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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뮤지엄의 유월
06/18/2018 06:00
조회  1323   |  추천   17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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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없이 남의 손에 국가의 명운을 맡긴채로 한치 앞도 예단하기 어려운 한반도 상황 때문인가.

겨우 해방을 맞아 지성껏 가꾸던 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육이오가 발발한 달 유월, 

안그래도 미묘한 국내외 정세로 가뜩이나 복잡한 심사가 홀로코스트 뮤지엄에 들어서자 더욱 착찹해졌다.

과연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위는 지켜질 수 있을런지?

단순히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평화는 그저 의미없는 한 단어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예로운 평화다. 나폴레옹이 남긴 말이다.

로버트 리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다.

손자 가라사대 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하였으니

미 참모진의 전략과 트럼프의 협상기술을 끈기있게 믿어봐야 하나.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하였듯이.  

전쟁이 시작되면 정의보다 승리가 우선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나 이렇게 외쳤다.





로스 앤젤레스 홀로코스트 박물관 (Los Angeles Museum of the Holocaust : LAMOTH)은

LA 카운티 공원인 Pan Pacific Park 바로 옆에 바짝 붙어있다.

   LA의 관광 쇼핑센터인 그로브 몰 주변으로 팬 퍼시픽 팤은 쥬이시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카운티 공원을 유대인 공원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막강파워,

그러나 불과 칠십 년 전 그들은 얼마나 참담한 운명의 질곡을 견뎌야했던가 .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시작돼
1945년 5월 7일, 독일군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 끝났다.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파괴적인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나치 정권 초기, 정부는 잠재적 정치범과 사상적 반대파들을 감금하고 탄압하기 위한
게토 및 임시 수용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 막사를 만들었다.
이때 나치 정권과 그 협력자들이 독일군 점령지에서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후대는 홀로코스트라 칭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수개월 동안 그들은 수용소 수감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기차에 실어
집단 학살 시설로 수송하여 죽음의 가스실에 넣어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유대인은 사망자만 약 6백만여명,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여만 명의 유대인 중 약 2/3가 죽임을 당했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는 동안 유럽 대부분의 유대인 사회는 붕괴되고
동부 유럽 점령지의 유대인 커뮤니티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폐허로 변해버렸다.
홀로코스트는 '불에 의하여 희생된 제물' 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대량학살, 대재앙을 뜻한다.
하필이면 왜 그들은 나치당의 번제물이 되었을까.















선택된 백성이면서 구약시대 이집트에서의 엑소더스를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유대민족은

AD 70년 9월 8일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다.

313년 로마는 비잔틴제국에 무너지며 636년까지 그 땅 백성은 비잔틴의 지배를 받는다.

1099년 아랍으로 지배권이 바뀌었다가 1291년까지는 십자군전쟁터로,

다시 오스만 투르크로 넘어가 1917년까지 오스만제국에 속해있던 땅, 

모진 핍박을 받던 유대인들은 살 길을 찾아 세계 각처로 흩어져 떠돌게 된.

그리고 1948년까지 영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땅,

랑민족으로 헤매던 유대인들은 옛선조들의 땅 그곳으로 50년 동안에 약 65만명이 이주해 들어온다.

당시 반유대주의가 만연된 유럽에서 시온주의 물결이 번지기 시작했던 것.

1894년 10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포병대위인 유대인 드레퓌스가 육군 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종신형을 받게 된다.

이때  프랑스에서 신문사 특파원 생활을 하던 헝가리 출신의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그 일로 심한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유대인 국가>라는 소책자를 펴내 유대인 문제를 수면위로 이끌어낸다.

독특한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신념과 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타민족으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게했던데다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으로 재계의 큰손으로 부상하자 이에 대한 반감이 유럽사회에 확산돼갔다. 

나라없이 떠돌아야 하는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단이자 의지할 수 있는 건 금력뿐인 입장이니 일면 이해될 수도 있지만.   

헤르츨은 전유럽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차별과 박해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인 이스라엘 재건을 논의하자며

1897년 8월 29일 스위스의 바젤에서 '시온주의자 세계 대회'를 개최했다.

그가 시오니즘을 정치적으로 주도하며 민족주의를 일깨우자 유대사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드레퓌스 사건은 2년후 진범이 밝혀졌으나 권위 실추를 우려한 군 지도부가 사실 전모를 얼버무리자

프랑스 일간지 <로로르> 1면에 에밀 졸라가 실명을 거론하며 군부의 비열한 음모를 폭로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실었다.

이후 그의 글은 지식인의 역할을 논할 때마다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

 

정치적 역량을 키운 헤르츨은 시온주의자들과 단결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대규모 이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막상 아랍국가 소유인 팔레스타인에 돌아가보니 모래바람만 흩날리는 불모의 땅인데다 

하루가 멀다하고 아랍권과 마찰빚어 그곳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유럽사회에서 탄탄히 기반잡고 부유하게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고토를 회복하고 국가를 건설하자는데 대해 점차 회의적이 되어갔다.

