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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와 농번기
02/02/2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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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여려진 오후. 딸아이를 데리고 시장엘 갔다. 풋마늘에 미끈한 무, 햇감자가 쌓인 채소전을 지나 딸기 토마토 등 때깔 먹음직스런 과일전에 들어섰다. 순간 이상스레 생긴 낯선 열매가 딸아이 눈에였던 모양이다.

"엄마, 저건 첨 보는데 이름이 뭐야?" 

"응, 오디라고 하는데 뽕나무 열매란다. "

"뽕나무는 어떻게 생겼어? 먹는거야? 맛있어?"

난생 처음 본 생소한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아이의 질문은 계속됐다. 생물도감을 펼쳐놓고 설명해도 모자랄 정도로 묻는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대답은 점점 시원치가 않다. 단 한번이라도 실제로 밭두렁에 서있뽕나무와 그 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를 보여줌이 효과적인 산교육이지만 도회에 살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신 마음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내 유년의 추억 무늬를 펼쳐보여 줄 밖에는.

내 아이만 했던 어린 시절. 오동나무 은은한 꽃이 피는 이맘때면 오디가 익어갔다. 뽕나무 낮은 가지를 휘어잡아 주던 외삼촌 덕에 입 언저리 보랏빛되도록 그 달콤한 맛에 취해 들곤 했었다. 이십대 이르자 교직에 들어섰다. 시골학교에 부임했던 봄, 춘곤증인듯 졸음에 겨워하는 한 학생의 일기를 보고서야 그들의 일상을 이해하게 됐다. '교복 벗기 바쁘게 뽕잎 따야 하고 누에 돌보느라 저녁 시간 다 보낸 뒤 밤 이슥토록 숙제하고 나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자꾸 밀려드는 잠'이란 내용을 읽고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들은 농번기에 삼 사일 주는 가정실습 시기엔 여학생이라도 거머리 헤엄치는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땡볕 아래 밭을 매야 했으며 새참 바구니 머리에 이고 날라야 했다. 모내기, 보리베기, 밭매기에 더해 누에치기까지 해야 했던 학생들. 야산이 많은 충청도 지방에선 계단식 뽕밭을 만들어 그 즈음 누에를 키워서 농가소득을 늘리고들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농촌에서는 봄 가을이면 손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이 무렵이 농촌에선 가장 바쁜 철이다. 모 심는 일당이 높아서 오히려 도시 근로자가 시골로 원정가는 노동판 역류현상까지 일어난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또한 군,관,민의 농번기 지원봉사가 되려 의존의 병폐를 키운다는 지적도 나왔으나 극히 일부에 국한된 얘기이리라. 하긴 도와주러 온 도시인들의 익숙치 못한 솜씨 때문에 두벌 일을 하게 만드는 번거로움으로 농촌에서는 오히려 도움의 손길을 사양한다던가.

우리에겐 옛부터 상부상조하는 미덕이 있어 이웃끼리 돌아가며 힘을 합해 일하는 품앗이 제도가 있었으나 근자의 농촌실정은 심각한 이농현상으로 인해 몸살을 심히 앓는다. 일할 젊은이가 도통 없어 일때를 놓치기도 한다는 농촌 사람들의 하소연이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보여지는 정겨운 전원 풍정은 잘 꾸며진 액자 안의 그림일 뿐이란다.

오, 그렇구나. 여태껏 나와는 무관한 별개의 지역으로 여겨왔던 거기에 내 작은 일손이나마 필요로 하는 데가 있을 지도 모르겠네. 가을이면 찹쌀이랑 참깨랑 올망졸망 싸주시던 시숙모님께 이참에 조그만 힘으로나마 답례를 하자. 촌일을 할 줄 모른다고 명절에 가도 가만 앉혀만 놔두시던 그분들이 지금 한창 바쁜 철임을 왜 진작 생각 못했을까. 비록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은 거들지 못할망정 참 준비나 뒷설겆이, 하다못해 완두콩 까거나 풋배추 씻는 일이라도 도와드려야겠다. 더불어 다섯살짜리 막내에게 무논의 개구리 소리도 들려주고 뽕잎 사이에서 오디도 찾아봐야지. 쌀나무 아닌 벼 포기가 어떻게 자라 쌀을 맺게 되는지 역시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게 해줘야지. 

좁다란 고샅길 따라 걸으며 투명한 냇물에 맑은 공기 벗하노라면 심신 덩달아 풋풋해지겠고 산과 들의 신록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벌써부터 우릴 기다리신듯 반가이 뛰어나오실 시숙모님의 진솔한 미소가 가슴 가득 안겨온다. <1982년 5월, 대구매일신문 문화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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