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bell
촌장(kubell)
기타 블로거

Blog Open 07.15.2012

전체     576820
오늘방문     69
오늘댓글     1
오늘 스크랩     0
친구     0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친구 새글 더보기
  달력
 
3월을 보내며 당신들의 희생을 기립니다
03/30/2019 08:00
조회  977   |  추천   17   |  스크랩   0
IP 183.xx.xx.113





 

안산 등성이에 산수유 샛노랗고 버드나무 겨자색으로 연연히 물오르는 3월 끝자락.

3월을 보내며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찾은 곳, 서대문독립공원에 이르니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을 비롯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언덕위로 보였다.

이 나라는 선열들이 '목숨' 바쳐 독립투쟁하므로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났고

어르신들이 '몸' 바쳐 경제부흥 이룩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그분들이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피땀흘려 일궈놓은 풍요로운 이 땅에서

달디단 열매만을 따먹으면서 별 어려움 겪지 않 살아가다보니 소비생활이나 즐기며 마냥 취해있지는 않은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진 옥고를 치르다가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서대문형무소 자리는 생생한 역사의 흔적이자 거울이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뼈아픈 과거를 제대로 되돌아보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리라.








<충남 당진군 대호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相 자 돌림이신 외가 친척께서 손수 짠 명주천에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정문인 입구>

<처형된 시신을 빼내던 시구문을 바라보는 나어린 후대들은 울분에 차오르면서도 경건하게..>


<여옥사 8호 감옥에는 유관순열사를 비롯 신관빈, 김향화, 심명철, 임영애, 권애라 여사 등이 

삼일운동 1주년을 맞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옥중투쟁을 전개했 >


<좌는 조선총독부가 펴낸 소책자로 중일전쟁 승리를 위해 조선 여성들도 적극 동참하라는 내용/

우는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 사용된 교재인데문법의 초급단계 정도 수준 >

 <벽을 통해 서로 수신호를 주고 받는 뼈 앙상한 모습의 독립투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서명포>

<처형장에 늘어진 올가미>


눈오는 밤(雪夜)
감옥 둘레 사방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밤(四山圍獄雪如海)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와 같은 꿈을 꾸네(衾寒如鐵夢如灰)
철창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네(鐵槍猶有鎖不得)
심야에 어디에서 쇳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夜聞鐵聲何處來)


33인 중 한분인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3년 동안 이곳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다.

형무소란 곳은 죄인들을 가두는 데나 서대문형무소는 특히, 자주독립을 위한 불굴의 의지로

목숨 바쳐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사형장으로 끌려간 비극의 현장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 통감부는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여

1908년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이 형무소에 투옥시켰다 .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대한제국시대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옆에다 지은 경성감옥은

 근대식 감옥의 시작인 셈으로 가즈마라는 일본인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500여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옥사와 격벽장은 한국에서 흔한 구조가 아닌  파놉티콘 구조로 설계된 형무소였다.  

파놉티콘 구조는 부채꼴 형태라 중심에 위치한 감시자들은 외곽에 있는 피감시자들을 감시할 수 있으나,

 감시자들이 자리한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피감시자는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다.

재와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주독립을 향한 희망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해서 김좌진장군, 손병희선생, 열사 유관순, 안중근, 이봉창, 강우규 등 3,000명의 조선인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이 무참히 훼손당한 암흑기였고 절망과 고통의 시기였으나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치 않고 민족독립을 향한 투쟁을 이어갔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일제 때 이곳은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 받은 전국의 기결수들이 수감 또는 이감되었으며,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少女囚)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던 까닭

유관순 열사도 천안에서 구금된 후 서대문으로 이송돼 와 여기서 옥사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는데

당시 이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만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전국의 애국지사들이 이감 후 혹독한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시로 옮긴 뒤,

기존의 건물을 보수시켜 옛모습대로 복원후 국민정신교육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형식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신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에는

자료에 의해 고증된 분들의 이름이 금속판에 일일이 새겨져 있었다.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1923년에 설치한 높다란 망루,

몸을 뒤척이기도 어려울만큼 한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인 0,7평의 독방은 빛 한오라기 들어오지 않는다,

사형집행 도구인 올가미, 고문 기구 등은

인간이 인간에게 그것도 피지배민족에게 가한 잔학무도함의 극치라 보기만해도 섬뜩했다.

나무의자 위로 늘어진 올가미에 목을 걸어 사형을 집행시키면 시신은 지하로 떨어지게 되어 있고,

사형장에서 곧바로 통하게 만들어진 시구문 토굴 처형된 시신을 몰래 빼내갔다고 한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직접 체감해 볼 수 있는 장소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불행했던 과거의 비극을 되새겨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라는 산교육장에 다름아니었다.

<광복군 뱃지>



<마지막 순간에 붙잡고 통곡했다는 사형장 입구 왼쪽에 자리한 미루나무>

<추모비: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민족의 혼 그릇을 형상화>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이 길을 똑바로 걸어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형장, 왼쪽으로 틀면 면회실이 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아이들이 생과 사의 깊은 의미는 파악치 못한다해도 자못 표정들 엄숙하고 진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관순, 강우규,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한용운, 광복군
이 블로그의 인기글

3월을 보내며 당신들의 희생을 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