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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다음은 영광
10/29/20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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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요셉 신학교 경내>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44-1 배론성지( 舟論聖地,The Holy Place of Baron) 가는 길.

치악산 동남기슭, 내륙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제천은 초행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로 갈아타고 다시 지방도로를 내처 달렸답니다. 

그러고도 한참토록 산속으로 빨려들어갔지요. 심산유곡이라더니 긴긴 계곡은 끝없이 이어지더군요.

끝도 없는 것 같았어요, 숨어살기 안성맞춤으로 어찌나 골짜기가 깊었던지요.

먼길 운전하시는 형부께 골짝길이 계속 이어지니 미안키도 하고 언니와 성지순례를 시켜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었어요. 

추수기에 접어든 농촌마을 논배미 나락 묵직히 출렁거리고, 노오라니 모과 익어 가을 향기 사방으로 번져갈 즈음 당도한 배론.

길가 은행나무 단풍나무가 물색 고운 옷으로 단장하기 시작했고 청량히 스치는 바람은 코스모스 대를 소소히 흔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교우촌이 형성된이며 최초의 신학당 터이자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곳이고 두번째 한인신부 최양업 토마스의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 어디 그뿐인가요. 장주기 요셉성인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가 기거했던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인정받아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 기념물 118호로 지정됐고, 제천 10경 가운데

하나인 배론성지는 소속교구가 의외로 원주교구랍다.

배론은 골짜기가 배의 밑바닥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고 성지에 세워진 대성당은 전체 형상이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했어요.

또 한곳 배론성지 낮은 언덕에 자리한 도미니칸 봉쇄수녀원, 난생 처음 봉쇄수녀원에 들러서인지 아주 인상 깊었답니다.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꽃송이들이 창 너머 저쪽에서 치는 올갠 소리가 들려왔는데 햇살 고즈넉히 내려앉는 시월 아침같이

투명히 맑은 성가였습니다. 


                                                                                                                         <배론 대성당>


조선 천주교는 1791년 신해사옥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요.

병자호란 뒤끝인 인조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시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하며 전해받은 천주교 서적을 갖고 와, 당시 실학자들 사이에 읽혀졌으나 천주학은 종교가 아닌 어디까지나 학문으로 수용됐었지요.

이처럼 정조 15년 (1791년) 조선왕조실록에 서학이 처음 등장하였지만 이미 백년 전 17세기 초부터 그 싹을 내렸답니다.

조선사회는 성리학 체제를 기반으로 운영됐으므로 그 잣대대로라면 당연 서학 사상은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이라,조정에서는 무조건 사학(邪學)으로 규정해버리고 말았구요.

불행하게도 시대적 배경이 정조 임금끝으로 세도정치가 어지러이 득세하며 파벌간 암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데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려 천주교는 피로 얼룩진 처절한 고난의 시대를 지나야 했습니다.

한국 가톨릭 역사는 따라서 선교가 아닌 순교의 역사라 불릴 만큼 초기 100년은 박해로 점철됩니다.

하여 그 옛날 교우들은 집권층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간이나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만 했답니다.

신해박해 이후 이처럼 각처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해온 첫 교우촌이 바로 배론이구요.

감시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서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데, 바로 황사영 백서(帛書)로 인해서인데요.

황사영이 옹기 토굴에서 호롱불에 의지해 명주 자락에다 작은 글씨로 촘촘히 쓴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신, 그것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대책을 적은 밀서였던 겁니다.

황사영은 무력을 빌려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며 한편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었으니, 그는 조선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어린 갈등을 하며 목숨 건 모반길에 나서야만 했지요.

황사영 알렉시오는 진사시에 16세 나이로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손을 잡고 크게 등용할 것이라 약조하며 계속 학문에 정진토록 배려해 정약종의 문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들은 그는 세례를 받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간신히 서울을 벗어나 배론으로 숨어듭니다.

배론의 옹기장이 김귀동의 도움으로 옹기가마 옆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만들어 7개월간 은거하며 탄원서를 쓰게됩니다.

북경에 전달되기 전 백서가 발각되며 황사영은 27세 나이에 능지처참의 중형을 받게 되는데요.

