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 - 백범 김구 평전
09/03/201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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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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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첫 혼사 - 김삼응 지음 백범 김구 평전

   백범의 생애, 그 고난에 찬 삶의 역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민족적인 운명과 개인적인 운명을 분리시키지 않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백범에게 고난의 근원은 어디일까.
  
 부패하고 기울어가는 나라 國와 상민의 아들로 태어난 가정 家, 즉 민족적인 운명 國과 개인적운명인 '국가' 國家의 운명이 겹치는 고난이었다.
   
백범이 태어나고 자랄 적에 나라의 사정이 그렇게 부패하고 어렵지 않았더라면, 비록 나라의 사정이 어렵더라도 상민의 가정출신만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크게 다라졌을지도 모른다.
   


신천에서 청계동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능선 선생의 맏아들 원명 元明 부부가 코레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집에 들르기전에 고 선생 댁을 찾았다. 선생은 오히려 태연자약하면서 장손녀와 성례를 치르도록 하자고 말하였다. 창수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그간의 경위를 들었다. 선생이 아버지를 사랑으로 불러 "창수가 범의 상을 가졌으며,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며 천하를 놀라게 할 인물"이라고 칭찬하며 자신의 장손녀와 약혼할 것을 청하여 두 사람의 약혼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이었다.
  

 이 얘기를들은 창수는 선생이 자기를 그토록 생각해주신 것에 대해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와 같은 상민의 자식을 학덕이 높은 양반이 손녀사위로 맞아들이겠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이후에 선생댁에서는 창수를 예비사위로 대접해주었다.
  

 이 해가 저물녘에  창수는 선생을 찾아가 여행에서 보고느낀 점을 얘기하면서 단발령 斷髮令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두만강 -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지세도 요새로 삼을 만하여 동포를 이민하여 양병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보고하였다. 소옥생의 아들과 만나게된 사정과 김이언을 만나 의병에 동참하였다가 실패한 일 등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여 개국 504년인 1895년 11월 17일을 건양 建陽 원년 1월 1일로 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태자와함께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 유길준 兪吉濬은 고시를 내려 군인, 관리들로 하여금 칼, 가위를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강제로 백성의 머리를 자르도록 하였다. 이 같은 조치는 고종의 자의가 아니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크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단발로인한 분노의 폭발에 만반에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곧 반일 감정으로 이어졌다. 백성들은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금수로 전락케 하는 조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은 오랜 유교적인 전총과 관습을 무시한 졸속으로 단발령을 강제하려다가 국정개혁을 결집시킬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끓어오르는 반일의 분위기 속에서 전국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창수는 단발령으로 인한 민중들의 반일감정을 지켜보면서 고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다. 곧 이어 안 진사, 고 선생, 창수는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안 진사는 예상외로 이길 가망이없는 거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봉기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단발령에 대해서도 머리를 깎이게 되면 깎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안 진사의 이 같은 발언으로 고 선생은 절교 선언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며 창수도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안 진사 같은 인격자가 의병봉기를 망설이고 온 백성이 반대하는 단발령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적지않게 살망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되었거나 제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슴까지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도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백범일지')
   

젊은시절 창수에게 가장많은 정신적 - 사상적 영향을 끼친 안 진사와 고 선생은 여기에서 갈라서게 되었다. 안 진사는 주자학에서 개화파로, 고 선생은 주자학에서 척사위정파로 사상과 노선이 갈리게 되었다. 이들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사회가 온통 이와같은 갈등관계에서 싸우게 되면서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
   

창수는 선생의 견해를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혼인을 한후 선생과 함께 청계동을 떠나 만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가서 의병봉기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혼사에서 마가 끼어들었다. 김치경이라는 사람이 선생을 찾아와 자기의 딸과 창수가 이미 정혼한 사이라고 하여 창수의 첫 혼사는 깨지고 말았다. 창수는 첫사랑의 여인을 무척 사랑하였으므로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들었던 것이다."('백범일지')
   

파혼의 배경에는 엉뚱한 사연이 따른다. 10여 년 전 창수 아버지가 함경도 정평에 사는 김씨에게 취중에 김씨의 딸과 혼사시킬 것을 언약하고, 그 후 이 언약을 지켜 사주를 보내고 김씨의 딸이 창수의 집에 놀러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수는 이 처녀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아서 약혼은 파기되고 김치경의 딸은 다른데로 혼약한 상태였는데, 창수가 양반의 손녀와 결혼한다는 소문을듣고 돈이라도 뜯어낼까 하는 마음에서 고 선생을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혼시는 깨지고 창수는 만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 다시 외로운 방랑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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