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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낙선재
11/17/20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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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보물은 꽁꽁 싸매뒀다가 맨 나중에 구경시킨다 하오. 그만큼 꺼내놓기 아까운 곳, 그럼에도 널리 알리고 싶은 곳이 낙선재(樂善齋)이외다. 자태 빼어나기로 두루 소문난 비원도 우아하지만 건축물과 자연환경의 어우러짐에 있어 단연 최고는 낙선재라 개인적으로 꼽고 있소이다. 시크릿 가든이라 불릴만큼 품섶마다 비경 간직한 창덕궁 후원은 어디라도 매혹적이라오. 특히 낙선재 단아한 건물에 어우러진 조촐한듯 화려한 뒷뜰은 묻힌 사연이 애틋해서인지 소슬하면서도 퍽 아름답더이다. 사랑의 기쁨은 잠시였사랑의 슬픔은 오래 그것도 아주 영원이듯 긴, 아마도 모두들.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고궁으로 볼거리도 많은 창덕궁. 원래는 비원에 갈 생각이었는데 거기까지 갈 짬도 없이 궁안 초입에 있는 낙선재에 마음을 몽땅 빼았겨 버렸다오. 단청이 없어서인지 궁밖 사대부 양반가처럼 기품있으면서 소박한 낙선재는 우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묘한 그 무엇이 있었소. 글쎄올시다. 기와지붕의 운치일지 기둥마다 아롱진 구름무늬일지 거북이 새겨진 꽃담이나 한지 정갈한 창호문이 주는 정겨움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아주 아늑하게 해주었다오. 아, 어쩌면 한옥 목재가 풍기는 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소이다. 


그러나 낙선재야말로 초기부터 비련의 장소였으며 근세에 이르러서는 스러진 왕조의 비애가 담긴 곳 아니더이까. “첫 눈에 반한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았소.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고백했던 헌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순화궁 경빈 김씨. 임금 이전 이환이란 남정네의 여자였던 경빈이라오. 허나 사랑하는 여인과 길이 즐거움을 누리리, 이름지은 장락문(長樂門)이 무색하게 그 사랑은 6백일만에 막을 내린다오. 스물 셋 젊디젊은 나이에 헌종이 요절하므로 불꽃같이 찬연한 사랑도 끝이 나고 말았던 거외다. 그런가하면 구한말 비운의 왕세자비였던 이방자 여사와 경혜옹주가 병든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거처로 삼았던 곳도 낙선재가 아니오. 


순조임금에게는 문효세자와 어려서 죽은 대군 외의 아들이 없었다오. 왕가인들 예외없어 인간사 어이 순탄하기만 하리오. 예기치 않게 동궁이 일찍 세상을 뜨자 장자상속의 원칙대로 선조는 죽은 아들 대신 어린 손자를 왕세손으로 삼아 곁에서 보살핀다오. 그러나 할비마마조차 손자 겨우 여덟 살에 눈을 감고 말았소이다. 정사를 도맡아 보기엔 너무 어린 고작 여덟 살 나이에 즉위한 헌종. 하여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들어간다오. 사족이지만, 대왕대비 김씨가 승하하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습디다.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뜨자 대원군과 사전모의 하여 대원군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입양시켜 고종으로 옹립하며 안동김씨를 밀치고 풍양조씨 세력을 심는다오. 


