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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04/01/20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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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아련한 추억속의 명동으로 나갔다. 명동성당에 가기 위해서였다. 거리 풍경이 하도 달라져 골목을 헤매다 행인에게 물어보고야 겨우 찾았다. 예전에도 높은 빌딩이 많았지만 조밀하게 촘촘 들어선 고층 빌딩숲 사이로 인파가 물결져 도로는 비좁았다. 한류의 위력을 실감나게 하는 외국인들로 북적대는 상가는 꽤나 붐볐다. 우박이 쏟아지다가 해가 나기도 하는 변덕스런 날씨의 토요일 오후였다.

푸른하늘과 잿빛구름이 번갈아 교차되니 첨탑은 더 우뚝해보였다. 계단 위 웅장하기보다 품격있게 정갈한 성전이 높다라니 우러러졌다. 때마침 성당에서 혼배성사가 진행중이었다. 영원토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성가정을 아루겠다는 맹세를, 가족친지 모신 가운데 하느님 앞에서 올는 경건한 전례의식이다. 결혼식을 마치자 신랑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있는 후원 성모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명동성모병원은 여의도로 이사갔고 계성학교도 자리를 떠, 기억속의 명동성당 풍경은 아주 많이 변해있었다. 완만한 언덕길을 걸어올라갔던 예전과는 달리 가파른 층계위에 올연히 선 성전. 병원 대신 가톨릭회관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선 지하의 세련된 현대식 상가 규모도 놀라웠다. 옛 그대로인 곳은 들머리의 성모동굴, 성모상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내려왔다. 명동거리는 여전히 번잡했다. 
 




121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조선 형조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장 24절).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그것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입국한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 주교는 명례방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중 한 한옥에 종현학당(鐘峴學堂)을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블랑 주교는 이 때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부지를 매입하였다. 외젠 코스트(Eugene Coste) 신부가 설계한 성당이 벽돌로 쌓여지자 당시 고종은 궁궐보다 더 높은 자리에 훨씬 높이 솟는 건물이 올라 가는 것에 분노했다. 조선 조정의 방해에 이어 일본인의 방해공작도 성전 신축공사를 막지는 못하였다. 1887년 겨울에 부지 정지 작업이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차츰 신앙의 자유를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 1892년 5월 8일에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 주교는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맞이하였고, 1898년 5월에 마침내 한국 교회는 45m 높이의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성전을 갖게 되었다. 뾰족집 이름은 그땐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고 1945년 지금의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 
 -가톨릭 자료실에서 전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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