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Darling Clementine - 백범 김구 평전
09/15/20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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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h my Darling Clementine con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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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여의고 약혼녀마저 세상 떠나   김삼응 교수 백범 김구 평전

   창수가 환속하여 고향에 도착한 것은 1899년 늦은 가을이었다. 감옥살이와 승려생활을 하는동안  벌어진 국내외의 큰 변화를 알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경계하는 눈초리와 창수를 농사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숙부 주장 때문에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탈옥수로서 쫓기는 몸이기도 했다.
   

얼마 후 창수는 다시 고향을 떠나기로 작심하고, 강화도로 김주경을 찾아갔다. 인천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애써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의 계흭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김두래라고 소개하고 김씨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의 아우가 맞으며 김주경은 3,  4년째 집을 떠나 형의 소식을 몰라 궁금하다면서 반겨주었다.
 

  창수는 김주경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조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김주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후 김두래 훈장이 글을 잘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져 인근에서 모여온 학동이 30여명이나 되었다. 강화도에서 것 달 동안의 훈장 생활을 하던 창수는 김주경 친구를 동해 학자 유완무 柳完茂의 소개로 전라도 무주에서 사는 이수발을 만난 데 이어 무주 유완무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유완무는 학식이 풍부하고 품격이 있는 사람이어서 배울바가 많았다. 어느 날 유완무와 그의 벗 성태영 成泰英작명으로 이름을 창수에서 거북 구 龜로 바꾸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蓮下로 하였다. 아명인 창암에서 창수로, 다시 구로 바뀐 것이다. 창수가 아버지의 작명이었다면 구는 타인이 지은 이름이다. 무슨 의미로 이름을 거북 구자로, 자와 호를 연꽃 연자로 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구는 유완무의 소개로 강화도에 사는 주윤호 진사집을 찾아갔다. 강화도에 도착하여 김주경의 소식을 물었으나 알길이 없었다. 주 진사는 김구를 반가이 맞으면서 백동전 4000냥을 노자로 내놓았고 김구는 이돈을 지니고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을 거쳐 해주읍 비동에 살고있는 고능선 선생을 5년만에 찾아 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김구에게  만주에 건너가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더 이상 유교사상으로는 서양 문명의 힘에 대항할 수 없으며 이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해야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생의 권유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김구가 텃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한 상태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였으나 병세는 별 차도가 없었다. 1년여 동안 이들 대신에 감옥살이을 하느라 몸이 극도로 왜약해진데다가 빈한한 가세로서는 명의나 명약을 쓸 처지도 못 되어 병을 얻자 쉽게 위독해진 것이다. 김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아버지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흘려 넣어드렸더니 얼마를 더 사셨다는 말을 생각하고, 선뜻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넣고 살은 구워서 약으로 드시도록 했으나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 부모의 병환에 자식이 단지 斷指하여 피를 먹이거나 살을베어 구어 먹이는 행위가 야만스럽지만 당시에는 효자들에게서 가끔 나타나는 미담이고 효행이었다.


   김구는 아버지의 병세가 별차도를 보이지 않자 피와 살의 분량이 너무 적은 탓이라 생각하고 전보다 더 크게 살을 베어만 놓고 너무나 아파서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 割股는 효자나 할 일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백범일지)는 내용에 이르면 김구의 효심과 인간적인 고뇌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은 "효孝와 자慈의 도리는 모든 선의 으뜸으로, 하늘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은혜가 지극히 깊고, 그 윤리가 지극히 무겁고, 그 점이 가장 간절한 것이다"라고 "퇴계집"에서 가르쳤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던 김구는 집에 돌아온 지 14일 만에  자신의 무릎을 베고 새상을 떠난 아버지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전율했다.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누대로 이어진 가난과 상놈이라는 멸시를 받아가며 외아들 하나를 잘 키워보려는 일념 하나로, 험한 세상 을 어렵게 살다가 50세를 일기로 숨졌다. 김순영뿐 아니라 당시 이 땅의 민중 대부분이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부를 도와 농사일에 열중할 때 주위에서 혼삿말이 오갔다. 숙부가 돈 200냥을 주고 이웃 동네 상민의 딸고 결혼시키려 하자 김구는 돈을 쓰고 하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상중에 농사를 지으면서 한 해를 보내고 김구의 나이 27세가 되었다. 1902년 정월, 일가댁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가 친척 할머니로부터 친정 당질녀 되는 한 처녀를 소개받았다.
17세의 여옥이라는  이 처녀는 딸만 넷을 둔 과수댁의 막내딸이었다. 김구는 "돈에 대한 말이 없어야 하며, 학식이 있어야하며, 당자와 서로만나 말을 해보는 것"을 조건으로 처녀를 만나기로 하였다.


   당시 상민 출신의 총각들은 같은 상민 처녀에게 장가를 들더라도 적지않은 돈을 지불하는 관습이 있었다. 또 혼인전에 맞선을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처녀 쪽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구는 친척 할머니와 그 처녀의 집으로가서 처녀와 만났다. 김구는 처녀에게 "내가 지금 상중이라 1년 후에나 성례를 할 텐데 그때까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글을 배울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처녀가 이에 응하여 약혼이 성립되었다.


   김구는 이 약속을 지켜 틈나는 대로 여옥에게 글을 가르쳤다. 비록 10살의 나이 차이지만 김구에게 여옥은 정다운 약혼녀였다. 해가 바뀌어 1903년이 도자 어머니는 김구에게  2월 아버지의 탈상이 끝나면 혼인을 해야 한다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던 중 여옥이 병으로 위독하다는 기별이 와서 김구가 달려가 간호를 했으나 보람도없이 사흘만에 숨지고 말았다. 김구는 손수 여옥의 주검을 염하여 장사지냈다. 두번째 약혼녀까지 떠나보낸 김구의 상심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한 민족 한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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