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창 이은주 - 배따리기 백범 김구 평전
09/24/201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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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도민요 배따라기 - 이은주 명창   백범 김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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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일대 교육 지도자로 발돋움     김삼응 교수  백범 김구 평전

   김구의 교육열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망하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교육구국의 길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최광옥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 海西敎育總會를 발족한 것도 신교육을 좀더 체계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황해도 일대의 저명한 교육자와 애국지사들을 회원으로 하고, 구한군 정령 九韓軍正領  노백린 盧伯麟과 교육계의 장로격인 은율의 정의택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회장에는 송종호, 학무총감에는 김구와 백남훈 白南薰 등이 선출 되었다. 해서교육총회는 황해도 일대의 모든 교육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교육문화 보급 운동을 적극 지원하며, 황해도의 모든 면마다 학교를 하나씩 짓는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경비는 면학회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김구의 노력은 각별하였다.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지방유지들을 만나 설득하고 학교에는 교재구입을 알선해주었다. 교육에 관심이 낮은 마을에 가서는 직접 신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하거나 최광옥 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하루는, 교육열이 높아 해주에 정내학교를 세우는 등 선각적인 활동을 벌여온 배천군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아 배천읍에 당도하였을 때, 군수이하 많은 사람이 환영을 나와 군수의 선창으로 "김구선생 만세 !" 하고 외쳤다.
   

김구가 깜짝 놀라 군수의 입을 막으며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해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 밖에 못 부르는데, 이게 무슨 망발이오"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전군수는 김구의 손을 잡고 웃으며 "개화시대에는 친구의 환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시라"고 하였다.
   

이 일은 어찌보면 하나의 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당시 김구의 의식 구조를 살피게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김구는 여전히 유교의 실천 형식으로서의 예 禮에 젖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때까지도 봉건군주 주의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이와는 달리 "단순한 봉건적 신분의식의 잔재라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하였다면 을사조약에 항의하는 형식에서 당시의 유생들이나 관료와 같은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다만 백범은 고종 황제를 대외적인 자주독립의 상징으로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행동을 취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는 분석도 따른다.6(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백범전기 편찬위원회, "백범 김구 : 생애와 사상". 교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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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회 강연회는 재령 - 장연 - 송화 지역으로 이어지고 가는 곳마다 김구의 집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송화는 각별한 곳이었다. 일제 헌병, 경찰이 해서 지방의 의병을 학살하고자 이곳에 주둔하면서, 수비대 - 경찰서 - 헌병대 - 우체국 등 우리 관사를 전부 점거하고, 군수 등 관속들은 민가를 빌려 사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실정을 지켜 본 김구는 분한 마음에 환등회를 열어 고종황제의 사진을 정면에 내걸고 그 자리에 모인 수천명의 청중과 군수 그리고 일본군 장교와 경찰에게 절을 하게 한 후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였다.
  
 과거 러일, 중일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본군이 촌락을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함으로서 우리는 배일을 하게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의 책임이 아니다.(백범일지)
   

이 강연으로 환등회는 중단되어 한인 감독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밤이 새도록 김구를 찾아와 격려하였다.
   

이튿날 이토 히로부미가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치안이 누구인가, 궁금하게 여기다가 이튿날 신문에서 그가 안중근인 줄을 알고 1894년 청계동에서 만난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 하였다.


안중근 의거로 한 달 동안 구속당해   

김구는 안중근사건 협의를 받고 한 달이나 구금되었다가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검사가 지난 행적을 적은 기록을 내놓고 여러가지로 심문하였으나 지난 날 안의사의 아버지와 세의 世誼가 있었을 뿐 직접적인 연루가 없다고 부인하여 불기소로 풀려났다.
  

 석방된 김구는 보강학교 保强學校의 교장을 맡게 되었다. 재령군 북을면 무상동에 소재한 이 학교는 반교사인 장덕준 張德俊이 학생인 동생 장덕수를 데리고 학교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김구는 여기서 후에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한 나석주 나석주와 노백린을 만나게 되고 이완용을 칼로찌른 이제명 李在明도 만났다. 이곳 출신인 나석주는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육에 힘쓰고 있는 신망받는 청년이었다.
  

 이재명은 당시 20여 세의 청년으로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가 나라를 일제에 빼앗겠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매국노들을 처단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구와 노백린이 이재명에게 그가 지니고 다니는 권총과 칼을 맡기라고 설득하자 이재면은 마지못해 무기를 노백린에게 내어 놓았다. 그 후 이재명은 서울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단도로 몇차례 찔렀으나 죽이지 못하고, 서대문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김구 자신과 노백린이 이재명의 총과 단도를 보관하였다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게 된 것을 크게 후회하며 가슴아파하였다.
   

김구가 보강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난 것이다. 이 학교를 지을 때에 고목을 베어 불을  때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치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숨어서  이를 지켜보는 도중, 이틀만에 불을놓는  '도깨비'를 붙잡았다. 붙잡힌 것은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신식학교 때문에 서당이 없어져서 직업을 잃게 된 것이 분하여 학교에 불을 놓은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김구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않고 타일러서 마을을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김구의 교육에 대한 의지는 대단했다.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바로잡는 길은 몽매한 민중을 깨우치는 신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이었다. 그의 교육정신은 양반 - 상놈의 반상을 넘어서고 남녀의 차별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반들을 찾아가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게 한 것이나 약혼녀 여옥을 직접가르치고자 한 것, 또 결혼한 최준례를 서울의 여학교에 유학케 한 것에서도 이런 정신은 잘 드러난다.
   

황해도에서의 기독교 신앙과 구국계몽 - 교육활동은 김구에게 독립운동의 동지들을 만나게 하고, 유학과 불교의 침체 된 학문의 영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서양문명을 체득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가 "교육구국활동에 전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촉한 인사들이 신민회로 연결될 수 있었고, 그 바탕이 독립운동에 있어 김구의 큰 자산이 되었다.7( 최기영,"백범김구의 애국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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