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 펄 시스터스 컴백 - 백범김구 평전
08/29/20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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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아 - 배인숙 배인순 펄 시스터스 컴백 - 백범김구 평전
 
                                                       Source youtube

                   애기접주 동학군 선봉이 되다 - 김삼응 지음 백범 김구 평전
 
   창수 일행이 해주로 돌아왔을 즈음에는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 東學農民戰爭이 삼남으로 번지고 황해도 동학도들도 크게 들먹거리고 있었다. 호남에서 시작된 혁명의 열기가 황해도 지역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이미 삼남의 동학도들이 동학군에 호응하라는 공함 公函을 받은 터이고 양반과 관리들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신변이 불안한 상태여서 황해도 지역의 봉기는 때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15명의 접주와 이 지역 지도급 동인들은 긴급 회합을 갖고 거사에 뜻을모았다. 해주 죽ㅊ천장 竹川場을 총소집의 장소로 정하고 각처 도인들에게 이 뜻을 알렸다.
  

 창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 접의 이름을 팔봉접이라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어 표어로는 '척양척왜 斥洋斥倭의 넉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토벌하러내려온 경군 京軍,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연비중에서 총기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였다. 창수는 "본시 산협상장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 즉 총을가진 군사가 700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백범일지' )
  

 여기저기에 격문이 나붙고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이으면서 삽시간에 많은 군사가 모여들었다. 며칠 후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우선 황해도의 중심부인 해주성을 공격하여 탐관오리와 왜놈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창수를 선봉장으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창수가 평소 병서에 대한 조예가 깊고 또 부대내에 포수가 많다는 이유가 들어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접주들이 앞장서서 총알받이가 안 되려고 젊은 창수를 내세웠던 것이다.
  

 백범은 후일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이겠지만는 자기네가 앞장을서서 총알받이가 되기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백범일지')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선봉되기를 꺼리지 않고 '선봉'이라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둥에 서서 해주성 공격에 나섰다. 총지휘부에서는 작전계획을 창수에게 일임하였다.
  

 창수는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않고 오합지졸의 수성군 200명과 일본군 7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공격케 하여 수성군을 그쪽으로 유인한 후에 자신이 서문을 공격할 때 총사령부에서는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대로 한 부대를 이끌고 서문을 공격했다.
   

이 때에 수명의 일본군이 성 위에서 사격을 하자 선봉대는 도망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도망하자 기회를 놓칠세라 더욱 심하게 총질을 하여 동학군 3~4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는 동학군은 몇명이 쓰러지면서 전의를 잃고 산으로 들로 달아나기 바빴다. 
   

창수는 퇴각명령을 내리고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나 되는 희학동 곽감역 댁에 유진 留陣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창수는 이번 계획의 실패를 분석하면서 우선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경군이나 일본군과 싸워 이기기 어렵다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동학교도가아닌 사람도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초빙하여 군사훈련을하는 교관으로 삼아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수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鄭德鉉, 우종서라는 사람이 찾아와 동학군이 갖춰야할 몇가지 헌책 獻策을 제시하였다.
   

 첫째,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절을 하거나 경어를 쓰는 것을 폐지할 것.
   둘째,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강도             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셋째, 어진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경륜있는 사람을 모을 것.
   넷째, 전군을 구월산에 모아 훈련할 것.
   다섯째,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일본)가 사서 쌓아 둔 쌀 수천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                  사에 옮겨 군량으로 삼을 것. 

   창수는 이 계획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을 중용하면서 전군을 구월산으로 옮길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 진사라는 사람으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는 청계동에 의려소 義旅所를 두고 산포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동학군을 토벌한다는 바로 그 장본인이기 때문에 동학군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창수는 일단 정덕현에게 밀사를 만나보게 하였다. 이 사건은 향후 백범의 생애에 큰 전기가 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샛별같이 찬연히 빛나는 두 인물, 백범과 안중근 安重根 가 家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 진사, 안태훈 安泰勳은 당대에 글 잘하고 글씨를 잘 쓰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슬하에 중근, 정근 定根, 공근 恭根,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맡아들 중근은 나중에 국적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처단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근과 공근도 항일 독립운동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안태훈의 가문은 하나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많은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게된다.
   

안태훈은 해주 사람으로 난세를 피하여 1880년부터 신천군 청계동에 은거하고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아들 안중근과 함께 의려를 일으켜 동학군을 토벌하여, 팔봉부대도 경계할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때마침 20리 상격하여 희학동과 청계동 군사가 대진하고 있었던 그 때, 동학군 토벌대장인 그가 해주 출신이므로 백범의 집안이나 애기접주로서의 명성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2 조동길,"백범의 청소년기 생활과 의병운동",'백범과 민족운동연구'제1집 백범학술원)
  

 안 진사의 밀사를 만나본 정덕현은 창수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내용은 "안 진사는 안목이 높은 사람으로 인재를 아낄 줄알며 전부터 김 접주(창수)님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점, 그런데 희학동과 청계동 사이의 거리가 20리 밖에 안되니 만약 김 접주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실패하면 김 접주의 생명과 성명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되면 아까운 인재를 하나 잃게 될 것인즉 거동을 신중히 하라는 호의의 충고를 전하더라"는 것이다.
   