열 살이 되던 해 대례를 치룬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배필로 맞으나 왕비는 한점 혈육 남기지 못하고 열 여섯에 운명하고 말았소. 다시 계비 감을 찾게되는데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절차를 밟아 최종 세 명이 남게 되었소. 이때 전례를 깨고 임금이 직접 간택장을 찾았다 하오. 이미 지존의 자리에서 절대권력을 누려본 임금, 스스로 왕비를 고르겠다는데 누가 감히 말리리까. 그 자리에서 헌종의 눈을 사로잡은 한 여인이 있었으나 간택되기는 효정왕후 홍씨였다오. 열 일곱 임금은 이때 열 세 살 소저에게 마음이 기울고 만다오. 첫눈에 반한 여인을 못 잊어하던 헌종은 결국 그 여인을 불러들여 경빈으로 책봉했. 그리하여 섬광같이 빛나는 격정의 순간들 그 활홀경에서 노니나, 결과적으로 이는 헌종의 명을 재촉하는 게지도 모를 일이오.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임금이면서 조선조 임금 중 가장 잘생긴 미남인데다 목소리 우렁찼다는 헌종. 최고 존엄의 위치에서 헌헌장부로 물 오른 한창때인 왕에게 세상 거칠 것이 뭬 있겠소. 그는 서재 겸 사랑채같은 휴식 공간으로 1847년 낙선재를 짓는다오. 그 이듬해 연달아 후궁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의 처소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를 같은 울안에 만들었소이다. 왕비가 머무는 대조전은 아예 들지 않았다니 가뜩이나 손이 귀한 판에 대를 이을 왕손을 어찌 만들꼬, 응당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거 아니겠소. 저녁만 되면 왕은 뒷마루로 이어진 석복헌으로 건너가 정분 뜨겁게 나눴다하오. 조선 궁중에서 그 어느 여인보다 더 지극한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여인 경빈. 그렇듯 낙선재 자체는 처음부터 경빈을 위한 건축물. 어느 궁중여인이 궐 안에 정자가 있는 후원까지 딸린 전각을 상감으로부터 선물받았으리오. 


석복헌 옆에 자리한 수강재는 건강히 오래 사시라는 축원이 담긴 순원왕후의 처소. 사랑하는 여인 거처를 보다 더 지척거리에두고 싶은 심정이야 말하나마나 당연한 것이리. 다만 수강재에 이르면 헌종 흉중에는 아마도, 연인의 보호막 삼아 막강한 실세인 할미마마를 바로 곁에 모셨던 건 아닐까 싶소. 외척들 득세속에 왕권마저 흔들릴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국, 권력의 속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헌종이라오. 그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질려 국정개혁을 시도하려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오. 하여 정사 잊고 낙선재에 파묻혀 님과 함께 천년만년 살고지고, 했건만 조급히 서둘러 가느라 개혁은 고사하고 후사도 잇지못하고 만다오. 훗날 철종이 되는 강화도령의 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이고 더 훗날 고종의 할아버지되는 남연군 곧 대원군의 아버지 또한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먼 종친일 뿐이라오. 이처럼 종당엔 종묘사직에 중죄인이 되고 만 헌종. 아니 그보다, 죽어서라도 곁에 두고 싶은 안타까운 연인을 남겨두고 그는 어찌 눈을 감았을꼬.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람들은 유언이라는 걸 남긴다오. 왕실이 아닌 일반 가정의 경우, 재산 분배에 관한 것도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장례치뤄 어디에 안장해다오, 당부의 말을 남기는 유언. 그러나 사후의 일은 남은 자들 소관사. 눈 감고 나면 그만, 본인은 정작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돼있다오. 정녕 그런가 보오. 낙선재 후원에서 떨리는 손길로 쓸어안던 그 여인, 죽어서도 손 놓고 싶지 않은 그 여인은 가뭇없이 멀어지고 법도따라 왕비 둘이 곁을 지키는 헌종의 유택 경릉(景陵). 죽어서 곁을 허락받은 계비, 살아생전 지아비의 눈길 한번 차지하지 못한 그녀의 한은 또 어쩌리오. 지금도 경릉은 삼연릉으로 한 언덕에 봉분 세 기(基)가 나란히 조성돼 있다 하오만 효정왕후에겐 심기 불편한 자리일지도. 한편 경빈은 서삼릉 안의 귀인 묘역에 홀로 누워 한자락 봄꿈같은 옛사랑 되새기며 무상한 인생임을 탄하지 않을까 모르겠소 



낙선재, 창덕궁, 헌종, 경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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