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은중경 - 백범 김구 평전
09/18/201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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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은중경恩重經    백범 김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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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신앙과 교육사업   김삼응 교수 백범 김구 평전

   젊은 김구가 20대에 겪은 고난은 보통 사람이 일생 동안에 겪는 고난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J.R. 맥도날드는 이렇게 말했다. "능숙한 선장은 폭풍을 만났을 때에 폭풍에 반항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 늘 확고한 승산을 가지고 최후의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서 활로를 열고자 한다. 여기에 인생의 고난을 돌파하는 비결이 있다."
   

김구는 여옥이 죽은 보름 후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장련읍 사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오인형 진사가 초청한 것이다. 오 진사는 전답 20여 마지기와 과수원을 교육사업에 쓰도록 김구에게 주었다. 오 진사의 사랑에 학교를 세워 오 진사의 아우이며 독실한 예수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학교는 오 진사 집안의 아이들과 근처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학교 문을 열자 1년이 못되어 학교와 교회는 크게 확장 되었으며, 김구는 기독교를 믿으면서 공립학교 교원으로 아동교육과 전도사업에 힘쓰게 되었다. 김구는 고능선에게서 전통 유학을 배우면서도 일찍부터 서구문명에 눈을 떴다. 그래서 "의리는 학자에게 배우고 일체 문화와 제도는 세계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면 국가에 복리가 되겠다"('백범일지')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사업에 나서고 기독교인이 되어 전도상업을 벌인 것이다.
  


 "김구가 기독교에 정신적으로 입교한 것은 1903년 가을이고, 아마도 1903년 11월 한 달간 헌트 W. B Hunt 목사가 황해도 지방을 방문하고 110명에게 세례를 줄 때, 김구도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1902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1년여 만에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1903년 12월 31일 부터 2주간 열린 평양의 겨울 사경회 등에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전식으로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1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김구는 1894년 동학접주 시절 농민군의 종사 從事 우종서를 만나게 되고, 1902년 우종서는 기독교를 전교하면서 김구에게 기독교 신봉을 권하여, 부친상 탈상 이후에는 가독교를 믿고 신교육을장려하기로 결심하였다. 김구는 당시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교육운동의 배경에 기독교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가 야소교로부터 계발되고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자는 거개 야소교에 투신하여 폐관자수 閉關自守하든 자들이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설두 舌頭로 문외 門外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야소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대부분 중류이하이나 실제 학문으로 배우지를 못하고 우부우부 愚夫愚婦들이 선교사의 숙달치도 못한 반벙어리 말이라도 문명족인 때문에 그 말을 많이 들은 자는 신교심 외에 애국사상도 생겨 전 민족에 다수가 이 아소교 신봉자임은 은우치 못할 사실이다.('백범일지')
  

 김구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은 메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 국권희복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기독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조동걸은 백범기념관에 전시된 설명문 가운데 '백범사상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2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백범사상의 뿌리는 유가 - 도가 - 도참가 - 무가 - 동학 - 주자학 - 불교 등 동양사상을 망라한 위에 기독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마치 야생마와도 같은 김구의 정신적 편력은 마침내 기독교 사상의 초원에 이르렀다.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가를 거쳐 다다른 정신사의 기착지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다양한 변화는 외양이었을 뿐, 외양의 한 꺼풀 밑에 켜켜이 쌓인 본질은 나라사랑의 애국심이었다. 이 애국심은 흔히 민족주의라는 당의정 糖衣錠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김구의 민족주의는 그가 거쳐온 종교와 사상의 편력만큼이나 넓고, 깊고 다양하다. 그의 정신사에서 오랫동안 발효되어온 애국심은 평생의 고난 속에서도 마르거나 줄어들지 않는 샘물이었다.
  

 신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에 매진한 김구는 그 해 여름 평양에서 예수교 주최로 열린 사범 강습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평양 숭실하교 학생으로 교육계몽사업에 종사하던 최광옥 崔光玉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의기투합하여 많은 토론을 하던 중에 최광옥은 김구가 아직 미혼아라는 사실을 알고 안신호 安信浩라는 신여성을 소개하였다.
   

안신호는 도산 島山 안창호 安昌浩의 여동생으로 미모의 20세 재원이었다. 김구는 최광옥 등과 함께 안신호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최광옥을 통해 결혼 승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안신호와의 약혼도 곧 께지고 말았다. 도산이 미국 가는 길에 상하이 어느 중학교에 다니는 양주삼 梁柱三이라는 사람에게 자기 동생과 혼인할 것을 권하고, 자기 누이에게도 양주상이 졸업한 후 결혼하자고 편지를 썼던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김구와 안신호의 혼담이있을 때 양주삼에게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다.
   

안신호는 고민 끝에 두 사람을 다 버리고 한 마을에서 자란 김성택과 혼인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구에게는 또 한 번 여성과 혼담이 깨지게 된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가 섭섭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안신호가 찾아와 사과하면서 앞으로 오라비라고 부르겠다고 하였다. 김구는 서운한 생각도 금방 사라지고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결단에 감동을 받았다. "이 안신호라는 여성은 훗날 백범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에 갔을 때 백범의 안내역을 맡게된다."(3 백범김구기념사업회, "백범김구 :생애와 사상,. 교문사, 1982.)
  

 여러차례의 곡절 끝에 김구에게 나타난 새로운 여성은 신천 사평동에 사는 최준례 崔遵禮라는 18세의 처녀였다. 최준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는 청상과부로서 세부란스 병원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며 두 딸을 키웠다. 큰 딸은 의사에게 시집보내고 사위가 신천에서 개업하여 따라와 살게 되었다. 김구의 이 혼담도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중매는 교회의 영수 양성칙이 섰는데, 그 전에 김씨는 둘째 딸을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한 상태였다. 그런나 최준례가 그쪽을 반대하고 자유 결혼을 주장하여 김구에게 허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어머니와 미국인 선교사들도 강성모와 결혼해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최준례는 자유 결혼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구의 능력과 인품을 알아 본 것이다. 두 사람은 자유의사로 약혼을 하고 기미구는 최준례를 서울의 경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교회에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교회의 책벌을 받았지만, 얼마후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해주고 책벌도 해제하여 곡절 많았던 김구의 결혼은 생사되었다. 이 때 나이 김구 29세, 최준례는 1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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