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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세월의 강 건너기
06/26/20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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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설렁설렁 바람스치시원한 뒷마당에 나와 앉아서 언니와 긴 통화를 나눴다.

얘기 끝에 언니가 며칠전 숙환으로 세상을 뜬 현회아저씨 소식을 전했다.

현회아저씨는 작은 할아버지의 서자, 그러니까 촌수로는 당숙이다.

동시에 현회에미로 불리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현회에미는 작은 할아버지의 첩실이다.

따지자면 작은 할머니뻘인데 다들 그렇게 부르고 그리 통하니 나까지도 현회에미라고 했다.

물론 듣는데서는 어린 소견이라도 어물쩡 얼버무리며 넘어갔지만.

매방리 선산 아래 너른 전답 거느린 지주였던 작은 할아버지.

지주 영감님 첩으로 들어와 아들딸 오남매를 두었건만 현회에미네 집은 풍채 의젓한 본가에서 저 아래로

건너다보이는 개울 건너 산자락에 붙은 초가삼칸 옴팡집(오막살이)이었다.

뒤란에 층층 화단도 곱던 안채, 사랑채, 행랑채에 곳간이 여럿인 대궐같은 큰집 놔두고 작은 할아버지는

밤이면 개울 건너 누추한 집으로 향했을까, 아니면 삼경 지나 사랑대문 열어놓겠다 했을까. 

대체 그 좁아터진 집에서 어떻게 올망졸망 다섯씩이나 애를 낳았을까, 식구가 불어나면 하다못해 방칸이라도 늘려줄

일이지 왜 줄창 옹색한 살림을 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작은 할아버지는 그녀를 애첩으로 귀애하기보다 천첩으로 치부했던지 평소 현회에미라 부르며 드러내놓고 홀대했다.

그래서일까 집안식구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면전에서만 작은 댁이라 불렀지 돌아서면 키득대며 현회에미 흉을 봤다.

법없이도 살 분같이 착하고 점잖은 큰당숙은 공주사범을 나와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그 당숙조차도 아버지의 소실을

현회에미라 호칭했으니 거의 보편적인 별호였던 셈이다. 


작은 눈에 몸집 왜소한 여인네, 다만 창에 능한 기생 출신이라는 것과 무슨 연유에서인지 대문 이빨 하나를 금니로 해넣은 것 빼고는 어디 하나 눈에 띄는 구석없는 촌아낙이었다.

그에 반해 큰댁 할머니는 시원스레 키 크고 인물 훤한 마나님으로, 곳간 열쇠 거머쥐고 전체 살림을 주관했다.

단 하나뿐인 외아들이 일찍 장가 들어 어머니 한을 풀어드릴 양인지 줄줄이 아들 삼형제를 낳아 부러운 것도 없었다.

응당 반가의 아녀자는 삼종지도를 따라야 했으며 칠거지악에 매여 남정네의 오입질도 눈감아야 했지만, 할머니는 행랑머슴

스리는 건 물론이고 현회에미까지도 하는 양이 못마땅하면 아랫것 나무라듯 호령하며 부렸다.

집안 대소사 때도 그러하지만 현회에미는 생모임에도 딸들 혼사조차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뒷설거지나 거들곤 했다. 

잔치는 큰댁에서 치러지게 마련이라, 마당에 차일 드높이 쳐지면 오리 안고 오는 새신랑 큰절도 큰어머니가 받았다.

젊어 한때는 시조창 즐기는 풍류객이었다지만 연세들수록 거의 존재감 없이 사신 할아버지는 제사때나 안채로 들어와 지방

쓸 먹을 갈며 헛기침 연방 해댈 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버젓이 두집 살림을 하는 작은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고을 양반이자 선비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에헴~하면서 점잖빼고 살았으니 그때만해도 기가차게 어수룩한 세월이었던가 보다.

작은 할아버지는 항시 사랑채 언저리에서 은거하듯 지내셨다.

행랑채보다도 내당에서는 더 떨어진 위치였다.

그래도 큰당숙모는 어른께서 기침한 기척을 용케 듣고는 세숫물을 대령시켰으며 이어서 정갈한 아침상이 건너갔다.

화로 찾아놓을 철이 되면 반듯하게 개켜진 솜옷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죽부인 먼지 닦을 즈음이면  빳빳한 모시 두루마기도

함께 사랑채로 올려졌다.


현회아저씨는 옴팡집에서 위로 누나 둘을 둔 다음에 태어난 그 할머니의 장남이다.

내리 딸만 낳아 한껏 주눅들었던 첩실 위상을 공고히 받쳐준 신통방통한 아들이기도 했다.

