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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핀 아침
10/01/20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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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한분이 집에서 땄다며 포도를 한아름 안겨주셨다. 포도주 제조용 씨없는 자잘한 포도였다. 첫미사 참례했다가 집에 도착하니 아침 여덟시 약간 넘었다. 포도를 수돗가에서 씻으려고 뒤란으로 나갔다. 포도 송이째로 티끌 가려질 때까지 몇번을 휑궈 물빠지도록 소쿠리에 받쳐두었다. 몇 알 포도를 따먹어보니 달큰새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내 기호에 딱이었다. 물기 말짱 거둬지면 포도알 따내 설탕부터 얹어두었다가 소주 댓병 사와 푹 잠기도록 부어줄 참이다. 한국에선 가을이면 해마다 검보랏빛 야생 머루를 사다 머루주 담곤 했던 생각이 났다.




포도 씻은 물 잔디에 붓다보니 수돗가 담장 옆에 진홍색 분꽃 환하게 피어있었다. 모든 식물이 그러하였듯 혹독한 폭염에 눌려 여름내 기 못 펴고 시난고난하던 분꽃 포기다. 그나마 담그늘 덕으로 겨우겨우 목숨 부지해 피어난 자그마하 소박한 꽃, 얼마쯤은 촌스러운 꽃이다. 저녁지을 무렵 피었다가 아침이면 입술 꼭 오므리는 꽃. 노을 내리는 시각, 주로 빨래 걷는다거나 장뚜껑 덮으러 나와서 만나는 꽃이다. 해마다 저 혼자 씨 묻었다가 살가운 보살핌없이도 쑥쑥 자라는 생명력 왕성한 꽃이 올해도 몇포기 뒤란에 자리잡았다. 분꽃 그늘에는 하얀 부추꽃, 먼 은하의 별 무리처럼 고요히 반짝대고 있었다.




완연해진 가을볕 래 뒤곁 채반에는 대추가 때롱하게 말라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전 교우분이 싱싱한 풋대추를 한 바구 주셔서 일일이 씨를 돌려빼고 내다널었다. 무엇이건 뽀송하게 건조시키기 좋은 가을 양광. 깻잎과 고추잎 사다 데쳐 말리는 채반 위로 아침햇살 어룽대며 어린아이처럼 장난질 치고 있었다. 여름 엷어져 갈 즈음, 조석으로 날씨 소슬해지는 구월 들자마자 일찌감치 가을옷 꺼내놓았더니 마술처럼 갑자기 기온 쑥 내려갔다. 어느새 시월, 현관에 조화일망정 그래도 가을 분위기 나는 꽃으로 바꿔꽂고 등황색 호박도 두 덩이 사다 곁들였다. 환절기엔 이처럼 소소한 일감이 줄을 서게 마련이라 동동거리지 않을 정도의 분주함 또한 즐겁기만 하다. 




살아간다는 게 어쩌면 이런 일들의 연속 아닐지. 날마다 꿈결같은 여행객이 된다거나 불꽃놀이하듯 대단한 이벤트만 이어지는 삶이란 어디에도 없으리라. 팡파레도 화려한 축하연 벌이는 호화스런 생활과는 거리가 머나, 날마다 들꽃축제같은 자잘한 일들로 채워지는 하루하루. 와이너리 찾아 근사한 분위기 속에서 포도향 음미한거나 레이 꽃목걸이 걸고 이국 향취에 젖을 때만이 환희로울까. 숨겨진 보석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미답의 여행지 걸어야만 흥분될까. 신선놀음하듯 최상급만 골라 취미생활한다거나 이름난 레스토랑에서 미식가다이 식도락 즐길 적에만 행복할까. 분꽃처럼 소박하고 촌스럽지만 깻잎 말리고 포도주 담그며 가을맞이 할 수 있는 내 식의 일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감사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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