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천국을 향하여 (12)-10.000 달란트 비유
03/16/202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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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은 용서에 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회수는 당시의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그 당시에는 용서의 개념은 극히도 희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회수를 말씀하심으로 완전한 용서라는 새로운 사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용서에 대한 성도의 의무와 완전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달란트 비유 


      마태복음 18장 21 - 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끄는 말


그 동안 살펴 본 천국에 대한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습니까?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보이는 천국이 있고, 보이지 않는 심령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호흡을 하고 있고, 우리의 뜨거운 피가 우리의 심장에서 뛰고 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믿고 살아가고 있다면 내 심령에 반드시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들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구원자로 믿는다면, 이미 우리의 심령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심령에 임한 천국을 이제 바라보고, 내 심령에 임한 천국을 지키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죽어서 갈 천국이나, 심령의 천국이나 모두 믿음으로 얻어지지만,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알고 있는 것은 무지한 사람의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분명히 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을 믿으십니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져라,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모두 가지셔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용서하는 믿음을 가져야, 천국을 소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35절 말씀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 말씀은 용서에 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회수는 당시의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그 당시에는 용서의 개념은 극히도 희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회수를 말씀하심으로 완전한 용서라는 새로운 사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용서에 대한 성도의 의무와 완전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줄거리


용서와 선행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용서는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연합하는 것이요 죄와 하나 되는 것이며, 죄와 함께하는 협잡질입니다. 용서는 결코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적극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불법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인 용서는 불법과 짝할 수도, 그리고 불법과 하나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모든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죄를 배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 위해 먼저 용서할 수 있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용서는 이웃을 살리는 길입니다. 정죄는 사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절망 속으로 몰아놓으며, 좌절감 속에 빠져 아예 생명을 포기하게 하는 무형의 살인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는 상처 난 곳을 싸매어 주는 것이며, 허물을 덮어 주어 가리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에로의 인도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희망과 생명에로의 인도, 그것은 용서만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살리는 일입니다. 용서가 없는 마음에는 미움만이 자리 잡습니다. 사랑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은 따스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은 죽음만이 자리 잡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침묵과 고요, 그리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절박한 고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습니다. 사랑에 기쁨이 충만하듯이 용서에는 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의 마음을 환한 빛으로 가득 차게 하며, 싱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고 진리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합니다. 고독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그리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용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이것이 인간의 기준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최대치로 생각하며, 그것을 초과하거나 뛰어넘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의 교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내 의는 이정도면 되겠지”, “내 사랑은 이정도면 되겠지”, “일곱 번씩이나 용서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라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인간적 수준과 계산을 뛰어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의를 생각하고 내세우기보다도 하나님의 의와 수준에 맞추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한한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한입니다. 그에게는 기준 그 자체가 없습니다. 그의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 즉 무한대의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과 용서는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으며, 모든 죄를 융화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용서는 바로 이러한 용서, 즉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인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기억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다시 그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다시금 그의 잘못을 되씹지 않는 용서입니다. 영원토록 그의 범죄를 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는 원수 된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 완전히 우리의 죄악을 잊어 버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도말하셨습니다. 예수의 용서는 우리의 죄를 자신의 앞에 두는 용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자신의 뒤로 던져버리는 완전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 말씀에,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함을 통하여 천국을 증거 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용서는 끝없이 용서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용서 방법은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끝없는 용서를 말씀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를 한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내 주위 사람들입니다. 용서함 받은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 못할 때, 임금의 용서는 취소가 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 할 때 나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지만, 내가 남을 용서 못할 때 나도 용서함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천국을 소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천국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심령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여 주겠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에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 해 줄 때 그것이 곧 용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형제의 죄를 끝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말했던 일곱 번의 죄도 용서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한 두 번의 죄도 용서 못하고 가슴에 미움을 품고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용서를 받았습니까? 나는 도저히 용서함 받을 수 없는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았는데도, 나는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미움을 품고 살고 있다면, 어떻게 그 심령에 천국이 임하고, 후에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임금과,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 사람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 빚을 졌는데, 임금은 그 빛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임금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빚진 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만 달란트는 어마 어마한 액수의 빛입니다. 당시에 한 달란트는 한 사람이 6000일(약17년)을 노동해서 벌어야 할 액수입니다. 당시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한 데나리온 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1년 세금이 800 달란트였습니다. 그렇다면 만 달란트의 액수는 어마 어마한 액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 달란트는 약 6천 억 원 가량 된다고 해석했습니다. 호크마 주석은 오늘 날로 본다면 몇 조원은 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금액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 달란트의 액수가 헤아릴 수 없는 액수인 것처럼,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는데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교훈입니다. 주님 당시 용서에 대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우선 바리새인들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까지 용서합니다. 그 이상은 비굴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세 번 이상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 받는 사람을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용서에 관한 기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두 번이나 세 번 용서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 말씀에,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까지 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번, 랍비들은 세 번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적어도 일곱 번까지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답을 하십니다. 일곱 번을 한 세트로 하여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490번까지는 용서하고 491번부터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무한 용서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랍비들과는 달리 주님은 무슨 근거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격하고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해명이 본문 23절 말씀 이하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어떤 나라 왕이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관료들을 감사하다고 한 관리가 국고를 무려 만 달란트나 축낸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1억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최저 생계비였습니다. 1억 데나리온이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1억 가정이 하루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로마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피를 짜듯 수탈해간 세금이 1년에 800달란트였습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면 얼마나 큰 금액입니까? 아무리 잘 사는 나라였다고 해도 나라 살림이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돈을 한 관리가 해먹은 겁니다. 왕은 그 관료를 잡아들여 네 몸과 처와 자식,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관리는 조금만 참아 달라며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왕이 태도를 바꾸어 엎드려 비는 종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가 진 천문학적인 빚을 몽땅 탕감해 줍니다. 그 이유라면 그 종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와 탕감을 받아 풀려난 종이 집으로 돌아가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가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빚 갚으라고 합니다. 동료는 곧 갚겠다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그를 끌고 가 감옥에 잡아넣습니다. 자기도 금방 용서 받고 탕감 받았음에도 비정하게 푼돈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분개해서 왕에게 진정합니다. 왕이 노발대발하며 그 관리를 다시 잡아들입니다. 32절 이하입니다. “32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어떤 주석가는 100데나리온이 한 주머니에 다 넣을 수 있는 돈이고, 만 달란트는 장정 8600명이 지고 가야할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한 주머니에 담을 빚쯤은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무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의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김 같이 내 형제와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자기는 다 용서 받았음에도 형제의 하찮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본문 말씀이 말하는 악한 종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것처럼 나도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너무도 어렵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본문 말씀의 얘기를 듣고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악한 종이 누구일까요? 우리는 다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큰 빚을 졌던 사람입니다. 무려 만 달란트나 되는 천문학적인 빚을 진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직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탕감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뿐 아니라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남을 탕감해 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요 의무요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본문 말씀의 악한 종은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을 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멱살을 잡은 것은 자기를 탕감해 준 주인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배신입니다. 우리가 악한 종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느낌 하나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원수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만 달란트나 되는 천문학적 금액을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면 멱살을 잡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받아 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 받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신 것을 극단적이라고 했습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그렇게 용서하고 계십니다.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무한용서의 수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합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자성하십시다. 


