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금석 정선 아리랑 백범 김구평전
09/25/20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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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금석 - 정선 아리랑  백범 김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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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옥고, 국가 지도자로 단련  김삼응 교수 백범 김구 평전
  나라는 망하고
   
나라의 사정이 급속도로 여려워졌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의 결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의 영향아래 놓이게 된 이래 1905년 을사조약과 함께 266년 만에 대청종속 對淸從屬
 관계가 대일종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나마 청나라에 종속되었을 때에는 내치 - 외교가 보장되고 동양권 전체의 관행처럼 되었던 조공 朝貢 관계이던 것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지배하애 놓이게 되었다. 헤이그 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킨 일제는 조선에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위해 1907년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을 강제 체결하였다.
   
 
정부가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때에는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고등관리의 임명은 동의를 받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등을 규정한 한일신협약은 내정의 박탈이었다. 특히 이 조약의 시행 규칙에 대한 비밀 협정에서 한국군대의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등이 들어있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은 일제에게 넘어갔다.
 
 '신문지법'의 제정으로 신문 발행 허가제, 신문 기사의 사전검열이 규정되면서 언론이 통제 - 장악되고, 보안법이 제정되어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과 함께 결사 - 집회가 제한당하고, 무기의 휴대가 금지되었다.
   
 
광무 황제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군대 해산 등에 반발하여 1907년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8년에는 전국에 의병장이 241명, 의병수는 3만 1245명에 이르렀다. 상당한 전과를 거두고 의병부대를 연합하여 서울에 진격하려던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일제는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식민 지배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한국에 차관을 반강제적으로 제공하여 1907년에는 총 차관이 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이르렀다. 이에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퍼저나갔다. 일제의 이익을 대변하여 을사조약을 찬양하던 통감부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분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전명운 田明雲 - 장인환 張仁煥에 의해 살해되고, 1909년 10월 26일 국적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처단되었다.
   
 
1909년 일제는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22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전라도 지방에는 의병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소부대와 200명이 넘는 여러 부대가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제의 집중적인 학살만행이 자행되면서 인명 - 재산이 초토화되었다
   
 
신민회가 결성된것은 1907년 11월 29일이다. 안창호, 이동녕, 양기탁 梁起卓, 조성환, 이동휘 李東輝, 신채호 申采浩, 노백린, 전덕기, 이갑, 김구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국권회복과 공화제 국민국가 수립을 긍극목적으로 하여 조직된 신민회는 그 방법으로 국민계몽, 인재양성, 경제적 신력양성을 추구하는 한편 해외 독립군기지건설, 무관학교 설립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에는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위 재무에는 전덕기 등이 선출되었다. 회원은 애국심이 강하고 헌신적이며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바칠 수있는 사람에 한하여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회할 수 있었다. 회원조직은 종적인 점 조직으로서 횡적인 조직을 전혀 알 수 없도록 철저한 빔밀을 유지하였다.
 
1908년에는 8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창설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문화운동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도지가 회사를 만들어 산업부흥에 노력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완전히 일제에게넘어갔다. 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사이에 조인된 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없어지고 500년 사직이 무너졌다. 개국이래 처음으로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다.
   
 
김구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열중하던 1909년 어느 날 양기탁으로부터 비밀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양기탁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을 비롯하여 이동녕, 안태국 安泰國, 이승훈 李昇薰, 이회영 李會榮 등이고, 논의된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제가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자는 것과,
둘째는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우고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각도에 책임자를 선발하여 기금을 할당하고 모금을 하기로 하였다. 김구는 황해도를 맡았다. 평남 안태국, 평북 이승훈, 감원도 주진수 朱鎭洙, 경기도 양기탁이 책임자로 선정되고, 각기 고향으로 내려가 지역 실정에따라 10만~20만 원까지 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구는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명망있는 애국지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큰 사명을 띠고 안악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제에 합방되고 말았다. 김홍량을 만나 서울에서 있었던 비밀회의 내용을 알려주자 선뜻 자기 가산으로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장연의 이명서와 그 가족을 먼저 서간도로 보내 이민 준비를 하도록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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