1903년 당시 영국은 시온주의 운동가들에게 골머리 아픈 황무지 팔레스타인 대신 

비옥한 땅 우간다나 아르헨티나에 시온국가를 건설하라는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옥토를 준다해도 이는 시온주의 이념과 명분에 맞지 않는다며 그들은 영국의 제안을 과감히 거절해버렸다. 

그 와중 1914년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가 충돌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절대량의 폭약이 필요한 영국은 폭발물 제조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됨)의 기술과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의 자본이 필요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상 아서 벨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하며 내각의 승인까지 받았음을 밝혀 유대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벨푸어 선언이 있자 막연하던 이스라엘 재건이 밝은 희망으로 다가오며 이주 유대인 수는 다시 급격히 늘어났다.

이때 조직력있는 고급인력인 유럽의 최고 지식인과 부유한 실업인들 다수가 귀향해

사막을 개간하며 본격적 국가 재건운동에 돌입했다.

선언 당시에 8만명 수준이던 유대 인구가 2차 대전 직후 50만명으로 불어나

19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지나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던 유대민족들은 

마침내 1948년 독립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늘자 반사작용으로 아랍인들의 민족주의도 표면화됐다.

영국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은 연일 아랍과 유대 민족간의 테러사태로 유혈이 낭자해졌고

현재도 세계의 화약고로 남아있는 분쟁지역이 되었으며 아랍을 외면했던 영국은 지금까지도 아랍국의 날 선 표적이 되게 된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앞당기게 한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큰몫을 했다.

유럽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산 약 1천만 가량의 유대인들은 재산과 명예와 가족이라는

인간적 미련과 애착에 묶여 유럽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며 나치의 유대인 핍박이 심해지다가

1939년 박해가 절정에 이르러 1945년 종전까지 비인간적 강제구금과 아비규환의 학살이 예사로 자행됐다.

폴랜드 330만명 중 300만 학살, 소련 302만명 중 110만 학살, 헝가리 80만명 중 59만 6천명 학살,

루마니아 34만 2천명 중 28만 7천명 학살, 독일 56만 6천명 중 2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 당했다.

히틀러의 민족주의 정책에 의해 6백만의 유대인들이 게토와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과 질병. 독가스로 죽임을 당했으며 그중 130만명이 어린이였다.

미증유의 환란을 겪은 유대인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고향땅 시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이 다시금 들었고 따라서 국가 형성의 기본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1947년 11월 29일 이스라엘의 독립자치국가 건설안이 유엔총회에 상정됐다.

이에 아랍국가들이 크게 반발해 석유를 내세워 훼방작전을 폈다.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하면 어느 나라건 아랍석유에 접근할 수 없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예상밖의 결과가 나왔으니 찬성 33, 반대 13으로 유엔은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했다.

국제적 명분을 얻음으로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선언을 공식선포하므로

시온이즘이 불붙은 지 불과 50년만에 국가를 재건하는 기적같은 역사를 써내리게 되었다.

 5월 14일 건국 70주년을 맞은 이스라엘, 트럼프 대통령은 수도 예루살렘을 공식 인정하는 뜻에서

아비브에 있던 이스라엘 주재 미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 이스라엘 손을 들어줬다. 


1962년에 설립된 LAMOTH의 현 건물은 Hagy Belzberg가 설계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녹색 지붕(흙으로 봉분처럼 쌓은 위에다 푸른잔디를 덮었다)을 이고 있는 독특한 건물로

그린 빌딩 디자인 상을 받았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과거로 들어가는 동굴같은 지하구조의 건물인데
전시방향에 따라 아홉개의 방으로 내려갈수록 조명이 줄어들어 분위기가 더욱 묵직하게 된다.
전시된 사진과 원본 유품을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 노인의 나즈막하나 비분강개한 음성에서

홀로코스트 현장의 비극이 여실히 피부로 와닿았다.
2층에 올라가면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족들의 체험담을 들으며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광기에 다름아닌 전쟁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자유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곳,
역사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인류 모두에게 각인시키고자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 곁에 기념관을 조성한 것 같았다.
특히 핏빛 대리석 바닥에 세워진 여섯 개의 검은 화강암 기념탑은 학살 당한 6백만의 유대인을 상징하면서

증오와 폭력없는 선한 세상을 만들자고 무언으로 호소한다.
우리에겐 남다른 소회를 불러일으키는 유월,
많은 이가 홀로코스트를 통해 무자비한 전쟁의 참상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주소:100 The Grove Dr, Los Angeles, CA 9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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