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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지에서 해미읍성까지
10/05/20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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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교지보다도 혹독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해미성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무엇이건 기본적으로 살고자 하는 존재다. 하나뿐인 목숨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래서 존귀한 것. 그럼에도 1백 년의 박해 동안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간 현장이 해미성지다. 흙구덩이와 깊은 못에 내던져진 채 생매장 당한 참혹한 사연이 널려있는 자리인 천주교 성지를 찾았다.

시뻘겋게 달군 쇠로 가슴을 지지고 팔을 자르는 잔학스런 고문에도 충절을 지킨 사육신의 처참한 고문 과정을 드라마에서 보았다. 독립운동하다 투옥된 순국열사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일경 잔혹함 역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럽다. 쿼바디스나 벤허 등 외화에서 콜로세움에 내몰린 신자들이 굶주린 사자에 찢기면서도 신앙 증거하다 순교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그처럼 경우에 따라 사람들은 얼마나 강해지고 독해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아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외쳤다는 소년의 용기도 물론 없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탓에 사육신도, 순국열사도, 순교자도 도저히 감당할만 한 인물이 애시당초 못된다. 비겁하다해도 어쩔 수 없다. 아마 불인두 같은 도구나 으르렁거리는 사자소리만 들려도 지레 쫄아 술술 불거나 두손 바짝 들고 말 거 같다.

한편 인간만큼 무자비하고 잔인한 독종도 없지 싶으다. 인간이 같은 인간인 반대편에게 가하는 악랄한 린치의 정도는 도를 넘기 일쑤임을 조폭영화 등에서 더러 보아왔으니까.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건 자기안의 폭력성이 폭발해서건 때론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악마같은 잔악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하여 피를 본 사람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누군가도 그랬으리라.

해미 성지엔 신자들을 생으로 수장시킨 현장인 진둠벙이라는 못이 있는데, 물에 던져진 신자가 본능적으로 헤엄쳐올라오면 돌로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고 한다. 돌다리 위에서 교인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다쳐 피투성이 주검을 만드는 자리개질이란 처형법도 있었다. 참수형을 집행하기 앞서 칼춤을 춘다 망나니의 칼날에 댕강 목숨이 끊어지면 차라리 낫지않을까 싶다. 그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순교자들의 백색 결기 앞에 전율이 이는 동시에 숙연해진다.

 

-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안 관아에서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박해 당시 숨진 가녀린 넋들 코스모스로 환생했나-

-관아문은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형식의 건물이다-




-고문목으로 쓰였던 수령 3백년생 호야나무(회화나무, 충 기념물 제172호),교우들을 나무에 매달아 태형 등 고문을 가했다-

-산언덕 위에 세워진 읍성 내 정자인 전망좋은 청허정-


조선 초기부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서해안 전역을 관할하던 주요 진영으로 아직도 성터가 남아있는 해미.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옛 읍성이다. 평지에 타원형으로 둥글게 쌓은 읍성 외곽엔 깊이 2미터나 되는 해자를 팠다. 태종 때 축성하였으며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한때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하고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도 천주교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에서 잠시 귀양을 살았다.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되었으나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었다. 1천 오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무장이 현감을 겸직하며 지역을 통치하였다. 경기도와 충청권의 내포 일원에 대한 해안 수비를 맡은 주요 군사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으며은 극악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백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무수한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리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가열차게 할때뿐만 아니라 해미 감영에서는 끊임없이 잡혀들어오는 내포 지방의 신자들을 속속 처형했다. 수천의 신자들이 교수형, 참수형, 형, 몰매질, 자리개질 해미 진영 서문 밖은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대박해 때는 일일이 참수하기가 버거워 아예 숲속으로 수십 명씩 끌고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집어넣고는 산 채로 흙을 덮어 버리는 생매장까지 행해졌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었던 주민들이 그때부터 이곳을 여숫골이라 불러 지명으로 굳은장터인 진둠벙(못) 주위에 현재 성당과 기념관이 섰다. 1935년에 서산 본당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범(Barraux) 베드로 신부님에 의해 순교자들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 원래 순교터인 생매장 순교지에서 임시 안장된 상홍리로, 다시 1995년 해미 순교탑 앞으로 순교자 전수를 이장했다.
해미읍성과 이웃한 해미 성지에는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결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고자 2003년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다. 아주 오래전 고향과 인접한 해미성지에 와보고 이번이 세번째 걸음. 그때까지만해도 조촐한 성지에 하얗게 깔려있는 개망초꽃이 꼭, 무명옷에 농투성이로 살다 간 순교자들의 혼이듯 여겨졌었다. 덜 다듬어진 성지는 그만큼 질박하고 소탈했었다. 갈수록 조경은 세련되고 거리는 매끈해지고 건물은 대형화돼 웬지 정이 쉽게 들지 않는다. 만만하게 마음 주고 헐렁하게 쉴만한 여지가 없어서이다. 그점이 아쉬웠다.



해미 읍성, 해미 성지, 순교자, 진둠벙, 여숫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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