정덕현은 이어서 "안 진사는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안 진사의 됨됨이가 보통이 아니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창수는 참모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이편을 치지 아니하면 이쪽도 저쪽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이와같은 공수동맹의 밀약은 19세 팔봉접주 창수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동학군은 호남의 요충지인 전주성을 장악하고서도, 정부가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이자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이는' 우를 범할 위기감에서 1894년 6월 11일 '전주화약' 全州和約을 맺게 되었다. 이는 자칫 동족끼리 싸우다가 외적을 끌어들이는 '개문납적 開門納賊'을 막고자 하는 동학지도부의 고육책이었다.
   

그렇지만 전국 여러 곳에서 동학군과 일본군이 조종하는 관군은 동족상쟁을 벌여야 했다. 동학군은 최신병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의해 30~40만 명이 살상되는 희생을 치려야 했다. 이런와중에 안태훈의 혜안과 '애기접주'의 결단으로 동족살상를 막고, 이후 구국운동과 독립전쟁의 끈끈한 인연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창수는 구월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재령과 신천에 있는 일본군의 쌀도 모두 옮겼다. 매일 군사훈련을 시키고 송종호, 허곤과 같은 학자를 모셔오고 패엽사에서 하은당 荷隱當이라는 이름 높은 학자에게서 설법을 듣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일본군은 동학당을 수색하기 위해 구월산 주변에까지 파견되었으나 창수 부대와의 교전은 이루어지지않았다. 그렇지만 해주 서쪽에서 동학군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15명이 사망하고 2명이 포로가 되는 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황해도 전황을 일본군의 보고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3 "병찬감 복원 福原이 병참총감 천상 川上에게 한 보고", '한국현대사',신구문화사
   

황해도 지방 동학당 진압을 위해 파견된 각 부대는 평양에서 파견된 일군 一群의 수비대와 연락을 취하고 재령 - 안악 - 신천 - 해주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적(동학군)은 이미 해산하고 이상이 없으므로 모두 병참지로 돌아왔음 용산에서 파견된 1소대는 지난 11월 14일 강릉현 부근에 집함된 적을 격투하고 목하 개성에 머물러 적장수색중 敵將搜索中.
   

창수가 동족과의 살상을 막고 구월산에서 일본군과 싸울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을 때 엉뚱하게 다른동학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해 섣달, 창수는 때늦은 홍역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동학접주로서 구월산 일대에서 큰 세력을 잡고있던 이동엽 李東燁의 군사가 불의의 습격을 해왔다. 


이동엽의 군사들은 그 전에도 몇 차례나 창수부대 진영 가까이까지 친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그때마다 노략질을 하는 패거리를 붙잡아다가 가혹한 벌을 내려서 그쪽의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 또 이쪽의 군사 중에서도 죄를 짓거나 노략질을 하다가 그쪽으로 도망친 자가 늘어서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늘어나고 창수의 군세는 줄어들고 있었다.
   

창수가 병석에 누어있는 12월 어느 날,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왔다. 어지러히 총소리가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서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장수를 잃은 창수의 부대는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크게 패하고 본진은 적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창수는 동학접주의 칭호를 버리기로하고 군대지휘권을 허곤에게 맡긴 터였다. 라이벌로 인식해온 이동엽측으로부터 자신을 제거하려는 명분을 없애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렇게 되자 창수의 군대는 '장수잃은'부대가 되고 사기가 크게 저하되기에 이르렀다. 창수의 부대가 일패도지 一敗塗地한 상태에서 이동엽이 소리를 질렀다.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領將 이종선 李鐘善만을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들은 창수는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고 맞고함을 쳤다. 이종선은 함경도 출신으로 장사하러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었다. 총사냥을 잘하고 유덕하여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화포영장 火砲領將으로 임명되어 창수부대의 핵심이되었다.
   

이동엽이 대의명분상 창수를 죽이지는 못하고 그의 핵심참모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종선을 끌어다가 총을 쏴서죽이고 말았다. 왜병을 지척에두고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골육상쟁이었다.
  

 창수는 이종선의 시체를안고 통곡하면서 어머니가 남의 윗사람이되였다고 지어보낸, 평생 처음입어보는 명주저고리를 벗어 그의 머리를 감싸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창수가 백설위에서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주고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창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부산동 정덕현의 집으로 갔다. 정덕현은 창수가 이종선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을 막으면서 이동엽이 패엽사를 친것은 제 손을 친 것과 마찬가지라고 위로하였다.
   

실제로 얼마 후 경군과 왜군이 이동엽 군대를 공격하고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했다. 이로서 구월산 창수군사와 이동협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 동학당은 전멸이 되고 말았다. 골육상쟁이 남긴 처참한 결과였다. 


황해도 동학당뿐 아니라 일본군의 참전으로 동학혁명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애기접주' 백범의 동학전쟁 참여는 척양척왜와 만민평등의 사상적 배견과 민족주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동학접주와 동학군의 선봉장 경험은 그에게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게 할 기희를 주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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