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bell
촌장(kubell)
한국 블로거

Blog Open 07.15.2012

전체     603388
오늘방문     6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친구 새글 더보기
  달력
 
천년 미소 그리고 보원사지
11/10/2018 11:00
조회  1052   |  추천   13   |  스크랩   0
IP 104.xx.xx.204



데쟈뷰현상인가, 산길 오르는데 이 길을 오래전 언젠가 꼭 걸어본 것처럼 낯설지 않아 기묘한 느낌이 들더이다.

전혀 와본적 없는 초행길인데 말이외다. 아마도 언제고 한번은 필히 가보리라 하며 오래 벼뤄와서 그런가 싶소이다.

서산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을 뵈오러 가는 길, 고향에서 아주 가까운 지척거리이건만 어찌된 노릇인지 소풍 한번 가본적 없이 내동 마음으로만 그리던 곳이외다.

천년의 미소로 알려진 운산 마애삼존불은 6세기 말엽에 조성된 석불로 당시 중앙 정치상황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하더이다.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뺏기자 중국과 가장 가까운 태안반도 당진나루를 통해 해상으로 문물교류를 하게 된 백제.

해서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마애삼존불을 만들고 인근에 보원사도 지었다하오.
마애삼존불은 1959년 4월 비로소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게 되는데 여기엔 이런 이바구가 깔려 있오이다.

당시 부여박물관 홍사준관장이 보원사지 유물조사차 용현마을에 왔다가, 한 나뭇꾼으로부터 가야산 동편 검댕이골 바위에

세 분 신선이 웃고 계신다는 말을 듣게 된다오.  

그 즉시 답사에 나서서 삼존불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를 중앙 국보고적보존위원회에 알려 조사와 연구를 거친 다음 1962년

국보 제84호로 지정했다 하더이다.

차도에서 산기슭로 접어드는 다리 건너 언덕길 한참 올라 절같은 관리사무소 휘돈 다음 불이문을 지나, 높다랗게 쌓아올린

축대가 보이면 가파른 돌계단 이어지고 저만치 소나무 사이로 암벽이 드러나더이다.

천년하고도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애 삼존불이 새겨진 커다란 절벽 앞에 마주섰소이다. 

백제의 미소, 신비로운 미소인 고졸(古拙)한 미소를 머금은 세 분 부처님이 손 내밀어 반겨주더이다.

설마 천여년을 기다린 분이 기다림에 지쳐 자리 뜨실리야 없을 터, 중앙은 현세불을 의미하는 석가여래 입상, 왼쪽은 과거불을 뜻하는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은 미래불을 나타내는 미륵반가사유상이라 전해들었던 바 그대로였소.

화강암 암벽은 앞으로 좀 기운 자세였고 꼭대기에 얹힌 바위가 처마역할을 해준다지만 하도 무거워 보이는데다 균열도 심해

낙석 위험 문제로 삼존불 안위가 염려도 되더이다.(문화재청이 어련히 알아서 대처할까만)

그 옛절 어느 장인이 외딴 산속 골짜기 바위에 크나큰 원을 세우고 부처님 모실 적에, 하염없는 끌질 소리 메아리로 되울렸을 산간엔 가을빛 더불어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였소. 

망치와 정으로 새긴 온화한 미소가 유순한 아이같아 귀엽기조차 한 삼존불은 그러나 왜 이제야 왔느냐 토라져버리신듯 표정

무덤덤하더이다.

그만한 일로 부처님이 삐치실 리야 만무하고, 햇빛 비치는 각도에 따라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는 표정 달라진다는 얘길 듣고도 온데 돌아다니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건너편 산마루로 해가 막 넘어가려던 찰나였던거외다.

대신 우리 외엔 근처에 아무도 없어 한참을 삼존불 앞에 서서 온기 도는 바위 쓰다듬으며 기원 하나 슬몃 얹어 놓았다오.

하늘이시여, 온유하고 자애롭고 신비로이 해맑은 저 미소 닮은 삶 부디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사이다.



건네주시지 않으매 받을 수 없던 천년의 미소 마애삼존불에 작별인사하고 내려와 가까이 있는 보원사지를 찾아갔더이다.

보원사지 전체가 대한민국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곳으로, 사역 내에서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므로 창건 시기를 한층더 거슬러 올라가 백제 때로 추정케 하는 중요 유적지로서 주목받게된 곳이기도 하외다.

신라인 고운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대찰 보원사가 언급된 걸로 미루어봐도 그러하고, 특히 975년에 이미 대찰로 자리잡혔기에 왕사인 법인국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비문이 있는걸로도 창건시기가 고려 이전임을 증명한다오. 

일신라시대 화엄10찰 중 한곳으로 지정되었던 보원사는 조선 중기 폐사되었다는데 일설에는 가야산 자락에 99암자 거느린 큰절이 보원사로서, 왕자의 난을 겪 후 조정에서 정책상 세자 외의 왕자들을 각기 지방 대찰로 분산시켜 거주케했다하오.

그중 기상 걸출한 한 왕자가 보원사에서 암암리에 자기세력을 확장해나간다는 상소문에 놀란 나머지 가야산에 있는 사찰 모두를 일시에 불살라버렸다는.... 

더구나 가야산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요 통로가 되었던 태안 당진과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했는데, 그 일대에 퍼져있던 수많은 암자를 거느린 보원사였으니 그 화를 어이 그냥 넘길 리 있으리오.

왜 사라졌는지 한줄기 설화같은 '썰'만 남아있을 따름인 오래전 사찰 흔적을 찾아 어스름 녘에 드넓어 더욱 황량스런 보원사지로 들어갔더이다.

길도 없는 길을 내며 저만치 석탑 하나 목표 삼아 걸어들어가자 잡초마저 시들어가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우뚝 선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석양 속에서 묵묵히 맞아주었소.

멧새들도 깃을 찾아 스며든 저물녘이라서인지 황성옛터 노랫말만큼이나 참으로 처연스런 분위기였소이다.

한 때 천여명의 사부대중이 머물었다는 당대 최고 사찰 중 하나였던 보원사가 어찌 이토록 퇴락하다못해 거의 소멸됐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정확히 아는 이 또한 있을리 만무하오이다.

보원사지 감싼 산기슭 고목나무나 빈터에 피고지는 들꽃 씨앗의 먼 조상이나 보원사의 흥망성쇠를 보았으리다. 

지금 그 터에는 각각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과 당간지주, 석조(돌을 파 만든 큰 그릇으로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음), 그리고 고려 광종 때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 스님의 탑비만이 산에 바짝 붙어 겨우 살아남아 있더이다.

일제강점기 때 출토됐던 고려 철불좌상과 철조여래좌상은 그나마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나 대사찰의 숱한 유물 그 얼마나 허망히 흩어졌을지 헤아리노라니, 점차 짙어가는 이내빛 속에 윤곽 도드라진 석탑 더욱 허심할 뿐이었소이다.

저만치 보원사 복원불사 발원세워 기도하는 가건물 주위에 깨어지고 이지러진 기왓장만 수북 쌓여, 어둠살 내리는 빈터를 홀로 건너다보고 있어 소회 한층 쓸쓸하였다오.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옮김>


마애 삼존불, 백제의 미소, 천년의 미소, 고졸한 미소, 서산 용현리,보원사지,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이 블로그의 인기글

천년 미소 그리고 보원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