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bell
촌장(kubell)
한국 블로거

Blog Open 07.15.2012

전체     659540
오늘방문     137
오늘댓글     4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친구 새글 더보기
  달력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월정교
06/30/2020 20:38
조회  540   |  추천   8   |  스크랩   0
IP 59.xx.xx.123


살구가 노오랗게 익어가는 중

무성한 담쟁이 기와담을 넘고 배롱나무는 꽃망울 키워가고 

잿빛 기와담장에 얼크러진 능소화 덤불 너머로 펼쳐진 송림

울퉁불퉁 실팍지게 알 굵어가는 모과 

교동의 깊은 연륜 넌지시 알려주는 노거수 팽나무 


정선에서 하얗게 핀 밤꽃을 보았는데 어느새 제법 몸피 키운 밤송이

최부자댁 행랑채 목재가 보여주는 자연스런 곡선미

석류나무 한쪽에선 꽃피고 다른 가지엔 열매 실해져 가고





호도나무는 아주 어릴적 매방리 할아버지 댁에서 보았기에 너무도 반가웠던 재회

경주교동 최씨고택은 안채 외의 재실 별당 등은 출입 불가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 곳간

 

거부로 이름난 경주 최 부잣집은 12대를 이어온 명문대가다. 흔히 만석꾼이라 하면 곡식 만 섬을 거둘 만한 논밭을 가진 부호를 이른다. 만석꾼을 요즘 시세로 환산해 보면 최하 연수입 20억 원 이상의 부자인 셈이다. 웬만한 기업 총수에 맞먹는다. 최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1568-1636)에서 출발, 12대 최준(1884-1970)까지 무려 300년 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 최준은 상해임시정부에 나라를 되찾는데 쓰라며 독립군자금으로 재산을 풀기 시작해 광복 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남은 전 재산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와 대구대학에 기부했다. 위 가옥도 후손들 소유가 아닌 영남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그들이 남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 


부자 3대 못간다는데 최부잣집 가문이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대대로 지켜온 ‘여섯가지 가훈(六訓)’에 있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사방에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라는 노승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해나간 최진립. 아버지 유지대로 2대 최동량은 물려받은 많은 재산으로 착실히 땅을 넓혔다. 그 뒤를 이은 3대 최국선 당대에 이르자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했다. 주민들이 흉년이 들어 빌려간 양곡을 갚지 못하자 아들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없애고 보릿고개 때에는 배 곯는 이웃을 위해 곳간문을 활짝 열라 일렀다. 그렇게 집안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아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며 겸손하게 살았던 최부자댁. 존경받는 부자로 남은 이유가 여기있었다.


엄격한 6훈은 이러하다. 첫째,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 품위 유지를 위해 제일 낮은 벼슬인 진사 벼슬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벼슬은 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둘째, 재산은 1년에 절대로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는 뜻인즉 지나친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셋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고 일렀으니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하룻밤 잠자리까지 마련해 쉬게해줬다.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했는데 이는 싼 값에 내 놓은 땅에는 원과 한이 맻힌 까닭에 오로지 정당한 방법으로만 부를 쌓으라는 뜻이다. 다섯째,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동안 낡은 무명옷을 입히라 했으니 내가 어려워 봤어야 다른 사람 고충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 여섯째,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며 쌀뒤주를 365일 대문밖에 내놓아 양식을 구하려 온 이들이 퍼가도록 배려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기거했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1700년경 아흔아홉칸으로 지어진 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 또한 크다. 그렇다해도 최씨 고택의 솟을대문은 위압적이지 않았으며 낮은 담은 수수한 모양새였다. 이 댁에서 대대로 빚어 온 가양주인 교동법주는 쌀로 빚은 전통약주로 현재까지 최고급 선물 술이다. 동학난 등 잦은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해가 없었던 것은 대대로 베푼 선행 덕분이었을 터. 부의 세습이 논란거리인 현대, 시장경제체제인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조차 심지어 개혁대상으로 떠올랐다. 엄친아, 금수저는 괜히 미움의 대상으로 백안시 당한다. 실제 아무 노력없이 부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탕진하는 예를 오늘날에도 수없이 목격한다. 뿐인가, 많이 남긴 선대의 재물은 외려 형제간 분쟁의 꼬투리가 되어 동기 사이가 원수로 돌아서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최부자 정신은 과연 이 시대 어느 정도나 이어지는지.......







지난해 가을 시니어기자단에서 기사거리도 취할 겸 교촌마을로 나들이를 갔다. 그때 다른 긴한 볼일이 있어 참가를 못했다. 그들이 돌아와 보여주는 사진을 보니 징검다리를 건너며 찍은 장면이 아주 그럴싸했다. 월정교를 배경으로 삼았는데 물에 비친 다리와 징검다리를 건너뛰는 사람들 반영이 멋졌다. 황리단길 카페거리 풍물도 현대와 고전이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두툼하게 부친 달걀 지단만으로 속을 채운 근처 교동김밥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맛집, 점심도 먹은데다 워낙 길게 늘어선 줄이라 그냥 패스했다. 


월정교는 교촌마을 최부잣집에서 걸어서도 갈 만큼의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60년 경덕왕 때에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일정교(), 월정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주의 월정교지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가 어느 시기에 불타 무너진 것으로 짐작되는 월정교.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이 남아있는데다 강바닥에서 기와와 건축 부재가 자주 나왔다. 또한 원효대사가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문헌을 참고로 월정교 옛터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1986년 조사 중 월정교 교각 사이 강바닥에서 불탄 기와와 목재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왕이 사는 궁궐인 서라벌 월성에서 남쪽 건너에 있는 남산을 이어주던 다리로 문천이란 너른 강 위에 세워졌던 월정교다. 당시 세월엔 왕과 대신들만 이용했다는 60미터가 넘는 긴 다리다. 


교각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복원한 월정교는 외형 장엄한 복층 구조다. 이층은 전시실로 쓰인다. 멀찍이서 전체를 바라보자니 웬지 낯설다는 느낌부터 든다. 특히 지붕 위의 장식이며 단청이 고유의 우리 것과 어딘지모르게 거리가 떠있다. 일본 정서도 스며있고 당나라 냄새도 진하게 난다. 철저한 고증에 의해 지은 건축물이라 하나 이상해서 해설사에게 물었더니 당대 풍조에 따라 지었다는 답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일본 헤이안 시대가 그래서 어른거렸나 보다. 아무튼 정이 가지 않아 사진도 몇 장만 찍고 돌아섰지만 그 뜨악한 생경감은 쉬 가시지 았았다. 야간 조명이 볼만하다고 하나 그 시간 기다리기보다 미련없이 우리는 대왕암으로 향했다.



이 블로그의 인기글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월정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