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민요 - 박연폭포 백범김구 평전
09/22/20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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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도민요 - 박연폭포   백범 김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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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만이 살길이다, 교육구국활동   김삼응 교수 백범김구 평전
 
   고향에 돌아온 김구는 "지식을 업신여기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나라가 국민으로하여금 나라가 곧 자기 집이라는 것을 깨닫기 하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없다" 는 생각으로 더욱 교육사업에 정진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뜻에서 문화군 초리면에 설립한 서명의숙 西明義塾의 교원으로 들어가 아동들을 가르치다가 이듬해 안악 김용제 金庸濟의 초청으로 양산학교 楊山學校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안악에는 김용제 - 김용진의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子姪 김홍랑 金鴻亮과 최명식 崔明植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중하였다. 안악뿐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세워졌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 崔光玉을 평양에서 초빙하게 되었다.
   

김구는 1907년 여름 최광옥 등이 만든 면학회 勉學會가 주최하는 시범 강습소의 강사로 초빙을 받았다. 면학회는 1906년 11월 최광옥이 김용제, 김홍량, 최명식, 송종호 등 애국지사들과 교육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조직한 단체이다. 면학회는 교육뿐 아니라 출판과 서적 보급에도 힘쓰고 있었다. 1907년, 여름 교육구국활동의 일환으로 제1회 하기 시범강습회가 안악읍 소천리 향청지에서 열렸다. 이 강습회에는 안악군내는 물론 신천, 재령, 송화, 봉산, 은율, 정연군 등의 소학교 교사와 교사가 되기를 회망하는 70여 명의 젊은이가 모여 들었다. 
  

 강사진은 최광옥을 비롯하여 고정화, 이보경(춘원 이광수), 김구 등이 맡았다. 이광수 李光洙는 당시 재기 발랄한 17센의 소년이었다. 이들의 열띤 강의는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고 이에 안창호는 "우리 삼천리 깅토 13도마다 안악과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다" 라고 격찬하였다. 3(안악군민회, "안악군지 安岳郡誌".1976.)
   

김구와 이광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구는 32세의 청년이고 이광수는 17세 소년이었다. 1919년 김구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있을 때 이광수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 겸 사장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곧 변절하여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종신하면서 김구와는 더 이상 상면하지 못하였다.
   

해방 후 김구가 환국하여 "백범일지" 국사원판 國士院版을 간행할 때, "안악 출신의 김선량 金善亮이 이광수의 재주와 문장을 빌리려고 이광수에게 윤문의 일부 도움을 위촉했다고 한다. 당시 윤문은 백범의 허락을 받아 행했으나, 백범은 윤문자가 춘원 이광수인 줄은 몰랐다고 전해지고 있다."4 고 하는 것처럼, 김구와 이광수의 인연은 질기게 이어졌다.(신용하, "백범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강습회는 1908년 여름의 제2회와 1909년 여름의 제3회 모임으로 계속되었다. 강습회에는 300여 명의 청년지사들이 모이고 제3회 모임에는 널리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7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나 서당훈장들까지 모여 강사들의 신지식을 경청하였다. 이때 김구가 단발을 강권하여 청강생 전원이 단발을 하였다고 한다.(5 최명식, "안악사건과 3 - 1 운동과 나.)
  

 황해도 지방에 신교육의 일대 선풍을 일으킨 김구는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다. 세월이 흘러서 많은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고향의 문명 수준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양반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이유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예날처럼 하대하지는 않았지만 어물어물하는 태도를 모였다. 상민의 자식으로 취급하여 하대를 받던 청년이 의로운 투쟁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신교육의 선구자로서 안약 지방의 교육 열풍을 주도할 만큼 성장했으니, 그런 김구를 맞은 양반들의 심사는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 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효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깐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백범일지")
   

이런 중에서도 김구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준영 숙부의 달라진 태도였다. 숙부는 항상 김구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알고있다가 장련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직접 지켜보고는 태도가 바뀌었다.
   

고향에 온 김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가지고 온 환등기 幻燈器를 보이면서 새로운 문명의 사조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3000리 강토와 2000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고 외쳤다. 환등기는 황제의 진영을 비롯하여 동서양 영웅의 우상과 서양의 개화상 등을 담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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