한 그곳. 부용동이란 이름에 연유함인가, 일종의 초월지로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섬 보길도. 시조문학의 백미라는 산중신곡이며 어부사시사에 그려진 자연과 사계의 아름다움으로하여 가슴에 오래 품어온 보길도다.

 

  주춤거리는 짙은 해무로 땅끝마을에서의 승선이 두어 시간 지연됐으나 늦게나마 뱃길 틔워줌이 고맙다. 벼르고 벼른 보길도 행이 무산되는가 애 태웠는데 다행히도 하늘이 깨어나고 물빛은 푸르게 되살아났다. 점점이 스치는 섬들은 저마다 빼어난 자태다. 파도는 순하고 날씨는 쾌청. 노화도에서 다시 갈아 탄 철선은 지척의 보길도에 금방 데려다 주었다.

 

  선착장에서 우측 안내도 따라 십여 분 달렸을까. 보길 초등학교 생울타리와 이어진 세연지에 드디어 닿았다. 사진으로 누차 상면한 바 있는 전경인지라 낯설지 않은, 연못이 있는 정원. 제가끔 알맞게 자리한 수석과 송죽 더불어 동백과 느릅이 짙푸른 그늘 드리우고 자귀나무는 부채춤사위 같은 꽃이 한창이다. 밤하늘로 마실간 달빛을 청하면 오우가의 벗은 다 불러 앉힌 자리에 지금은 터만 남은 낙서재(樂書齋), 곡수당(曲水堂). 서너 송이 수련 오연한 회수담에 온갖 물풀이 빡빡한 세연지는 선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 환경이 그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였다. 여기가 바로 고산 문학의 산실이다 싶으니 자못 동계마저 심해진다. 몸과 마음을 맡긴 자연 속에 스스럼없이 동화되고 도취되어 서정어린 절창을 연달아 토해낸 곳. 그는 고적한 만년을 풍류로 달래며 세상 부귀영화는 짐짓 외면하려 했을까.

 

  앞서 들린 해남 연동의 윤선도 유적지에서 살펴 본 고산의 자취를 되짚어 본다. 알렉산드르 뒤마의 생가에는 친필 원고가 색 바랜 채 남아 있다고 들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책상이 아직껏 정정히 보관돼 있다는 걸 부러워한 적이 있는데 삼백 육십 년 전 고산의 육필과 만난 감격이라니.

 

  그곳 유물 전시관에는 산중신곡 친필가첩(親筆歌帖)외에 나라에서 하사한 물목을 적은 은사첩(恩賜帖), 몇종의 교지와 노비문서 등이 보존돼 있었다. 선조 20년에 태어나 스물 다섯 나이에 이미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고산. 이후 봉평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지낸 반면,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세 번의 귀양살이를 겪는 등 영욕이 점철된 파란의 생애를 보낸다. 

 

  시대가 부르면 나아가 임금을 보필하고 시운이 버리면 물러나 산촌에 은거한 전통 유교사회의 선비였던 윤선도. 그는 가사문학뿐 아니라 지리와 의약에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 양산 죽성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할 당시는 근동에 의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한다. 병자호란에 패해 왕이 강화로 파천하자 고향 젊은이들과 노복 모아 인조를 호위하고자 강화도로 가다가 왕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세상을 버리기로 작정, 제주로 향하던 도중 보길도에 머물었다는 그. 절망과 고뇌로 얼룩진 세간사로부터 영원히 떠날 수 있는 은둔처이자 구원처로 부용동을 택함이었으리.

 

  원래 보길도는 섬 전체가 호남 명문 거족인 해남 윤씨 영지였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선민신분에다 가진 자로 위치한 때문인가. 고산이 요즈음 의외의 수난을 겪었다는 소문이다. 일부 편향된 의식을 가진 과격 학생들이 세연지에서 이른바 규탄 시위를 벌였다는 것. 못을 파서 바위 쌓고 나무 심는 등 정원을 조경하는데 많은 아랫사람들이 노역에 부림을 당했을테니, 말하자면 지배 계급의 부당한 서민 노동력 착취라는 등식이다. 즉 양반 사대부의 풍류놀음을 위해 애꿎은 서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혹사시킨데 대한 지탄이었던 셈. 화염병과 그물차가 나오는, 해묵어 식상한 화제의 변형판이다.

 

  그 말을 들으며 동시에 떠오른 것은 문화혁명 당시 봉건 잔재의 반동으로 몰려 사천성 성도(成都)의 두보 초당이 훼손 당할 뻔 했다는 기사였다. 인민은 한 칸의 집을 짓고자 피와 땀을 쏟아 수고하는데 거저 얻은 초당에서 유유자적 시나 읊으며 산 시인을 성토했다는 홍위병. 미관말직에 머물며 한 뉘를 가난과 병고로 고달프게 지낸 두보가 아닌가. 시성(詩聖)으로 추앙받지만 평생을 각고면려한 두보. 평민 시인의 종(宗)이기도 한 그조차 돌맹이 맞는 시국이라면 그건 미친 군중의 사회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밋 앞에서도 전제군주의 독재와 횡포를 새삼 시비할 사람들의 한심한 작태만 같다. 유사 이래 어느 시대없이 신분의 차등은 어떤 형식으로든 있어 왔다. 특히 유교가 지배한 조선 조에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윤리관이 의식의 근간이었고 상하 계급관념이 뚜렷했던 시대다.

 

  뛰어난 시가 작품을 남긴 국문학의 거봉이자 왕에게 바른 말로 간하는 강직한 지조와 충절의 올곧은 선비였던 고산. 반면 세연정에 앉아 기녀들로 하여금 회수담 내 무도암에 올라 춤추게 하거나 연밥을 따게 하며 물에 비친 은밀스런 속 그림자를 완상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저간의 사정은 호란의 뒤끝 어수선한 난세였음에도, 연못에 배 띄우고 도연히 술잔 기울이며 음풍영월로 소일했음이 오늘의 젊은이를 격앙시켰을까.

 

  뿐 아니라 어부사시사는 어부들의 노동요이나 어로의 즐거움을 체험하고 읊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층이었던 고산이 거친 파도와 싸우는 어민의 참 모습을 그려낸다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어촌의 아름다운 주변 경개에 투영된 사대부의 정서일 따름이므로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지만 현실을 창조 내지는 개조하지 않는다고 한 플라톤도 있지 않은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어찌 꽃만이랴. 먼빛이 더욱 좋기로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높직이 올려 놓고 범부와는 근본과 격이 다르다는 식으로 윤색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실상, 허물과 치부까지를 보여줌으로 나름대로 이해 해석하고 평가는 각자의 척도에 준함이 마땅치 않을런지. 비록 교과서나 전기에서 만난 고산의 위상이 다소 손상되는 면도 있었으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오히려 인간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 자기자신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초인이나 성자의 경지를 은연중 그들로부터 요구하는 심리의 근저는 무엇인가. 누구든 성인화 혹은 신격화하여 재구성하지 않는 다음에야 두루 완벽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에야.

 

  번다한 생각 접고 바다로 나서니 해풍에 염천이 다시 고개 숙인다. 멀어져 가는 보길도 역시 먼빛일 때 더욱 좋고 상상 속에서가 한결 운치있는 섬이었다.                                   - 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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