누가복음 17장 4절 말씀에,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죄를 얻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일곱 번은 고사하고 1년에 한 번 남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너그러운데 남에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게 독이 됩니다. 나치 피해자들 가운데 후에 그들을 용서한 사람들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끝내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로가 행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곤혹스런 기도입니다.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황금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 말씀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 용서함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신다면 먼저 남을 용서하십시오. 그게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복수하면 복수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 파멸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용서 받는 자까지 살립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 말씀에서 “너희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라고는 불쌍히 여겨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합니다. 


악한 종의 최후 운명을 보십시오. 극적으로 받은 은혜가 다 취소되고 옥졸에게 넘겨집니다. 여기에 나오는 옥졸은 고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언제 다 갚습니까? 이제 틀렸습니다. 아마도 종신형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할 줄 몰랐던 종의 마지막입니다. 이 교훈의 결론이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성도의 신앙생활이 종착역을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어떤 임금이 종들과 회계하여 합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서 여기서 어떤 임금은 성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본다면 우리는 엄연히 그의 종 된 입장에서 회계를 받아야 할 사람이요 회계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무한한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로서 마치 만 달란트 빚을 지고도 갚을 길이 없이 딱한 입장에 놓인 빚진 자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러면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여기 큰 재물을 소유한 부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도 본인이 인정하건 부인하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빚진 자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만 달란트의 빚은 수치로 보아서 엄청나게 많은 액수의 빚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오히려 이보다도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날마다 들이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또 자연적인 모든 혜택에 대한 값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억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빚진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귀중한 은혜는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일입니다.


그 빚은 우리의 힘으로 갚을 수가 없는 빛입니다. 본문 말씀의 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은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명하기를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합니다(25절). 이것은 어찌 보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빚은 반드시 갚을 것이나 갚을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서라고 갚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2장 3절).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빚은 결국 갚아야 하듯이 죄는 분명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아니하고 죄인이 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사랑도 용서도 관용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치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은 있습니다. 큰 빚을 진 작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그는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26절) 하며 애원을 했습니다.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겸비하게 낮춘다는 뜻으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큰 빚을 진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셨던 신앙의 위인 다윗 왕도 고백하기를 시편 51편 3절,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애원해야 할 것이며, 다윗 왕과 같이 우리의 죄를 고백합시다. 그러면 겸손히 통회하는 자와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이사야 57장 15절).


