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한국 불교는 세계의 중심
11/09/2018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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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는 세계의 중심
 
 불교는 두 길이 있는데 곧 대승과 소승이다. 
대승불교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뿐인데 어디서 그러면 대승사상을 배울 수 있는냐 하는 것이 문제다. 중국은 공산국가라서 들어가 배울길이없고 그리고 일본은 확실히 문자로는 불교가 발달해 있으나 알맹이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불교의 진수를 배울 수 없다 한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마음에 대한 논란을 많이하고 있으나 거의 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어떤 일본학자는 요새과학에서 말하는'에너지 그것이 불성이다.' 라고 말해도 일본학계에서는 아무말도 없다. 그러니 그것을 아니라고 말하자니 다른자료가 없고 시인하자니 너무 막연한 실정이다. '에너지가 불성이다.' 하는 것은 유물사상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불교가 텅 비어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내가 배워보니 부서지기는 했어도 배울 것이 있었다. 내가 승려가 되어가지고 이 산문 저 산문으로 돌아다니면서 나이많은 스님들한테 언제 승려가 되었느냐 무엇을 배웠느냐 하고 자꾸 물어보니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배울것이 있었다.
 
또 선방을 나와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가 참선하는 방법도 묻고 공부를해서 나도 조금은 맛을 보았다. 지난날 공부해 온 경로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공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한국에 태아나 공부한 덕이다.
 
내가 오십년전 출가할 때는 우리민족은 일제치하에서 가혹한 곤혹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하든지 침략의 근성과 압박정치의 씨를 남기지않고 뽑아버려야 하겠다고
강한 결심을 품었는데 마침 금강산에 계시는 훌륭한 박포스님께 발심하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깨치는 이 길이 있다는것을 모르고 남을 원수로 생각하고 자꾸 죽일려고만
했으니 잘못했으면 세세생생 원수를 맺을뻔 했었다.
전세계 인류에게 이 대자대비의 불교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즉 불교를 가르쳐준다는 소리는 인생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는 뜻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면 자연적으로 대자비의 불세계[佛世界]가 되고
약소민족은 자연 해방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아 전 세계의 독립을 이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원래부터 하나였다. 그러나 불교를 몰라서 오늘의 세계가 조각조각 분열되었다.

 나는 어딜가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마음을 밝히고 편벽된 집착심을 떠나야하며
무애자재한 자비가 원수의 경계가 없는 것이라고 항상 말하였다.
그리고 누구를 보든지' 우리가 무엇을 보는데 눈이 보느냐 마음이 보느냐.' 하고 물었다. 이것은 대학생이나 유치원 어린애나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러나 마음이 본다 눈이본다 또는 마음과 눈이 어울려 본다고 대개들 말한다.
사실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눈이 보고 눈에 그림자가 들어오니까 카메라처럼 신경이 전달하여 뇌수가 판단한다.'라고 대답한다. 건전한 사람으로서 눈을 뜨고 사물을 보지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거울을 깨끗이 닦아 놓으면 자연히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이 건전한 사람이
눈을 뜨고 앉아서 보지않을 수 가없을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다 긍정한다. 그런데도 뜻밖의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번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이라고 하는것은
그 작용함과 상상함에 따라 이마음이 무엇을 보고싶어 하는 생각이 있을 때에는
 크고작은 모든것이 모두가 다 보인다.
 
안보이면 안보이는 것까지도 알고있다. 그러하지만 마음이 볼 생각을 안하고
딴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가령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운명이라든지
또는 무엇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든지 그럴 때에는 눈을 아무리 뜨고 있어도
도대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같은 경우 눈이 썩은것도 아니고 신경이 상한것도 아니고 뇌수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작용없이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은
마음이보는 것이지 눈이보는 것이 아니다.눈은 거기에 대한 인연이란 관계를
가지고있다. 가령 귀로서 안보이고 코나 입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 보이니 그것은 볼 수 있는 기관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가령 밖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 혹은 사람이 이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면 밖에 나가 보아야 할 텐데 문이 걸려 빨리나갈 수는 없고 해서 문구멍을 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구멍을 뚫어야 보이지 뚫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구멍으로 보았다고해서 문구멍 그것이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구멍이 아닌 안에서 사람이 본 것이다. 문구멍 그것은 본다 안본다가 없는 것이다. 한개의 구멍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똑같은 눈동자의 구멍이다. 구멍이 막혀있기 때문에  그 안에 맑은 액체가 고여있는 것이다. 실제는 그 구멍에다 정유수보다 더 맑은 액체를 꽉채워가지고 그구멍으로 내다보는것이 눈동자로 보는 것이다.
 
모든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기계구조를 달리 해 놓은 것처럼 귀로서는 우주에 편재하고 있는 모든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마음이 그 무엇을 들으려고 하면 개미 발자국 소리인 그 조용함도 다 들리고
그 무엇을 듣지 않으려고 할 때는 아무리 옆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하여도 들리지 않는다. 심한경우에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안 들린다. 
 
