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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 되기 싫다
08/20/20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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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21.xx.xx.119



"나는 평생 아쉬울 거 없이 살았고 바라는 바도 없다. 내가 이 나이에 왜 그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왕이 되기 싫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된 공양왕이 왕위 승계를 마다하며 한 말이다.

국운 다한 고려왕조의 비애를 절절이 체감했던 마흔 다섯 나이의 왕요는 절대로 왕이 되고 싶지않았다.

그 불안한 시기에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연히 그러했을 거다.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직후에 이성계 측은 폐가진위(廢假立眞), 즉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왕을 세운다는 명분 앞세워

고려의 종묘사직을 뒤흔든 다음 대대적인 물갈이를 한다.

그에따라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폐위해서 강릉으로 강화로 유배시켰다가 살해한 그 서슬퍼런 정권 실세에 의해 어거지로

옹립되어 즉위하게 된 공양왕이다.

직전의 왕이었던 우왕, 창왕에 대한 비왕설(非王說).

공민왕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지기 시작한 비왕설의 근거는 이러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다.

신돈의 씨라는 이러한 썰은 이성계 등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

훗날인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우왕과 창왕을 아예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 칭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대로 그렇게 1300년대 말 역사의 진실은 역성혁명 세력의 농간으로 왜곡된채 파묻혀버렸다.

20대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34대 공양왕 재위기간은 1389년부터 1392년, 허나 아무 힘없는 허수아비였다.

재위 3년 동안 사회전반에 걸친 제도개편을 단행하였으나 그것은 이성계 일파가 세력의 발판을 닦기 위한 사회개혁이었을.

정국 혼란이 극에 달했던 1391년 정몽주선생이 살해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며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 원주에서 다시 삼척으로 유배되었다가 1394년 한서린 생을 마무리했는데 비운의 왕은 사인 역시 불분명다. 

 


 





꼬레아라는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500년 고려 역사를 마감한 공양왕능을 둘러보자니 회포 자못 비감스러워 흐린

하늘만큼이나 기분 묵지근했다.

능 이름은 고릉(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285번길 33-13에 있으며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은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고 사적에 나와있다는 이곳.

조선 현종 때 전국의 고려 왕릉을 조사해 기록한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따르면 "현종은 고양군에서 별도로 인근

주민을 뽑아 공양왕릉을 수호하게 했다"고 써있다 한다.

세종실록에 "공양왕의 진영을 고양군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1970년 고양시 소재

공양왕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무덤은 쌍릉 형식으로 분묘작은 묘표석(墓表石), 장명등, 비석,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 조촐하다못해 초라한 고능. 

패자는 죽고나서도 대접 이리 소홀해지게 마련인지 21세기 이 세월에도 소위 왕릉에 대한 관리가 이 정도로 허술하다니. 

더구나 지자체가 되면서 각 지방마다 다투어 허무맹랑한 야사까지 끌어다붙여 뭐든 문화재로 격상, 꽃단장시키는 판 아닌가. 

묘역엔 뗏장조차 보잘 것 없어 듬성듬성 황토 드러난데다 주변 조경도 형편없어 정말이지 보기가 딱하고 심사 처연스러워졌다.

다만 홍살문 형태의 나무 울타리와 능 옆의 문신석 무신석이 고려 마지막 왕릉을 굽어지켜주고 있었다. 

왕릉 앞에 웅크리고 있는 특이한 석물은 청삽살이로, 연못을 향해 계속 짖어대는 삽살개를 보고 이상히 여겨 못물을 퍼내자

거기 옥쇄를 품은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있어 거두게 됐다는 설화와 관련해 이 고을 이름은 왕릉골이 됐다.

이성계로부터 제거될 운명이라 어느 야심한 밤 왕과 왕비는 개성 궁궐을 벗어나 무작정 남하하다 고양 견달산 기슭에 이르자 허기 못이겨 한 절집 문을 두드렸다.

망국의 왕으로 집도없이 떠도는 공양왕의 신분을 한눈에 알아본 스님은 저 아래 누각에 숨어계시면 매일 수라를 올리겠다 하여

한동안 절에서 갖다주는 음식으로 연명, 인근에 食寺里라는 동네가 생긴 연유라 한다.

또한 능원 앞에는 왕과 왕비가 자결했다는 연못 자리 흔적도 갈대 꺾여진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 순비 노씨(順妃盧氏)에게는 세 공주와 한 아들이 있었다 하는데, 왕릉 뒤쪽에 산재한 여러 분묘는 외손인

정씨와 신씨 가계의 묘라 하나 어찌 항렬로 외조부이기도 한 왕릉 위에 뫼자리를 개념없이 쓸수가 있었던지?  

한편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데 삼척의 왕릉은 민간에서 민간으로 설화처럼 전승돼 내려온 능이다.


  

<공양왕릉 바로 연달아 윗자리 산자락따라 왕릉 못잖은 품새로 위세좋게 묘를 쓴 정씨, 신씨 가묘중 신숙주 손자 무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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