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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을 만나게 해 준 토정선생
04/03/2019 23:01
조회  564   |  추천   14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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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생의 6대손인 토정 이지함 선생(1517~1578), 보령 청라면 장산리에서 수원판관 이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지함은 박연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리웠던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하여 뭇 경전에 통달하였으며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학, 지리에도 해박했다.

명철한 학자이자 문인이며 기인이었던 그는 마포 용강동 토정로에 흙으로 언덕을 쌓아 정사를 세우 스스로 토정이라

이름짓고는 남루한 차림으로 민초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 

선조 6년에 율곡 이이의 천거로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다.

그는 '나는 잡곡밥에 나물반찬 한가지면 족하다,'며 검소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선조에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안건을 상소했으나 묵살되자 다시 토정의 생활로 돌아갔다.

몇년이 지나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부임한 후 민생문제를 직접 챙겼다.

그때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의 걸인과 노약자 구호에 힘쓰기도 했다.

이렇듯 서민의 시름을 달래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게 다독인 따뜻한 인품 때문인가.

정초가 되면 한해 운을 보려고 슬며시 찾는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선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토정비결을 지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1666년(숙종12)? 보령 화암서원에 배향되었고,1713년(숙종39)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61년(영조37)에 문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보령 가는 길,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고속도로 옆으로 당진태안 화학공단의 어마무지한 규모가 저 멀리로 보였다.

순천만에서도 못 본 갯펄이 보령 인근엔 질펀하게 깔려있었고, 편안한 고향길 같은 도로변의 시골 봄 풍경은 정스러웠다.

토정 이지함 유택이 자리한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舟橋面)고정리.

묘소는 한산(韓山) 이씨 천성공파 선산 한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정표가 눈길을 끌기에 차를주차장에서 올려다보니 낮은 산허리여러 묘가 둥실둥실 모여 있었다.

위에 올라가 보아야 어디가 토정선생의 묘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잔디 곱게 입혀진 능선을 타고 올라 보니 토정선생의 부모 묘와 3 형제 내외의 묘와 자식과 조카들의 묘
등 14기의 묘가 같이 모여 있었다( 충남문화재자료 제320호).

용이 아로새겨진 화강암 비석이 선 묘소가 토정선생 유택인 줄 알았는데 그 뒷편 오른쪽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보령 앞바다가 한눈에 좍 들어오는 위치이며 묘 앞쪽에 안산으로 삼은 섬은 송학도(松鶴島)라 한다.

원래는 여기도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시켜 지금은 뭍이 되었다는데, 양지바른 잔디밭에 고개 숙인 할미꽃이

보일듯말듯한 미소로 먼데서 온 낯선 객을 맞았.

자주빛 조바위 쓴 할미꽃에 눈 맞추고 몇 십년만인지 모를 조우에 감격해마지 않았더니 소나무 숲 진달래도 손짓을 보냈다.

일렁대는 봄바람 아직은 차도 봄햇살은 아주 다사로와, 금잔디 위에 앉아있으면 깜빡 잠이라도 올 것같이 포근한 장소였다.

이지함의 삼형제가 모친 상을 당하여 조부(祖父)의 묘부터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한눈에 알아냈다고 했던가.

생전에 미리 터를 정해 놓은 이곳에 이지함은 형제들과 혈족이 함께 모인 가족묘를 조성하게 되었. 

헌데 이 터 묘를 쓰면 당대에 당상관(정삼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이 둘이나 나올 명당이지만 막내아들인 토정에겐

도무지 좋지 않은 자리였다
비록 자신에게는 안 좋을지라도 삼형제 중 누군가의 후손에게서 정승 판서가 배출되는 명당이라니.

토정선생은 여기에 묘를 쓰게되고 명당자리의 효과가 있었던지 과연 당대에 두명의 정승이 배출된다.
큰형의 아들 산해(山海, 1539-1609)는 영의정에 오르고, 둘째형의 아들 산보(山甫, 1539-1594)는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가

되어 1품 정승의 반열에 오른다.
반면 토정선생의 네 아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돌림병으로 죽고 차남은 범에 물려 죽는

흉사를 당했다고 한다.
토정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기 시신의 좌향(坐向)을 앞에 보이는 송학도의 삼태 안산에 맞추지 말고 멀찌감치 좌측 바다 건너에 보이는 산에 맞추라고 하였다.

애당초 자신에게 안 좋은 텃자리였음도 개의치 않은 분이니 액막이는 아닐테고 풍수상 무슨 깊은 뜻이 있었을까 싶다.

이지함의 묘는 봉분 둘레 10m, 높이 1.6m로 묘소에는 비석과 문석인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진 비석은 직사각형의 대좌와 비신이 있다.

비신은 높이 132㎝, 너비 52㎝, 두께 17.8㎝이며, 전면에는 ‘土亭先生李公之墓 恭人完山李氏俯左’라 음각되어 있다. 

유언대로 비문은 간략하고 문석인은 치장이 거의 없이 매우 검소하다.

토정선생은 운명하기 앞서 유언하기를 "내 무덤을 쓸 때에 입관(入棺)이 끝나면 흙을 한자만 덮은 다음에 이 글을 돌비석에

새겨 그 위에 놓은 다음 봉분을 하라." 일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토정선생의 오대손(五代孫)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산을 둘러 보았다. 

천문지리와 역학에 대가였던 토정선생의 묘가 '살'은 피했지만 풍수에 완벽히 들어맞는 조건은 아니었다.

"선조의 무덤이 이렇게 잘못 쓰여 있으니 우리 가문이 크게 발복을 못하는구나" 하고 토정 선생의 묘를 이장고자 했다.

파묘를 하자 비석이 먼저 나오는데 거기 적혀있길 '훗날 내 오대 손이 이곳에 부임하여 내 무덤을 여기까지 파다가 도로 묻을

것이다.' 라는 구절을 보고는 황급히 되덮었다고 한다.

우주철리를 꿰뚫은 토정선생인데 천기누설이 두려워서인가, 조선 나아가 대한민국의 명운도 미리 밝혀주시지

여기까지만 예언했을까?



보령가는 길에 토정선생을 생각하다 / 중봉 조헌


큰어른 모시고 먼길 다닐 때

사는 날까지 조심하라는 말씀

오늘 다시 왔지만 만날 수 조차 없네

딱하다 백성들 살필 방법 누가 후에 말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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