마음이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소리를 들으려고만 하면 개미 움직임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미세함을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런것을 보아도 확실히 마음이 보고 듣는 것이지 구멍이 보는 것도 아니고 뇌 수가
듣는것도 아니다. 코로 냄새를 맡으려고 하면 온갖 것을 다 맡는데 맡을 생각이 없을 때는 코에다 똥을 한덩어리 발라도 냄새를 모른다.
구린내가 콧구멍으로 꽉 차게 들어 갈텐데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입도 맛을 알려고 할 때는 온갖 음식을 다 먹어도 낱낱이 그 맛을 다 알지만 맛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없을 때는 종일 먹고있어도 맛을 모른다. 입이 맛을 아는것이 아니고 마음이 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 오관[五官]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고무주머니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가 덥다 춥다 또는 부드럽다 꺼끄럽다 이것은 사람몸이다. 이것은 가마니다. 하는 이런것을 아는것도 마음이 알려고 들때 아는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육체 즉 피부에 강한 자극을 주어도 모른다.
 
그러니 확실히 이 육체 전체가 무정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눈은 하나의 텔레비젼이고 입은 방송국이고 귀는 라디오고 몸은 아주성능좋은 안테나고 머리는 밧데리며 육체신경은 밧데리에 연결된 마리카락같은 전선이다.

 이와같이 좋은 기계를 만들어놓고 마음이라는 조종사가 앉아서 보고 싶을 때는
텔레비전을 보고, 듣고 싶으면 라디오를 듣고 방송이나 무전을 치고싶으면 방송도하고 밧데리가 약해졌을 때는 충전을 한다고해서 밥이나 김치또는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다.  그래도 이것들을 하나도 안쓸려면 안쓸수도 있다.
 
육체 이놈을 아무데나 내버리고 앉아있으면 육체가 있으나 마나 아무것도 없다.
이런것을 보면 확실히 정신 즉 마음과 육체가 둘이있는 줄 알 수있다.
 
그것을 가지고 정밀한 기계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요사이 우리가 생물학을
배울 때 이런 것이다 저런것이다. 해서 현실 그대로를 배우면 다 된것같이 알았지만
불교를 배우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시 재검토를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났다.

 가령 우리가 생명의 비유를 들어보자. 한개의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달걀은 노른자와 흰자가있고 노란자 위에 밥알만한 씨눈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달걀을 하나의 물질적으로 볼때에는 맑은 액체에다 여러가지 요소를 섞었디고
본다. 그 '요소는 혼합물이다. ' 라고 보면 된다. 생명없는 무정물이니까 혼합물이라
 본다. 혼합물인데도 먹으면 이익이되는 혼합물이다.
 
병아리를 까기위해 암탉이 달걀을 품고 있는 것을 사흘 후 깨어보면 노란자위에 있는
 씨눈 즉 배자에 붉은 핏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 핏줄이 돋아나오는데 어느정도 지나면 그 계란이 핏덩어리 같이된다. 열흘 후에는 밥알같은 배자 그것이 돌이라도 깰 수있는 단단한 주둥이가 된다.
그와동시에 달걀내부에는 생명을 발아하는 구조가 생긴다. 발톱이나 털 오장육부가
동시에 생긴다. 

삼주일 후에는 하얀털을가진 예쁜 병아리가 탄생한다.그 혼합물인 달걀 자신이 아무리 생명을 일으키려 하여도 제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신비한 조화가 나오느냐 하고 가만히 보니 실제로 그 안에 있는 배자에서 나온다.
모든것이 그안에 들어있다.
 
그렇다면 그 배자만이 전체가 아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좁쌀만한 아주 작은데서
나온다. 그러나 자꾸 그 핵심을 찾으니 좁쌀 눈만한 것이 있는데 거기서 그런조화가
나온다. 다시 정밀히 들여다 보니 바늘 끝으로도 찌를 수 없는데서 그 무궁무진한
조화가 나온것을 알았다. 그래도 자꾸 자꾸 더 조사를 해 보니까 나중에는 바늘로
 찌를 틈도 없다.

 그러니 수학상으로 말하면 무한소[無限小] 즉 점 이전이다. 점 이전이라고 하면
진공[眞空]도 아니다. 없는 무[無]도 아니다. 없는것조차도 없어진 것이다.
점[點] 이전의 그것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다.
 
그 혼합물을 가지고 병아리를 만들고 뼈도만들고, 털도 만든다.
그러니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생물학자들이 '물질의 결정 그것이 생명이다.'
하고 말하면서도 신비라고 감탄한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이다.' 하고 결정을 찾지못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다. 바늘로도 찌를 수없는 점 이전으로 들어갔다
하면 그것은 적다가 적은 무한소이다. 무한대가 있는 것 같이 무한소이다.
무한소라고 하는 것 역시 한계가 없다. 적다가 적어서 적은 것까지도 없으니 한계가
 없는 것이다. 한계가 없으니 도로 그것이 무한대이다. 즉 무한소는 무한대로 통한다.
 
간추려 다시 말하면 神만이 우주의 주재자란 유신사상이나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의
유물사상으로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암혹의 구렁만이 깊어갈 뿐 참된 인생의 영원한
행복은 찾을 수 없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불타[佛陀]의  유심[唯心]사상만이  참혹한 암혹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기전에는
이 지구상에 평화와 자유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불법의 새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기희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용맹정진 참희하여야 한다.
 
이 마음을 여의고는 만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오직 이마음을 밝히고
이 마음을 의지하여 만사를 자제할 수 있는 영원 무궁한 대 자유인이 되어서
만중생의 구세주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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