어미를 빼닮아 풍신 작고 오종종한 몰골이지만 큰댁 형님 뒤를 따라 공주사범을 나온 덕에 그럴싸한 당숙모를 맞을 수 있었다.

그게 현회에미로서는 너무도 기꺼웠기에 며느리가 해온 예단을 걸치지도 못하고 대견한 눈으로 매양 쓸어보기만 했다던가. 

시집 가기 전, 셋이나 되는 당고모들은 다큰 처자이면서도 우리가 다니러가면 아이들처럼 반기며 살갑게 맞아주었다.

어린 우리는 근엄하고 분위기 묵직한 큰댁보다 당고모와 어울려 놀 수 있는 작은집이 만만해서 좋았다.

중학교만 마치고 빈둥거리던 셋째 당고모는 특히 더 정이 많아 언제나 버선발로 쫒아나와 따사로이 우리를 맞곤 했다.

그 당고모는 덜 익은 풋밀에 햇송진 섞어 껌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길섶에서 지랑풀을 뽑아 풀각시 인형도 만들어줬다.

여름이면 산골짝 말간 시내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주었으며 가을엔 감가지 휘어잡아 탐스런 홍시를 골라서 따주었다.

둘째 당고모는 광석 라디오를 안고다니며 유행가를 간드러지게 따라불렀는데, 그마저도 현회에미의 근본을 상기시키는

촉매제 노릇을 하였다.

암튼 우리는 저물도록 놀다가도 잘때가 되면 꼭 큰집으로 가, 작은 할머니 곁에서 잠을 자는 게 불문율이었다.

누구의 명인지 모르지만 밤 늦어도 당고모들이 호롱을 밝혀들고 앞장서서 큰댁으로 우릴 데려다 주었다.

잠 자리가 비좁은 까닭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잠은 제자리 찾아가서 자야한다는, 무조건 그래야 된다는 걸 알았다. 

왜냐하면 거긴 근처에만 있어도 옮는 몹쓸 전염병균같은 존재 하나가 어둠처럼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막내인 창회아저씨는 조무래기적부터 온갖 말썽 일삼는 문제아로, 눈에 띌적마다 할아버지는 쯧쯧 혀만 찼다. 

평생을 그는 패륜으로 지새워 끝끝내 어미 살아생전 지옥의 불구덩이를 맛보게 한 원수같은 자식이었다. 

촌수로 따져도 위요 나이도 한참 윗질로 우린 당질간이건만 모두를 은근히 아래사람처럼 낮잡아 보았던 것은, 현회에미의

내력과 출신에 더해 사람노릇 못하는 막되먹은 그들의 막내동생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을 터다.

인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차별한다는 건 죄가 된다는 걸 진작 알았다해도 아마 당시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오래전 마포에서 만난 중년의 당고모가 술 마시고 푸념하듯 내뱉던 말이 생각난다.

난 살아오면서 큰댁오빠가 젤로 부러웠고 너희들도 무진무진 부러웠단다.

철들고부터 첩소생이라는 게 뱀껍질처럼 어찌나 싫었던지.....

누군들 원해서 그리 태어난 것도 아니건만 태생에 따른 천출 컴플렉스로 기 못펴고 그늘지게 살아야 했으니, 이제 생각해보면

당고모들의 딱한 운명이 짠해진다.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일제치하의 모진 수탈을 견디고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거친 다음, 육이오 동란의 뒤끝 산하가 완전 쑥대밭되고만 피폐한 시대상황이었던 당시.

민초로 태어난 나약한 여인들이 시대의 거친 물줄기를 건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별로 많지 않았다.

병자호란때 청군에게 십만이나 끌려갔다 후일 귀향해 환향녀가 된, 나중엔 화냥년으로 불린 여인 수난사처럼

전쟁 와중이나 그 후유증으로 가장 참혹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녀자들.

그들 처지에서보면 한목숨 부지해 험난한 세월을 살려니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기생이 되고 첩실로 풀릴 수 밖에

없었을지도.

풍요가 넘쳐나 시급이 1만원을 넘는다는 요즘같은 세상에야 상상이 될지 모르겠으나 60년대까지만 해도 식모는 무보수였다.

가난한 집에 식구수 많으면 입 하나 줄이기 위해 자식을 남의 집으로 보내야 했던 시절이니까.

험하고 거친 세월의 강을 건너야 했던 그녀들 삶의 방식은 이처럼 고되고도 비루했다. 

죄라면 어려운 시대에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 많은 현회에미들에게 연민을 느낄만큼 나 이제는 나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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