그의 어머니와 아내도 거제와 제주로 유배되는데 뱃사공에게 간청해 어린 아들만은 노비신세가 안되도록 외딴 추자도에

떨구고 갑니다.

아들 장래를 위해 모진 결심을 한 황사영의 처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맏딸로, 험한 귀양처에서도 비록

노비가 됐지만 사대부 가문의 아녀자로서의 품격이 돋보였다 합니다.    

의금부 창고에 있던 백서 원본은 1894년 뒤늦게 빛을 보았으며 지금은 바디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배론 양지바른 동산에 안장된 최양업 토마스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사제가 된 분이지요.

부친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모친은 순교자인 이성례 마리아로 부모님의 열절한 신앙을 이어받아 신학생으로 선발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납니다.

1849년 중국 상해에서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귀국 후, 12년 동안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활동에 헌신하다가 1861년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쓰러져 선종하였답니다.

해서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일컫기도 합니다.

당시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신학교가 있던 배론에서 엄숙히 장례를 치르고 양지바른 뒷산에 최신부를 안장하게 되지요.

주교는 최양업신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정,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판단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구원에 이끌기 위한 노력을 다했습니다." 라고 했지요.

최신부는 외인 신부가 접근키 어려운 4천여 신자들이 살고 있는 전국 각처의 100여 개 공소를 맡아 사목하면서 몸소 가난, 순종, 인내의 삶을 증거하였고 교우들 속에서 기쁨과 어려움을 나누며 살았다고 하네요.

또한 교리서와 천주 가사(선종가, 공심판가, 사심판가)의 한글 번역 등 저술을 많이 남겼다고 하는군요.


배론은 이 땅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교육과정에 따른 학교가 개설된 곳인데요.

1855년 사제양성을 위해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을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 메스트로가 설립했지요.

교우회장인 장주기의 세칸짜리 초가집에 세워진 신학당에서는 학생 몇 명에게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가 학생들에게 라틴어, 신학, 수사학, 철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요셉 신학교로 명명된 이 학교에는 설립 직후 6명, 1859년에 7명, 1863년에는10명으로 늘어나 성직자 양성의 결실이 눈앞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출발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가 순교하였답니다.

장주기 회장은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었고 신학생이었던 김 사도요한, 유 안드레아, 권요한 등도 순교했다네요.

그후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사람들이 흩어지며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만다는군요.

순교자 장주기회장은 1984년 내한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한국 천주교 박해사를 간단히 요약합니다.


신유박해(1801년)=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탄압이랍니다. 신유박해는 천주교도 박해와 더불어 남인세력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도 띄고 있었다고 봅니다.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구요. 주문모는 새남터에서 목 베어 군문에 매달던 형벌을 받았고 정약종 황사영 참수, 이가환 권철신 옥사,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시키지요 . 이때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를 당했다 합니다. 신유박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인들에게 가한 대규모 탄압이었다. 

기해박해(1839년)=제2차 천주교박해로 기해사옥이라고도 하며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면은 세도정치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지요. 남인 세력은 정조를 도와 주요한 여러 개혁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반면 노론인 벽파는 노비제도, 토지제도 개혁 등 정조의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답니다. 정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나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장악, 시파인 남인 세력을 제거하려는 안동 김씨가 일으킨 사건으로 가장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요. 특히 사도세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인 대왕대비는 조정을 완벽하게 벽파로 채워넣었답니다. 

병오박해(1846년)=헌종 12년 6월 5일부터 9월 20일까지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는 25세에 처형당하였답니다. 당시 교회에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는데 김 신부는 심한 문초에도 내부사정을 발설치 않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큰 희생없이 박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대건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돼 사형이 선고됐지요.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언도받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됩니다. 순교의 길은 앞서 예수님 가신 길처럼 고통에 이어 영광이 기다리는 길이었습니다.

병인박해(1866년)=조선조 말기인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를 철저히 배척한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인이었답니다. 병인박해는 가혹함과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고 합니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었는데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 12명중 9명이 죽고 국내신자 8000여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병인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보복원정을 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봉쇄수녀원 성당>

<배론성지 입구>

<대성당 앞에서 하나뿐인 언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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