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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옛터 단상
07/27/20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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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학창시절에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명성에 비해 턱없이 작은 포석정, 첨성대를 보고 에게게! 했을 것이다.

오래전 경주에서 포석정, 첨성대를 처음 보고는 나 역시 그 규모에 놀랐었다.

그때는 대능원이며 오릉의 웬만한 동산같은 왕릉부터 만났으니 상대적으로 더 작게 보였나 싶었다.

이번엔 드넓은 대륙 미국에서 살다 와서 더더욱 쪼맨하게 보였다기 보다 원체 작았던 포석정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포석정은 왕이 신하들과 연희를 즐기다 견훤에게 최후를 맞은 역사적 비극성 때문에 대단할

거로 짐작했다가 의외로 너무 초라해서 대실망했었다.

마찬가지로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대단한 기대감을 가졌었기에 실망을 했을 터였다. 

다시 찾은 사적 제 1호 포석정, 삼릉과 지마왕릉이 깃든 솔숲 천천히 둘러본 데다 오릉 내물왕릉 천마총을 거쳐왔기에 그

의젓한 풍모의 여운으로 포석정이 낮춰보인 건 아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전복 모형의 조붓한 수로가 동서로 10m 남짓, 남북으로 5m 가량에 깊이도 얕으막한 규모다.

웬만한 집 분수대 정도 크기이니 유명에 비하면 손바닥만 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한 만 보잘것 없이 작은 유적지다.

포석정지를 오랜만에 와봤는데 그동안 알고있던 것과는 달리 신라왕실에서 제사 지내던 곳으로 위상이 재정립되어 퍽

다행스러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55대 경애왕은 927년 음력 11겨울에 후백제 군대가 쳐들어왔는데도 왕비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라 견훤에게 죽었다.’ 라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음력 11월은 양력으로는 12월 하순에서 1에 해당하는 시기로 평균 기온이 영하권 맴도는 때. 

한겨울에 더구나 나라가 풍전등화같은 상황인데 왕이 무슨 흥으로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 띄워놓고 연희를 즐기랴.

아무리 얼빠진 군주라도 그렇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때, 그것도 한겨울에 야외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기록임에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기존 학설을 앵무새처럼 되뇌인 학자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이후 실제로 오랜기간 경애왕(景哀王)은 이름처럼 대대로 놀다 죽은 부끄럽고도 '슬픈' 왕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중국 왕희지로부터 유상곡수의 전통은 비롯되는데 그가 쓴 난정기(蘭亭記)에 '3월 첫 번째 뱀날에 동쪽을 향해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 부정을 없애는 신성한 의식이 유상곡수에서 이루어졌다' 고 했다.

곧 음주가무를 즐기는 놀이터가 아니라 성스런 의식을 행하는 장소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역사서 삼국사기는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밑자락에 깔았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일제하의 식민사관 역시 왕이 술 마시고 노닐기나 하다가 적군에게 패해 죽은 장소로 각인시키려 들었음직하다. 

결국 1999년 포석정 근처에서 궁궐이나 대규모 절에 쓰이는 기왓장과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들이 다수 출토되면서 고고학계에는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된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포석정이 포석사 및 사당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했는데 그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발굴이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지며 '포석(鮑石)'이라 쓰인 명문기와도 발견되었

따라서 포석정지는 신라 왕실의 별궁이던 장소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제사의식을 행하던 곳이라는 학설이 지금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역사시간에 배운대로 우리는 오랜동안,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연회를 열었다며 풍류를 아는 연희문화 운운하며 세계 유일의 유적이라 추겨세웠다. 

또한 술잔이 한 자리에 머무르거나 도는 현상이 일어나도록 유체역학까지 동원할 줄 안 조상들의 비범함에 감탄까지 했다.  

역사를 통째로 아무리 각색해서 미화시킨들 언젠가 역사의 실체는 진면목을 반드시 드러내고야 만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으로 높이 약 9.5m의 아담 사이즈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 천문관측 시설이라고 배웠다.

<삼국유사> 기록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고 써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는 정확히 부합된다.

그래서인지 제단(祭壇)이라거나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장소였다는 설과 이견이 속출한다.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농사일에 적용시키기도 하거니와 고대국가에 성행한 점성술은 별자리와 연관이 있으므로 점성대라 불릴만도 하겠다.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스럽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을 한 첨성대는 실지로 정상부에 앉거나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기 매우 편리하다고.

꼭대기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이며 석재의 개수가 365개라고 하여 신비함이 가득하다고 자랑하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그 수는 달라진다.

또한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는 멘트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첨성대가 정말 별을 관측하는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세종실록>에서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나오나 신라시대로부터 어언 천년 세월 뒤인 조선조다.

모양과 구조는 천문대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하지만 그에 대해 누가, 언제,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견해만 분분할 따름이다.

27단의 몸통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인 까닭이라고도 하고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 것은 각각 1년 열 두달과 24절기를 나타낸다는 가설도 있다.

설왕설래, 이렇듯 첨성대는 보다 정확한 역사적인 유물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역시 비밀의 집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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