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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醉鄕)
02/25/20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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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醉鄕)

 

꿈에 나비가 된 莊周. 그러나 삶도 또 하나의 꿈. 무차별의 입장에서 보면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되어 있는 지 알 수 없을지니. 어느 경계에 나 서있는 지는 여전히 알지 못하나 어쨌든 꿈이 아닌 현실에서 올 한해 나는 행복한 나비였다. 꽃의 극진한 영접을 받은 행복한 나비였다. 개화의 벅찬 순간을 숨죽여 참아오다 내가 그 앞에 서면 일제히 봉오리를 여는 꽃들. 황홀한 비경을 단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려는 곡진함이라니.

 

찰나보다 조금 길까. 봄꽃의 한 생은 아쉽도록 짧다. 절정의 순간은 잠시, 그 아름다움을 때맞추어 본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이른 봄부터 연달아 그 축복이 내게 찾아왔다. 나래짓 가벼이 훨훨,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자유로운 유영. 제주의 유채꽃 잔치에 이어서 춘정에 겨워겨워 산기슭마다 불을 지르는 화왕산 진달래도 만났다. 봄은 아실랑거리며 연신 화신을 띄웠다. 이번엔 산수유꽃이 손짓했다. 산동마을 가는 길. 한창 꽃철이라 일부러 평일을 골랐다. 하동 지나 구례에 이르는 길목, 미리 마중나와 눈웃음 짓는 건 매화였다.

 

섬진강변 마을마다 눈 내리듯 피어난 매화. 차창가로 건너 마을 매화향이 스칠듯말듯 은근스러웠다. 한 필 무명 풀어 나부낌같은 강바람에 녹아 스민 매화 암향. 빛깔로 치면 은은한 청미색일까. 소리라면 남도창의 휘어감도는 여운같은 암향이다. 매화에 취해 나른해진 봄날 오후. 술기운이 돌듯 마디마디가 녹작지근히 풀리는 기분이다. 저절로 감기는 눈길. 부드러이 이완되는 심신. 한지에 먹물 스미듯 서서히 번지는 취기. 무심의 경지이듯 한없이 아늑하다. 마치 흔들리는 요람 속의 아기인 양, 아니면 따끈한 욕조에 전신 파묻은 양.

 

덜커덩. 이윽고 차가 멎은 고샅길의 끄트머리, 산수유꽃으로 휘덮여있는 산동마을이다. 온데 범벅인 부드러운 겨자색. 그윽한 취기랄까, 연연한 파스텔 톤의 온유함으로 품안 가득 스미는 옐로우. 남불의 해바라기 밭, 유화로 펼쳐진 그 현요한 진노랑과는 사뭇 격이 다르다. 소박함 속에 기품이 있고 부드러운듯 오연한 빛의 갈피마다에 은밀스런 유혹이 숨겨져있다. 배경도 선명한 푸르디푸른 하늘, 간밤 봄비가 고산지대에선 눈이 되어 마을 뒤 노고단은 백설의 보관을 쓰고 있다. 몽환이듯 펼쳐지는 풍경, 아예 숨이 탁 막히는 아름다움이다.

 

그 봄이 가고 절기는 어느새 하지를 넘겨 폭염 이글대는 여름의 복판. 염천의 열기로 정수리 따가운 한낮, 서출지 연꽃과 목백일홍꽃을 보러 경주에 갔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꽃구경이다. 수수하니 호젓한 書出池. 그래도 간직된 전설만은 대단한 곳이다. 고목둥치 비스듬 휘늘어진 배롱나무마다 구애의 몸짓이듯 하르르 진분홍 꽃잎을 연못가에 띄우고 있다.

 

정자 안에 들어 연꽃 향기 흐르는 창가에 앉아 학창의도 단아한 신라인의 정취를 되새김해 본다. 누정 아래 다소곳한 연꽃 낭자하다. 범속의 오탁을 멀리한 청정심으로 떠오르는 꽃, 연화는 공경스레 떠받든 정화수 그릇이다. 벙그는 꽃잎조차, 여민 옷깃 천천히 풀리는 초야의 신부인냥 조신한 자태다. 앉은자리 옮기는 실잠자리 기척에 긴 꽃대 위 연분홍 치마가 떨려온다. 그 미세한 파동에도 일렁이는 물너울. 바람결이듯이 홀연 숨어드는 나비. 정절의 빗장 깊이 지른 꽃잎 속으로. 찰나의 사랑에 씨방은 비밀스레 섭리를 품는다. 이 세상 어느 한가지인들 예사로운 만남이 있으랴. 우연이라니, 당치도 않다. 예비된 하늘의 뜻에 따른 그래, 必緣이자 宿緣의 운명적인 만남인 것을.

 

저만치 부려두고 온 누항사가 피안에서 바라보는 此岸의 낯섬으로 아득히 멀어진다. 끊임없는 자유에의 갈증으로 나는 늘 숨이 찼다. 자유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라는 관계의 고리에 얽혀 한 발자국도 비켜서지 못하게 하는 질긴 인연의 굴레. 그마저 부담일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여 모반을 꾀하듯 꿈꾸는 일탈. 이따금 백일몽에 빠지므로 혹은 이처럼 여행길에 나서므로 의식은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유리될 수가 있음이니. 하늘을 날 수가 있음이니. 자아를 벗고 봉숭아 꾳씨처럼 껍질 밖으로 튕겨나와 펼치는 한자락 신명 굿판.

 

저마다 사는 일이란 게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하여 고슴도치처럼 가시 세우고 무장한 채라 어깨는 긴장으로 늘 뻐근하다. 위치며 격식도 지켜야 한다. 질서며 도덕률도 거스를 수 없는 일. 얼마쯤은 포장되고 각색되어 연출시키는 나 아닌 나. 더러는 가면을 덮어쓰기도 한다. 원치 않아도 한번씩은.

 

아직도 가을 들녘 쑥부쟁이 꽃이며 겨울산 일천 미터 고지에서 날 기다릴 눈꽃이 있으니 이쯤에서 나비의 유영을 접을까. 어스름 깃드는 고속도로변, 꽃잎 터지는 소리 들리는 달맞이꽃이 인불처럼 피어있는 강가를 지나며 문득 조용히 울고도 싶다. 취기가 지나쳐 도통 아무 생각도 없다. 아니 멍하다. 나는 존재하되 지금 부재중이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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