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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유월의 스케치
06/24/201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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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3가에 있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산하의 임시 수도 기념관.

임시수도기념관 건물은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할 때 지은 것으로 1926년 8월 10일 준공되었다.

1983년 7월까지 경상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던 목조 건물이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1950∼1952년)

대통령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건물 복원 공사를 하여 2012년 기존의 임시 수도 대통령 관저와 함께 기념관 등 2개 동이다.

부산시가 이 유서 깊은 건물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보수하여 활용하게 되었으며 2002년에 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하였다.

기념관 1층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도착, 외국군의 부산진주, 인천상륙작전, 노천교실 수업 장면 등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집무할 때 사용하였던 야전용 목침대, 책상, 의자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일제강점기 착취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료인 경남도지사의 관사라는 점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한 건물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대통령이 집무실 의자 뒤쪽엔 이승만 대통령이 환도를 그리며 직접 쓴 한문자작시가 6폭 병풍에 담겨있으며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휘호도 걸려있다.

통일을 염원하고 수복 환도를 되새기는 뜻으로 건물입구 정면에 ‘사빈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사빈당이라는 당호(堂號)고공단보와 빈의 고사에 빗대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의하여 서울 내주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마련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빼앗긴 땅을 수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공단보는 빈을 덕()과 의()로써 다스렸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는데, 어느 날 북방의 오랑캐 훈육과 융적(戎狄)이 재물과 땅 백성을 요구하며 침략하자,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지 않고 빈을 내주고 기산(岐山) 남쪽의 주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빈의 백성들도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왔으며, 그이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이웃나라 백성들까지 무리를 이끌고 귀의하였는데 이것을 기반으로 후대에 이르러 빈을 회복함은 물론 은나라에 이어 중국 전체의 패권을 장악한 주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십여년 전에 가끔 들렀던 곳인데도 날로 복잡해지는 도심 한 모서리라 길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골목길과 층계를 오르내리다가 겨우 기념관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과 달라진 입구 때문이었다.

전에는 기념관 초입에 이승만 대통령의 반신상이 서있었으나 대통령을 폄훼하는 무리들이 붉은 페인트를 들이붓는 등 외형을

훼손시켜 지금은 철거되고 대신 <군상>이라는 조각품이 서있었다.

군상이란 제목의 조형물은 육이오 당시 피난시절의 역경을 이겨낸 인간 군상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키가 많이 자랐으나 사방으로 밀밀하게 들어찬 고층 아파트로 인해 기념관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때마침 뜨락에서 김성환화백의 스케치 다수가 특별전시되고 있었다.

오늘 1950년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했던 바로 그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서울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때 마침 일요일이라 늦잠에서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도심의 몇 안 되는 극장에서 열리는 악극단 공연을 보러 갈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밥을 먹고 막상 거리에 나섰을 때,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극장 부근에 도착하자 군용차량들이 마구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군용차에 매단 스피커에서 다급한 가두방송이 흘러나왔다.

“휴가나 외출 중인 장병 여러분! 모두 부대로 즉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야 사람들은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새벽 4시 미명을 기해 38선 전역에서 북쪽 괴뢰군의 전면적인 불법남침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용맹스런 우리 국군은 즉각 반격을 개시해 적을 물리치고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혹시나 하면서도 믿었다. 이미 그 전에 38선 부근에서는 툭하면 국지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전면전이라고 해도 설마 했었다. 세계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동족상쟁의 비극 6.25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략......3년여의 전쟁이 끝나고 38선 대신 새롭게 휴전선이 형성되었고, 이 시각부터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양측의 적대적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만 해도 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해 약 18만 명이 전사, 민간인 99만과 경찰관 1만여 명의 희생으로 나타났다. 국군부상 45만 명에, 포로 8,343명, 유엔군부상 103,460명에, 포로 5,817명에, 북한군 사망은 약 52만 명 추산, 양쪽의 행방불명실종자도 1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전쟁미망인 20만 명, 전쟁고아 10만여 명도 생겨났다.>

행정 안전부 국가 기록원에 쓰여진 6.25에 관한 기록문 일부를 읽으며 그날을 거듭 상기하시길.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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