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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중심 솔광장 주변
09/23/20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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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 동녘에 부채살처럼 퍼질 무렵 닿은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도심지 중앙이라 할 수 있는 꺄야오 광장(plaza de callao)과 솔 광장(puerta de sol)을 두서없이 헤짚고 다녔다.

예전 마드리드 인근엔 산딸기나무가 무성해 달콤한 산딸기를 따먹으려 곰이 자주 나타났다던가.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기면서부터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가우디만을 떠올리며 막연히 그의 건축예술과 스페인을 결부시켰는데 실제로 와서보니 

놀랍도록 차원 높은 수준의 건축문화를 향유한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의 주력 산업 역시 건축으로 수주량 세계 최고인 건설업체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내수에만 머물지 않고 스페인은

건설 부분 해외 매출액이 세계 1위라 한다.  

지금도 스페인 황금기에 지은 수많은 건축물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중세 건물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17~18세기에 건설된 금빛 찬연하고 웅장하면서 고색창연한 건축물들이 즐비한가 하면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도시

마드리드.

무엇보다 세계대전의 전화를 전혀 입지 않아 오래전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의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건물마다 거개가 고개 한껏 뒤로 젖혀야만 전모가 잡힐 정도의 고층인데다 지붕 꼭대기 돔 장식마다 섬세한 조각상을

세웠는데, 아마추어는 도저히 어떤 구도로도 옳게 제대로 된 사진 찍기가 어려웠다.

마천루의 숲인 가로에 색색이 감각적인 전광판이 표현해내는 현대미와 중세건물 조화로이 균형이룬 길은 곧고 길게 이어졌다. 

주로 성당 미술관 백화점 오페라극장 호텔 등 압도해오는 대형건물들이 밀집해있어 명실상부한 수도의 중심지다웠다. 

어디나 빛이 짙으면 그늘도 깊게 마련, 일터에서 저마다 활기찬 아침을 열고있는 시각인데 늦도록 잠에 빠진 홈리스들.

으슥한 뒷골목도 아닌 쇼핑몰 쇼윈도 앞이건 극장 앞이건 벌건 대낮에 장소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거리 단속반이 맥을 못출 정도로 홈리스가 떼를 이루어서인지 심지어 매트리스까지 펴고 아예 한살림 차린 무리도 있어

근자 25%에 이른다는 실업률을 실감나게 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유럽에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한때 구제금융에 의지하기도 했으나 

곤경에 처한 다른 유로존 국가들과 달리 2015년 이후 경기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스페인.

특히 관광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답게 한해 8천만이 넘는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어

GDP의 11%를 점하고 있다 한다.





 <>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긴 펠리페 2세는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왕으로 스페인 최전성기 황금시대를 누린 군주였다.

펠리페 2세라는 16세기 왕보다는 근세 스페인의 주요 인물인 프랑코 총통을 여기서 간략히 다뤄보려 한다. 

프랑코 덕에 마드리드가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유럽국가의 수도일 수 있었던 이면사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출신인 프랑코는 육사를 나온 엘리트 장교로 진지하고 보수적인 가톨릭 교도였다.

왕정제를 지지하던 그는 소장으로 진급할 무렵 정권이 좌익세력에 넘어가자 정국은 혼란이 가중되며 무정부상태에 빠진다.

좌천당한 섬에서 그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계엄령 선포 후 마드리드로 진군하는데 이때 여러 계층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폭적인 물자지원과 소련 커뮤니즘의 영향권과 손잡은 좌익의 발호를 견제하려는 서방세계도 배후에서

프랑코를 지원한다.

특히 기득권을 빼앗긴 국내 종교인과 부유한 상인 지주들이 좌익 세력에 반기를 들고 그를 도운 게 결정타로 작용했다.

1936년 9월 그가 이끈 쿠데타는 성공을 거둬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고 프랑코는 총통의 자리에 올라 3년여에 걸친

내전을 치루며 좌익 정부군을 소탕한다.

그는 군사독재자로 각인되긴 했지만 파시즘에 가까운 국가형태를 견지하면서도 2차대전 때는 중립을 지켜 격렬했던 전쟁의

험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았다.  

프랑코는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에 강경하게 대처해온 강력한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정치인의 표본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이면서 영웅인, 일면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프랑코는 자신의 유고 시에 왕정으로 복고할 것과 후계자로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추대할 것을 지정하고 이를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실제로 스페인 보수 우파의 이상향이자 지향점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을 이끈 카를로스 1세(1516~1556년), 펠리페

2세(1556~1598년) 시기인 영광의 가톨릭 절대왕정 시절이다.

프랑코 사후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수아레스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이행을 과감히

추진하여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공로가 큰 왕이었다.

스페인 군주제의 특징은 의회군주제로 실제 권한은 법을 만드는 의회에 있으며 민주적 방식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자는 국민.

왕은 국가원수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에 머무른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힐 정도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국민적인 인기는 절대적이었으나 그의 지지도가

추락한 이유는 2008년 이후 스페인이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부터다.

평소 비누를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껴쓴다고 알려졌던 검소한 이미지의 국왕이 2012년 국민의 세금으로 아프리카로

코끼리 사냥을 간 것이 폭로되면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게다가 2013년 공주인 크리스티나 부부가 600만 유로에 달하는 공금 횡령, 세금 탈루 등 부패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왕실의 인기는 급락하였다.

2014년 부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실의 추문에 책임을 지고 퇴위하자 그의 아들이 현 국왕인 펠리페 6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197센티의 장신에 최신예 전투기를 조종했으며 요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등 스포츠로 다져진 몸매와 소탈한 외모로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성이었다.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늘 가십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이혼 전력이 있는 방송국 앵커인 평민과 결혼했다. 

슬하에 두 딸을 두었으며 장녀가 장차 스페인의 여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먼 나라 남의 나라 로열패밀리에 관심 괜히 돌리는 연유인 즉, 요상한 시국에 정나미 떨어져서임을 알만한 이는 다 헤아리리라.



<카를로스 3세 동상>






 

<가로등 기둥에 양각으로 표시된 1832년도는 순조 32년으로 의유당 김씨의 동명일기가 쓰여진 해>




<마드리드 지하철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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