주인에 의해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불쌍한 마음으로 종을 바라본 주인은 그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일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탕감 받은 빚진 자는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애원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냈습니다(27절). 놓아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을 베풀어주심으로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부여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긍휼을 입는 자는 타인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태복음 5장 7절). 그래서 큰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이웃을 감싸주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새로운 빚을 더 져서는 안 되며 우리에게 빚진 자가 있다면 주저 말고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성도의 바른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빚을 임금에게 탕감 받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도저히 용서함 받을 수 없는 죄를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나도 마땅히 나의 주위 사람들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므로, 나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만 달란트 빚 진 사람이 어떻게 빚을 임금에게 탕감 받았습니까? 본문 27절 말씀에, 단순히 빚 진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임금이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빚 진 사람을 불쌍히 여긴 사랑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 준 것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상상 할 수 없는 빚을 빚 진 사람이 탕감 받은 것입니다. 만 달란트 빚 진 사람은 임금 앞에서 아마 울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나중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 같은 모습입니다. 길에서 이 사람은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를 만났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28절 말씀에, 얼마를 빚을 지었다고 했습니까? 겨우 백 데나리온입니다. 오늘날로 계산한다면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당이므로 하루 임금 5만원으로 계산한다면 500만원에 불과 한 액수입니다. 수 조 억 원에 비하면 500만원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행동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에,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고 했습니다. “목을 잡고”라는 말씀은 원문으로 해석하면 “모가지를 비틀고”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백 데나리온 때문에 길에서 상대의 목을 비틀면서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엎드려서 아무리 사정을 했지만 이 사람은 봐주지 않고 고소를 해서 감옥에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자신은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지극히 적은 빚을 진 동료를 옥에 가둠으로 자신이 받은 용서를 스스로 무효화시킨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심은 곧 우리도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산을 할 수 없는 엄청난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빚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모든 성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빚을 하나님께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깨끗이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죄로 인한 모든 부채입니다. 그리고 빚의 탕감이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엄청난 부채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탕감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빚을 탕감해 준 사실에서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기도 하고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심어 준 원리로서 이것을 통해서 사회는 선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백 데나리온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도 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던 주인을 본받았더라면 그처럼 포악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옥에 가두거늘.” 엎드려 간구하는 목소리를 채주는 외면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자기는 만 달란트라는 거금의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를 괴롭히며, 옥에 가둔 자에게 주인은 탕감의 약속을 파기하고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커다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정죄하기를 즐겨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세상에 알려지는 악한 일이 행악자에게는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채주의 악한 일은 그 주인에게 알려졌습니다. 불의한 일은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심히 민망한 감정을 유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를 시정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주인에게로 달려가서 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죄는 비록 어둠 속에서 지은 죄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게 됩니다(욥기 12장 22절, 편 90편 8절, 전도서 12장 14절). 그리고 그는 마땅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34절).


우리는 중심으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심으로 용서하는 사람만이 긍휼의 심판을 받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만 달란트 빚은 그 탕감 선고를 받았지만 아직 그 실효성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그와 같이 용서해 줄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무자비하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에게 내려진 주인의 무죄 선고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는 용서를 베풀지 못할 때 그 용서는 얼마든지 무효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 14-15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중심으로 용서하는 사람은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만일 그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였다면 그에게 내려진 만 달란트에 대한 주인의 무죄 선고는 여전히 유효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인의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영광이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잠언 19장 11절). 하나님의 용서는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의무가 따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의무요 용서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일생을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엄밀한 면에서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성도입니다. 다만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크게 빚을 진자의 태도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며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임금은 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다시 불러서 원상 복귀시켜 이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만 달란트를 갚지 못하면 평생 감옥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성도 여러분, 이 악한 종이 혹시 내가 아닙니까? 내가 바로 만 달란트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아무 조건 없이 나의 죄를 사해 주셨는데, 나는 나의 주의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지 못하고 있다면 이 악한 종과 똑 같은 사람입니다. 


마무리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아주 잘 외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한 후에 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형제의 죄도 용서하지 못하고 나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어떤 사람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에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 자신은 용서함 받고도 자신은 남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남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35절 말씀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본문 말씀의 악한 종처럼 하나님에게 어마 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어마 어마한 죄가 단지 불쌍함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무조건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이 용서,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우리는 누구든지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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